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4. 버스를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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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4. 버스를 놓치다...

피비 5 3309
2006년 6월 9일.

호텔리어와 나는 방콕에서 2박 3일을 함께 보내고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바다를 원했던 그녀는 푸켓으로 갔다가 제가 있는 치앙마이로 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  일본 비자 문제로 급히 귀국을 했다는 태사랑 쪽지를 받았습니다.
DDM 이모님에게 곧 다시 올 거라는 말도 함께 남겼다는군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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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놓치다. 바로 눈앞에서.



여행자들이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카오산 여행자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비수기 때 50밧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비교적 저렴하고 편안한 여행자 버스.
하지만 나의 선택은 방콕 북부터미널의 VIP 999버스 24석 805밧짜리였다.
만약 기차선로가 망가지지 않았다면 분명 에어컨 1등 침대칸을 이용했을 것이다.



6월 9일 19시.
국왕 60주년 행사니 해서 카오산 주변의 교통은 아주 극심한 정체 상태였다.
에어컨 버스 3번을 타고 북부터미널까지 2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그리고 바로 매표소에서 VIP 999 버스 24석 805밧짜리를 구입했다.
가까운 시간은 모두 매진되어 22시 30분표로 예약하였다.
물론 에어컨 1등 32석 버스엔 남는 좌석이 있었지만
난 기꺼이 까오까오까오(999) 24석을 위해 1시간 30분을 기다릴 여유가 있었다. 



배낭을 맨 채 북부터미널 야시장을 둘러본다.
장시간 버스 여행에 분명 배가 고플 테니 노점 식당을 찾아보는데
죄다 대형버스가 지나가는 길옆에 있다.
딴에는 제일 깊숙한 곳에 버스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자리를 잡았는데
막상 주문한 쌀국수를 한입 넣으니
내 바로 30cm 눈앞으로 허름한 버스 한대가 지나간다.
시커먼 매연이 심지어 또렷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쥐똥고추가 담긴 시큼한 양념을 팍팍 뿌려 먹는 쌀국수는 너무 맛있어서
두 번째 버스가 올 때쯤엔 거의 그릇이 비어 있었다.
너덜너덜 더러운 걸레를 손에 꼭 쥐고 누런 앞니를 보이며
내 바로 옆에 앉아 버스를 함께 쳐다보던 나이 많은 그녀에게
무려 십밧이라는 팁을 준 것은
역시 내 손에 쥐어진 치앙마이행 VIP999 24석 805밧 버스표의 힘이었다.



그후 30분은 북부터미널내 바닥에 주저앉아
더치밀 프레인 요거트를 떠먹으며 가계부를 썼고
그후 남는 30분은 3밧을 주고 입장한 터미널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이도 닦고 옷도 편안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22시 15분. 나의 999버스를 타러 승차장으로 나갔다.
16번 승차장엔 치앙마이행 버스가 아닌 다른 버스가 서 있다.
저 버스가 빠져나가야 나의 버스가 들어올 텐데...



22시 25분.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버스표를 보여주며 여기가 맞는지 재차 확인해본다.
모두들 맞으니까 좀더 기다려보라고 한다.
15번 승차장엔 22시 출발 버스가 22시 30분이 되도록 출발을 않고 있다.
마음을 놓고 얼른 16번 승차장을 차지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버스가 떠나기만을 기다린다.



22시 50분. 드디어 버스가 떠났다.
곧 나의 버스가 오겠지.
1분... 2분... 3분... 4분... 5분...



오지 않는다...



큰 눈, 작고 다부진 몸매, 똑 부러지는 인상의 태국 여대생이
날 어떻게 도와줬는지는 그냥 생략하겠다.



난 너무 화가 났다.
내가 먼저 문의했던 다섯 명의 타이인 중 누구도
바로 눈앞에 있던 저 버스를 타라고 얘기해 주지 않았다.
모두들 기다리라고... 심지어 안내원조차도... 



무성의한 볼펜질로 22:30이라는 내 버스표 시간은 23:00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한 남자를 따라 막 출발한 치앙마이행 버스 엉덩이를 쫓아갔다.
순식간에 나는 자리를 배정받고 앉았다.
다행히 무릎 앞은 넉넉했지만 왠지 차체가 허름하다.
재빨리 좌석수를 세어본다.
4열 8행. 32좌석. 좌절이다...



비어창 로고가 프린트된 회색 나시를 입었지만 춥지 않았다.
주위의 현지인들은 모두 담요를 꺼내 목까지 덮어쓰는데
난 전혀 춥지 않았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이 꺼지고 간간히 들려오던 말소리도 끊겼다.
나의 mp3p에 담긴 음악만이 버스 안을 가득 메운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어둠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래도 계속 어둠이다.
어느 순간 창밖 어둠 속을 반짝하며 수없이 가르는 빗물들. 그리고 눈물...



“모든 걸 다 주니까 떠나가는 그 남자. 내 맘 하나 몰라주는 그 남자.
한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던 그 남자. 다 믿었었어. 바보같이.
그땐 사랑이 이별인 줄 모르고. 다 믿었었어. 우리 둘이...”



죽도록 사랑했었단 말은
지금 이렇게 숨쉬고 있기에 증명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렸다.
7년을 못 채우고 끝나버린 내 첫사랑을
치앙마이행 32석 버스에서 다시 만났다.
아주 오래간만에.



이별을 극복하는 1/2 공식대로라면 6년을 함께 했으니 3년이 필요하다.
벌써 이년이 지났다.
아니, 아직도 일년이나 남았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특별하다.
그게 끝났을 때, 한달은 여의도의 높은 빌딩을 찾아 다녔고,
또 한달은 죽도록 술을 마셨고,
또 한달은 밤마다 슬픈 영화를 보았다.



그렇게 일년이 지나자
실연 때문에 태국 악어농장에 뛰어든 여자의 얘기를 웃으며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를 만나 또 일년을 보냈다.



그와 함께였을 땐 늘 즐거워서 내 몸이 이렇게 슬퍼하는 줄 미처 몰랐다.
아직도 일년이나 남았다...



가슴이 터질 듯 울었다. 소리 없이...


 
갑자기 불이 켜져서 재빨리 얼굴을 정돈했다.
첫 번째 휴게실에 도착한 모양이다.
시간은 벌써 2시간이 흘렀다.



세수라도 할양 화장실을 찾아 나서는데
갑자기 타이 남자가 날 향해 “YOU!" 그런다.
짐을 챙겨서 따라오란다. 그가 데려간 곳은 까오까오까오!
3열 8행의 24인석.
내가 탔어야 했는데 타지 못했던,
바로 눈앞에서 놓쳐 버린,
탑승하지 않은 익명의 한명을 위해 20분씩이나 기다려준 바로 그 버스였다.



때론 말이다...



한번 떠난 버스가 날 기다려주기도 한다. 바로 이 휴게실에서.



뒤늦게 받은 우승트로피처럼 감흥이 없었던 24인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가를 발휘했다.
두 다리를 올려 무릎을 감싸 안고 잘 수도 있다. 평온하고 편안하다.
조금 전, 32석 버스 안에서 끝난 사랑을 떠올리며 펑펑 운 게 스스로 민망하기 짝이 없다.
세운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는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그’의 얼굴. 사랑이 이별이란 걸 이젠 알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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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말이다... 한번 떠난 버스가 날 기다려 주기도 한다.
어쩌면... 한번 떠난 첫사랑이 다시 돌아올는지도 모른다...

5 Comments
shinee 2006.07.22 03:12  
  글 정말 잘쓰시네요.. 저도 모르게 님의 글 빠져서 읽다보니 벌써 새벽 3시네요.. 님 화이팅!
피비 2006.07.22 18:58  
  어제 저와 함께 밤을 새셨군염.^^
오늘밤도 샐렵니다!
빨리 여행기를 끝내야 태국페이지에서 한국페이지로 넘어갈 듯.ㅋ
액자 2006.07.24 13:39  
  정말 어메이징 타일랜드라더니...
떠난 버스가 기다려주는 일도 있네요.^^;;
해모수 2006.07.28 18:23  
  아~~저 또한 5년이라는 시간을 같이한 친구와 헤어진지 이제6개월이 지났으니 님의 이별공식 이라면 저는
 2년? ! ? !
암튼 여행기 참~~잼 있습니다^^
풋타이깽 2006.08.15 14:57  
  소설책 겉장 안쪽면에 작가의 얼굴이 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이렇게 절실한 느낌을 갖는 님이 몇살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느라 감정이입이 안되요.  흑흑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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