삼천포와 망구의 묻지마 관광 - 3.
7월 1일 (여행 셋째 날)
아침 8시 15분 비행기로 대만에서 태국으로 날라간다.
5시 20분에 잠에서 깨어 준비를 마치고 그동안 나름 정들었던 러브호텔을 떠나
공항 버스를 타고 우리는 중정 공항으로 간다.
공항 도착시간 7시 15분.
시간이 빠듯하다.
에바 항공 창구 앞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마음이 급해진다.
지난 밤 우리는 "용산사" 라는 절에 갔었다.
타이페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이었다.
절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절 전체를 휘감아 도는 향내와 그 몽롱한 안개같은 향의 연기에
취해 절로 경건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울 모친은 걸쭉한 입담과 육두문자의 남발,그리고 말보다는 애정이 듬뿍 담긴(??) 손찌검을
더 즐겨하시는 이미지와는 달리 독실한 크리스찬이시다.
게다가 권사님이시다.
그런 모친의 딸인 삼천포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연말 .요렇게 일년에 딱 세 번 정도만
교회에 나가는 불량 크리스찬이다.
그래도 누군가 삼천포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름,크리스찬이지요.."라고 대답한다.
권사님의 딸인 삼천포가 용산사에서 부처님께 넙죽 절을 한다.
일곱개의 향을 피워 부처님 앞에 꽂아 놓는다.
삼천포는 예전부터 불교의 교리를 참 좋아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얼마나 온화하시고..또 겸손하신가....
부처님의 표정은 얼마나 다정하시고...또 소박하신가...
그 분 앞에서 삼천포는 경건한 마음으로 작은 소망을 빌어본다.
무사히 여행 할 수 있게 해주십시요...행복한 마음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십시요...
용산사의 부처님께서 삼천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만 같은 작은 사건이 생겼다.
에바 항공 부스앞.(7시 45분)
남들은 3~4분이면 비행기 티켓을 들고 에바 항공 부스를 쏙쏙 빠져나가는데 우리 부스만
벌써 15분 째다.
당황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자판을 두드리느라 바쁜 에바 항공 직원은 우리 눈치만
슬슬 보고 있다.
그때가 이미 8시.
망구: 쟤 뭐하냐? 우리 이러다 비행기 놓치는 거 아냐?
삼천포 : 그러게 말야, 신참인가? 왜 저래?
우리끼리 쑥덕거리고 있는데 그 직원이 우리에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날린다.
신참 : 저어기요...정말로 죄송한데요...제가 조금 실수를 해서 좀 늦어졌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두 분 좌석을 비지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해드렸으니 양해해 주십시요..
비지니스 석이란다...
우리들 : (새초롬하니) 알았어요!!! 우리가 양해하죠...뭐..!!!
우리는 비행기 티켓을 받아 들고 기다림에 지쳐 조금 화가 난 굳은 표정으로 돌아선다.
돌아서자마자...
급한 발걸음을 하며 망구를 흘낏 보니 웃고 있다.
얼굴 전체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망구의 저토록 온화하고 행복감이 충만한 표정은 망구가 좋아하는 교촌 치킨의 날갯죽지살을
삼천포가 양보했을 때 이후로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다.
망구가 말한다.
"천포야~ 너 웃고 있어...~~히힛...!"
그렇다.
삼천포도 환하게 웃고 있다.
표정 관리가 안된다.
비지니스석 티켓을 손에 쥐고 우리는 날아갈 듯 가볍고도 우아한 발걸음으로 비행기를 타러 간다.
망구 : 천포야~ 나 왜 이러니? 목이 점점 뻣뻣해지면서 자꾸만 턱이 하늘로 치솟는데.."
삼천포 : 오오오~!!! 거만한 컨셉~! 너무 잘 어울려~! 비지니스 석에 딱 어울리는 거만함이야!
비지니스석 티켓을 쥔 손에서 부터 뿜어져 나오는 저 아우라~~!!! 오오오~~!!!
망구 : 나 럭셔리 해보여? 티켓도 잘 보여?비.지.니.스.석이라고 눈에 확 띄여?
삼천포 : 용산사 부처님께서 우리 소원을 들어주셨나부다...히히힛.....아..나두 왜 이렇게
자꾸만 발걸음이 거만해지지?
망구 : 이러니까 내가 졸부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니까...우리 둘이 아주 쌩쑈를 한다~!
삼천포 : 그치그치...비행기 표 한 장에 이렇게 촌스럽게 난리가 났는데..우리가 졸부라도 됐으면
진짜 꼴불견이었겠다..캬캬...
난생 처음 삼등석을 벗어나본다.
망구와 삼천포의 자리는 떨어져 있다.
망구 : 아~씨...우리 자리 떨어졌잖아! 비지니스 석이면 뭐해? 열라 심심하겠다~
삼천포 : 글게~ 세시간동안 수다도 못 떨고 뭐하냐?
자리를 확인하며 실망감에 얼굴이 찌푸려지던 순간도 아주 잠시 망구가 갑자기 쾌재를 부른다.
망구 : 앗싸~!!! 천포야 하이파이브~~!!!
삼천포는 얼떨결에 망구가 내민 손에 하이파이브를 한다.
망구 : 축하합니다~! 삼천포님~! 파트너로 솜털이 뽀송뽀송한 유럽인으로 추정되는 꽃소년이
당첨되었습니다.!!!^^ 덧붙여 망구님의 파트너는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꽃총각입니다.!^^
망구의 환희에 차서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삼천포의 옆자리를 보니 망구의 말대로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귀여운 미소년이 앉아 있다.
(오오~~ 용산사 부처님~ 감사합니다~!!! 라이벌 종교의 고위직(?)에 종사하시는 모친을 둔
이 삼천포의 소원까지 들어주신 부처님~~! 그 자비로우심에..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아아....
그러나 금발 곱슬머리의 미소년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직전에 잠이 들더니 기내식도 마다하고
잠만 쿨쿨~ 잔다.
삼천포는 그 귀여운 소년의 얼굴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그 보송보송한 얼굴에서 탱글탱글하게
영글어가는 여드름을 몇 갠가 발견한 순간, 영원한 로망이었던 순정만화속의
왕자님의 이미지는 확~ 깨져 버리고 순간 엄마모드로 돌입! 그 아이의 여드름을 두손가락으로
살포시 눌러서 톡~! 하고 터뜨려 주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떨다가 주체할 수 없는 그 욕망을
가라 앉히기 위해 하이네켄 맥주를 두 캔 연속 원샷으로 마셔버리고는 이내 깊이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삼천포의 오지랖 : 1.누군가의 여드름은 꼭 내손으로 짜주고 싶어진다.
2. 버스안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내 앞사람의 등에 묻은 머리카락은 꼭
떼어 주는 지나친 친절함! 머리카락이나 먼지를 떼어주는 순간 앞사람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략 난감해진다.그사람의 등에 가 있는 내 손도
무안해지고 ㅡㅡ;)
11시에 방콕 돈무앙 공항 도착.
공항 버스를 타고 카오산으로 간다.
9개월만에 다시 온 방콕의 거리 풍경은 여전히 정신 없는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교통 체증과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연도 변함이 없고.
삼천포는 여행 경력이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두 번이나 여행한 나라는 태국이 처음이다.
예전엔 그랬었다.
세상은 넓고 여행지는 많다고...
여권 페이지는 많고 도장 찍을 나라는 많다고...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너무 좋아서 홀딱 빠져서 상상병을 앓았었다...
"베트남"에 환장해서 밤이고 낮이고 몽롱한 상태로 폐인처럼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다시 가지는 않았다...
그랬던 삼천포가 태국이라는 나라에를 다시 왔다.
삼천포 : 두번째로 오니까 그저 그렇네...너무 편안해서 동네 같다고나 할까?
망구 : 세 번 째인 나는 어떨 거 같애?
헉~! 그렇다.
망구는 이번이 세번 째 태국행이다.
태사랑에 집결한 수많은 태국 폐인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내밀겠지만,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망구는 태국이라는 나라를 세 번이나 간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카오산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오늘 밤 홍익여행사에서 예약한 밤버스를 타고 라오스의 비엔티엔으로 가기 전까지
일단 홍익 여행사에 들러서 캐리어를 맡기고, 그담엔 시장에 가서 티셔츠와 바지와 쪼리를
사고 맛사지를 받고 난 뒤 맥주나 한 잔 하고 저녁 7시에 밤버스를 타자!
계획은 요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가 문제였다.
당최 홍익여행사를 찾을 수가 없는 거다.
홍익인간에 들러서 물어보면 될텐데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는 몰랐었던 뒷골목의 길이며 숨어 있던 게스트 하우스나 술집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무렵,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카오산의 첫입성을 자축하며 또 우리의 즐거운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할머니께
40 밧을 드렸다.
캐리어를 끌고 비를 맞으며 헤매다 우리는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일단은 목이 말랐다.
술과 함께 외길 인생 반백년으로써 몸은 본능적으로 시원한 맥주를 찾고 있었다.
작년에도 자주 갔었던 "와일드 오키드"에 갔다.(낸시 맛사지 바로 옆에 있슴다.)
타이거 비어 두 병을 시키고 볶음 국수를 시킨다.
비는 추적추적 내려서 온몸이 습기 때문에 불쾌한 끈적임으로 가득하다.
삼천포 : 망구야~ 너무 습해서 불쾌하지?
망구 : 난 모르겠는데....습하다는 게 모야?
되묻는 망구의 눈빛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진지하고 천진난만하다.
삼천포의 죽마고우 망구와는 20년도 넘는 세월동안 다져온 우정이라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봐도 척척 통하는 사이다.
다른 친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견고한(?) 사이건만 우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대화가 딱 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고기" 와 "습기" 다.
망구는 고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모닝고기도 좋아라 하면서 먹는 식성의 소유자다.
삼천포는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심지어는 고기를 처음 입에 댄 것도 이십대 중반 때 부터였다.
그래서 고기맛에 좀 예민한 편이다.
조금만 누린내가 나거나 맛이 강하면 바로 젓가락을 놔버린다.
삼천포를 만나면 망구는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망구 : 마포갈비 가자~! 그 집 고기 디게 맛있어~!!! 가자 ..가자..
삼천포 : 진짜 맛있어? 진짜루 믿어도 돼?
망구 : 응..진짜 맛있어....너두 먹어보면 깜짝 놀랄거야..
그러나 망구가 맛있다고 데려간 고깃집들은, 70% 이상이 실망스러운 집들이었다.
고기를 너무나 좋아라하는 망구의 입맛에는 모든 고깃집의 고기가 다 맛있었고,
고기계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는 경력의 소유자인 삼천포에게는 너무나 맛 없는 고기였기에
우리 둘 사이에서는 고깃집에 관한 묘한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맛 없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삼천포에게 망구가 살며시 고백했다.
망구 : 사실..나..고기 맛 잘 몰라...다 너무너무 맛있어서 어떤게 맛있는 고기인지 잘 모르겠어..
그후로 삼천포는 망구가 추천해주는 맛있는 고깃집에 대한 기대감을 버렸다.
그리고 몇 년후 망구가 말했다.
망구 : 나 이제 고기맛 안다~! 며칠전에 어떤 고깃집을 갔더니 별로 맛이 없드라구..캬캬..
그렇다...
망구에게도 드디어 맛없다고 느껴지는 그런 고깃집이 생긴 것이다...
"습기"도 마찬가지다.
삼천포 : 습기가 안 느껴져? 머리카락이 축축 쳐지고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느낌말야.
망구 : 아니..전혀 모르겠는데...
삼천포 : 눅눅하고 끈끈한 그런 거 말야..
망구 :몰라~! 난 전신이 건성이라 그런지 비가 오면 피부가 촉촉하니 너무 좋아~!!!
이러니 "습하다!" 라는 느낌을 공유할 수가 없다.
그치만,며칠 후 주구장창 비가 쏟아지는 라오스의 방갈로에서 망구가 말했다.
망구 : 천포야~ 나 드디어 습기가 뭔지 알았어..온몸이 끈적거리고 찝찝해..이게 습기
맞지? 그치?
또다시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망구의 모습을 보니 세상에는
맛 없는 고기도 있다! 라는 진리를 터득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9개월만에 다시 찾은 카오산은 여전히 변함 없는 모습 그대로다.
변한것이라면, 와일드 오키드 맞은편의 작은 집들이 죄다 허물어 있다는 것..아마도
새로운 게스트 하우스를 지으려나보다...
혼자 앉아서 한가로이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여자가 보인다.
일곱살도 채 안돼어보이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여행객들도 보인다.
서양 여행객들 중에는 갓난쟁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볼 때마다 참 새롭고 신기한 광경들이다.
와일드 오키드의 오토바이는 쉴 새가 없다.
끊임없이 피자를 싣고 배달을 간다.
우리가 세어 본 것만 해도 열 번 정도다...
얼마나 맛있는 피자길래....하는 호기심에 한 번 시켜본다.
120밧이다.
오오오오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다.
배달맨이 왜 그렇게 똥줄타게 바쁘게 배달을 다녔는지 이해가 가는 맛이다.
비는 추적추적 끊임없이 내리고 여기저기서 내뿜는 담배연기로 인해 안개가 자욱한 듯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망구과 삼천포는 타이거 비어를 연속 들이킨다.
얼마나 마셔보고 싶었던 낮술인가..! ㅋ
더운 날씨에 맥주 두 병에 알딸딸 취해간다...
망구 : 카오산 오니까 너무 좋다...동네 산책하는 것 같네..
삼천포 : 그치그치...아..너무 편안하다....떠나기가 싫어지네..
망구 : (눈 반짝반짝) 우리 라오스 가지 말까??? 걍 여기 죽치다가 태국 일주나 하자..
삼천포 : 그럴까? 사실 일정도 짧은데 라오스는 이동시간이 넘 길어..우리같은 노땅들은
걍 몸 편하고 맘 편하게 널널한 여행이 딱인데..
대낮에 마신 술 두병 때문이었을까...
아님, 카오산에 대한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점점 널부러지면서 암암리에 라오스행을 접고 태국에 눌러 앉는다는
밀약이 거의 성사단계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여행이란 게 뭐 별건가...
내 맘 내키는 대로..내 몸이 가자고 하는대로 발길 따라 가면 그만인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내가 끌리는 대로...내가 원하는 그것대로...
바람 따라 구름따라..정처 없이 흘러가는...나는 자유인이다.~~~!!!
망구 : 천포야~ 우리 홍익여행사에 버스비 미리 입금했잖아..37,700 원..라오스 안 가면
그 돈은 못 돌려받는거야?
삼천포 : (화들짝) 헉! 그 돈이면 술이 몇병이고? 안 돼..그 돈을 포기할 순 없어..라오스 가잣!!!
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가는 자유인을 부르짖으며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던 삼천포는
망구의 말을 듣는 순간 단호히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선다.!!!!!!!
37,700 원을 날릴 순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발걸음도 당당하고 씩씩하게 홍익 여행사를 찾아나선다.
자유인을 부르짖던 소심한 한 여행자가 라오스 행 밤버스에서 조용히 잠들어 간다......
* 에바 항공은 제가 이용해 본 항공 중 가장 좋았습니다.
대한 항공이나 아시아나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더군요..
깨끗하고 친철하고 좌석이 널찍해서 다리 뻗기도 편하구요.
제가 좀 장신이라 타이 스카이 같은 경우는 온몸을 구겨서 억지로 집어 넣었었
거든요...
비행 스케쥴만 잘 조정할 수 있다면 다음에도 또 에바 항공을 이용하고 싶습니
다.
오늘은 반짝~! 하고 해가 떴네요...
지난밤에 사춘기 소녀마냥 우울해서 조금 구질구질한 기분으로 잠들었더니
오늘 아침 제방엔 때 아닌 만월이 환하게 떴습니다.흑..
아침 8시 15분 비행기로 대만에서 태국으로 날라간다.
5시 20분에 잠에서 깨어 준비를 마치고 그동안 나름 정들었던 러브호텔을 떠나
공항 버스를 타고 우리는 중정 공항으로 간다.
공항 도착시간 7시 15분.
시간이 빠듯하다.
에바 항공 창구 앞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마음이 급해진다.
지난 밤 우리는 "용산사" 라는 절에 갔었다.
타이페이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이었다.
절 안으로 들어선 순간 절 전체를 휘감아 도는 향내와 그 몽롱한 안개같은 향의 연기에
취해 절로 경건해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울 모친은 걸쭉한 입담과 육두문자의 남발,그리고 말보다는 애정이 듬뿍 담긴(??) 손찌검을
더 즐겨하시는 이미지와는 달리 독실한 크리스찬이시다.
게다가 권사님이시다.
그런 모친의 딸인 삼천포는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연말 .요렇게 일년에 딱 세 번 정도만
교회에 나가는 불량 크리스찬이다.
그래도 누군가 삼천포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름,크리스찬이지요.."라고 대답한다.
권사님의 딸인 삼천포가 용산사에서 부처님께 넙죽 절을 한다.
일곱개의 향을 피워 부처님 앞에 꽂아 놓는다.
삼천포는 예전부터 불교의 교리를 참 좋아했다.
부처님의 말씀은 얼마나 온화하시고..또 겸손하신가....
부처님의 표정은 얼마나 다정하시고...또 소박하신가...
그 분 앞에서 삼천포는 경건한 마음으로 작은 소망을 빌어본다.
무사히 여행 할 수 있게 해주십시요...행복한 마음으로 행복한 기억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십시요...
용산사의 부처님께서 삼천포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만 같은 작은 사건이 생겼다.
에바 항공 부스앞.(7시 45분)
남들은 3~4분이면 비행기 티켓을 들고 에바 항공 부스를 쏙쏙 빠져나가는데 우리 부스만
벌써 15분 째다.
당황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자판을 두드리느라 바쁜 에바 항공 직원은 우리 눈치만
슬슬 보고 있다.
그때가 이미 8시.
망구: 쟤 뭐하냐? 우리 이러다 비행기 놓치는 거 아냐?
삼천포 : 그러게 말야, 신참인가? 왜 저래?
우리끼리 쑥덕거리고 있는데 그 직원이 우리에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색한 미소를 날린다.
신참 : 저어기요...정말로 죄송한데요...제가 조금 실수를 해서 좀 늦어졌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두 분 좌석을 비지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해드렸으니 양해해 주십시요..
비지니스 석이란다...
우리들 : (새초롬하니) 알았어요!!! 우리가 양해하죠...뭐..!!!
우리는 비행기 티켓을 받아 들고 기다림에 지쳐 조금 화가 난 굳은 표정으로 돌아선다.
돌아서자마자...
급한 발걸음을 하며 망구를 흘낏 보니 웃고 있다.
얼굴 전체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망구의 저토록 온화하고 행복감이 충만한 표정은 망구가 좋아하는 교촌 치킨의 날갯죽지살을
삼천포가 양보했을 때 이후로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다.
망구가 말한다.
"천포야~ 너 웃고 있어...~~히힛...!"
그렇다.
삼천포도 환하게 웃고 있다.
표정 관리가 안된다.
비지니스석 티켓을 손에 쥐고 우리는 날아갈 듯 가볍고도 우아한 발걸음으로 비행기를 타러 간다.
망구 : 천포야~ 나 왜 이러니? 목이 점점 뻣뻣해지면서 자꾸만 턱이 하늘로 치솟는데.."
삼천포 : 오오오~!!! 거만한 컨셉~! 너무 잘 어울려~! 비지니스 석에 딱 어울리는 거만함이야!
비지니스석 티켓을 쥔 손에서 부터 뿜어져 나오는 저 아우라~~!!! 오오오~~!!!
망구 : 나 럭셔리 해보여? 티켓도 잘 보여?비.지.니.스.석이라고 눈에 확 띄여?
삼천포 : 용산사 부처님께서 우리 소원을 들어주셨나부다...히히힛.....아..나두 왜 이렇게
자꾸만 발걸음이 거만해지지?
망구 : 이러니까 내가 졸부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니까...우리 둘이 아주 쌩쑈를 한다~!
삼천포 : 그치그치...비행기 표 한 장에 이렇게 촌스럽게 난리가 났는데..우리가 졸부라도 됐으면
진짜 꼴불견이었겠다..캬캬...
난생 처음 삼등석을 벗어나본다.
망구와 삼천포의 자리는 떨어져 있다.
망구 : 아~씨...우리 자리 떨어졌잖아! 비지니스 석이면 뭐해? 열라 심심하겠다~
삼천포 : 글게~ 세시간동안 수다도 못 떨고 뭐하냐?
자리를 확인하며 실망감에 얼굴이 찌푸려지던 순간도 아주 잠시 망구가 갑자기 쾌재를 부른다.
망구 : 앗싸~!!! 천포야 하이파이브~~!!!
삼천포는 얼떨결에 망구가 내민 손에 하이파이브를 한다.
망구 : 축하합니다~! 삼천포님~! 파트너로 솜털이 뽀송뽀송한 유럽인으로 추정되는 꽃소년이
당첨되었습니다.!!!^^ 덧붙여 망구님의 파트너는 미국인으로 추정되는 꽃총각입니다.!^^
망구의 환희에 차서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삼천포의 옆자리를 보니 망구의 말대로
순정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귀여운 미소년이 앉아 있다.
(오오~~ 용산사 부처님~ 감사합니다~!!! 라이벌 종교의 고위직(?)에 종사하시는 모친을 둔
이 삼천포의 소원까지 들어주신 부처님~~! 그 자비로우심에..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아아....
그러나 금발 곱슬머리의 미소년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직전에 잠이 들더니 기내식도 마다하고
잠만 쿨쿨~ 잔다.
삼천포는 그 귀여운 소년의 얼굴을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그 보송보송한 얼굴에서 탱글탱글하게
영글어가는 여드름을 몇 갠가 발견한 순간, 영원한 로망이었던 순정만화속의
왕자님의 이미지는 확~ 깨져 버리고 순간 엄마모드로 돌입! 그 아이의 여드름을 두손가락으로
살포시 눌러서 톡~! 하고 터뜨려 주고 싶은 욕망에 몸을 떨다가 주체할 수 없는 그 욕망을
가라 앉히기 위해 하이네켄 맥주를 두 캔 연속 원샷으로 마셔버리고는 이내 깊이깊이
잠이 들어버렸다.
(삼천포의 오지랖 : 1.누군가의 여드름은 꼭 내손으로 짜주고 싶어진다.
2. 버스안에서나 지하철 안에서 내 앞사람의 등에 묻은 머리카락은 꼭
떼어 주는 지나친 친절함! 머리카락이나 먼지를 떼어주는 순간 앞사람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략 난감해진다.그사람의 등에 가 있는 내 손도
무안해지고 ㅡㅡ;)
11시에 방콕 돈무앙 공항 도착.
공항 버스를 타고 카오산으로 간다.
9개월만에 다시 온 방콕의 거리 풍경은 여전히 정신 없는 차들과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교통 체증과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매연도 변함이 없고.
삼천포는 여행 경력이 그리 많지 않다.
그 중 두 번이나 여행한 나라는 태국이 처음이다.
예전엔 그랬었다.
세상은 넓고 여행지는 많다고...
여권 페이지는 많고 도장 찍을 나라는 많다고...
"필리핀"이라는 나라가 너무 좋아서 홀딱 빠져서 상상병을 앓았었다...
"베트남"에 환장해서 밤이고 낮이고 몽롱한 상태로 폐인처럼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을 다시 가지는 않았다...
그랬던 삼천포가 태국이라는 나라에를 다시 왔다.
삼천포 : 두번째로 오니까 그저 그렇네...너무 편안해서 동네 같다고나 할까?
망구 : 세 번 째인 나는 어떨 거 같애?
헉~! 그렇다.
망구는 이번이 세번 째 태국행이다.
태사랑에 집결한 수많은 태국 폐인들에 비하면 명함도 못내밀겠지만,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망구는 태국이라는 나라를 세 번이나 간 참으로 특이한(?) 사람이었다.
카오산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오늘 밤 홍익여행사에서 예약한 밤버스를 타고 라오스의 비엔티엔으로 가기 전까지
일단 홍익 여행사에 들러서 캐리어를 맡기고, 그담엔 시장에 가서 티셔츠와 바지와 쪼리를
사고 맛사지를 받고 난 뒤 맥주나 한 잔 하고 저녁 7시에 밤버스를 타자!
계획은 요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가 문제였다.
당최 홍익여행사를 찾을 수가 없는 거다.
홍익인간에 들러서 물어보면 될텐데 길을 잃고 헤매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를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는 몰랐었던 뒷골목의 길이며 숨어 있던 게스트 하우스나 술집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무렵, 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할머니와 마주쳤다.
카오산의 첫입성을 자축하며 또 우리의 즐거운 여행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할머니께
40 밧을 드렸다.
캐리어를 끌고 비를 맞으며 헤매다 우리는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일단은 목이 말랐다.
술과 함께 외길 인생 반백년으로써 몸은 본능적으로 시원한 맥주를 찾고 있었다.
작년에도 자주 갔었던 "와일드 오키드"에 갔다.(낸시 맛사지 바로 옆에 있슴다.)
타이거 비어 두 병을 시키고 볶음 국수를 시킨다.
비는 추적추적 내려서 온몸이 습기 때문에 불쾌한 끈적임으로 가득하다.
삼천포 : 망구야~ 너무 습해서 불쾌하지?
망구 : 난 모르겠는데....습하다는 게 모야?
되묻는 망구의 눈빛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진지하고 천진난만하다.
삼천포의 죽마고우 망구와는 20년도 넘는 세월동안 다져온 우정이라 우리는 서로의 눈빛만
봐도 척척 통하는 사이다.
다른 친구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로 견고한(?) 사이건만 우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대화가 딱 두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고기" 와 "습기" 다.
망구는 고기를 너무나 좋아한다. 모닝고기도 좋아라 하면서 먹는 식성의 소유자다.
삼천포는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심지어는 고기를 처음 입에 댄 것도 이십대 중반 때 부터였다.
그래서 고기맛에 좀 예민한 편이다.
조금만 누린내가 나거나 맛이 강하면 바로 젓가락을 놔버린다.
삼천포를 만나면 망구는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망구 : 마포갈비 가자~! 그 집 고기 디게 맛있어~!!! 가자 ..가자..
삼천포 : 진짜 맛있어? 진짜루 믿어도 돼?
망구 : 응..진짜 맛있어....너두 먹어보면 깜짝 놀랄거야..
그러나 망구가 맛있다고 데려간 고깃집들은, 70% 이상이 실망스러운 집들이었다.
고기를 너무나 좋아라하는 망구의 입맛에는 모든 고깃집의 고기가 다 맛있었고,
고기계에 입문한지 얼마 안되는 경력의 소유자인 삼천포에게는 너무나 맛 없는 고기였기에
우리 둘 사이에서는 고깃집에 관한 묘한 대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맛 없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삼천포에게 망구가 살며시 고백했다.
망구 : 사실..나..고기 맛 잘 몰라...다 너무너무 맛있어서 어떤게 맛있는 고기인지 잘 모르겠어..
그후로 삼천포는 망구가 추천해주는 맛있는 고깃집에 대한 기대감을 버렸다.
그리고 몇 년후 망구가 말했다.
망구 : 나 이제 고기맛 안다~! 며칠전에 어떤 고깃집을 갔더니 별로 맛이 없드라구..캬캬..
그렇다...
망구에게도 드디어 맛없다고 느껴지는 그런 고깃집이 생긴 것이다...
"습기"도 마찬가지다.
삼천포 : 습기가 안 느껴져? 머리카락이 축축 쳐지고 온몸이 끈적끈적하고 불쾌한 느낌말야.
망구 : 아니..전혀 모르겠는데...
삼천포 : 눅눅하고 끈끈한 그런 거 말야..
망구 :몰라~! 난 전신이 건성이라 그런지 비가 오면 피부가 촉촉하니 너무 좋아~!!!
이러니 "습하다!" 라는 느낌을 공유할 수가 없다.
그치만,며칠 후 주구장창 비가 쏟아지는 라오스의 방갈로에서 망구가 말했다.
망구 : 천포야~ 나 드디어 습기가 뭔지 알았어..온몸이 끈적거리고 찝찝해..이게 습기
맞지? 그치?
또다시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망구의 모습을 보니 세상에는
맛 없는 고기도 있다! 라는 진리를 터득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9개월만에 다시 찾은 카오산은 여전히 변함 없는 모습 그대로다.
변한것이라면, 와일드 오키드 맞은편의 작은 집들이 죄다 허물어 있다는 것..아마도
새로운 게스트 하우스를 지으려나보다...
혼자 앉아서 한가로이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는 여자가 보인다.
일곱살도 채 안돼어보이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 여행객들도 보인다.
서양 여행객들 중에는 갓난쟁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볼 때마다 참 새롭고 신기한 광경들이다.
와일드 오키드의 오토바이는 쉴 새가 없다.
끊임없이 피자를 싣고 배달을 간다.
우리가 세어 본 것만 해도 열 번 정도다...
얼마나 맛있는 피자길래....하는 호기심에 한 번 시켜본다.
120밧이다.
오오오오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의 조화가 일품이다.
배달맨이 왜 그렇게 똥줄타게 바쁘게 배달을 다녔는지 이해가 가는 맛이다.
비는 추적추적 끊임없이 내리고 여기저기서 내뿜는 담배연기로 인해 안개가 자욱한 듯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망구과 삼천포는 타이거 비어를 연속 들이킨다.
얼마나 마셔보고 싶었던 낮술인가..! ㅋ
더운 날씨에 맥주 두 병에 알딸딸 취해간다...
망구 : 카오산 오니까 너무 좋다...동네 산책하는 것 같네..
삼천포 : 그치그치...아..너무 편안하다....떠나기가 싫어지네..
망구 : (눈 반짝반짝) 우리 라오스 가지 말까??? 걍 여기 죽치다가 태국 일주나 하자..
삼천포 : 그럴까? 사실 일정도 짧은데 라오스는 이동시간이 넘 길어..우리같은 노땅들은
걍 몸 편하고 맘 편하게 널널한 여행이 딱인데..
대낮에 마신 술 두병 때문이었을까...
아님, 카오산에 대한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점점 널부러지면서 암암리에 라오스행을 접고 태국에 눌러 앉는다는
밀약이 거의 성사단계 직전까지 가고 있었다.
여행이란 게 뭐 별건가...
내 맘 내키는 대로..내 몸이 가자고 하는대로 발길 따라 가면 그만인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내가 끌리는 대로...내가 원하는 그것대로...
바람 따라 구름따라..정처 없이 흘러가는...나는 자유인이다.~~~!!!
망구 : 천포야~ 우리 홍익여행사에 버스비 미리 입금했잖아..37,700 원..라오스 안 가면
그 돈은 못 돌려받는거야?
삼천포 : (화들짝) 헉! 그 돈이면 술이 몇병이고? 안 돼..그 돈을 포기할 순 없어..라오스 가잣!!!
바람따라 구름따라 흘러가는 자유인을 부르짖으며 한껏 분위기에 취해 있던 삼천포는
망구의 말을 듣는 순간 단호히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선다.!!!!!!!
37,700 원을 날릴 순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발걸음도 당당하고 씩씩하게 홍익 여행사를 찾아나선다.
자유인을 부르짖던 소심한 한 여행자가 라오스 행 밤버스에서 조용히 잠들어 간다......
* 에바 항공은 제가 이용해 본 항공 중 가장 좋았습니다.
대한 항공이나 아시아나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더군요..
깨끗하고 친철하고 좌석이 널찍해서 다리 뻗기도 편하구요.
제가 좀 장신이라 타이 스카이 같은 경우는 온몸을 구겨서 억지로 집어 넣었었
거든요...
비행 스케쥴만 잘 조정할 수 있다면 다음에도 또 에바 항공을 이용하고 싶습니
다.
오늘은 반짝~! 하고 해가 떴네요...
지난밤에 사춘기 소녀마냥 우울해서 조금 구질구질한 기분으로 잠들었더니
오늘 아침 제방엔 때 아닌 만월이 환하게 떴습니다.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