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1 - 포트 딕슨, ‘윤과 에멀리 그리고 바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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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1 - 포트 딕슨, ‘윤과 에멀리 그리고 바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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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 포트 딕슨,  ‘윤과 에멀리 그리고 바실리나’  (2006년 7월 5-6일 이야기, 14-15일 씀)

 (1) 작은 항구 마을로 가는 여행

 싱가포르의 기차역에서 말레이시아 지도를 펼쳐든다.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 건가, 고민한다.
나의 눈은 잠시 ‘타만 네가라’ 라고 씌여진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열대우림 속을 헤집는다.
그러나 금세 정글 밖으로 빠져나온다. 지금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닌 것이다.
나의 눈은 말레이시아의 서쪽 해안쪽으로 옮겨간다. 그동안 수많은 해안을 떠돌았음에도 자꾸만 바다로 마음이 끌린다.
작은 항구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포토 딕슨.
바로 여기다, 하는 마음이 든다.
지도를 접고 주저 없이 열차표를 구매한다.

 기차 안에서 그동안 접해 보지 못한 색다른 풍경을 본다.
기차 소리에 놀란 야생 물소가 강가로 뛰어 들고 키 큰 열대 수목 속에서 파랑새들이 날아다닌다.
유럽과 호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다움을 느낀다.
낯설은 것은 호주와 동남아가 마찬가지인데, 동남아시아에 더욱 정이 가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세렘반에서 버스로 갈아탄다. 버스비가 비쌀까봐 걱정했는데, 40분을 달리는 우등 고속버스가 불과 3링겟이다(약 800원).
기분이 좋아진다. 포토 딕슨에 도착한다.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항구마을이다.
숙소를 잡는데 약간의 곤란을 겪는다.
이름난 여행지가 아니기에 도미토리가 있는 여행자 숙소가 없다.
싸구려 호텔을 찾아가니 지저분한 한 평짜리 쪽방을 보여주며 25링겟이란다. 혼자 여행하면서 겪는 가장 커다란 어려움이 이름난 여행지가 아닌 곳에서 숙소를 잡는 일이다.
두 명이라면 차라리 중급 호텔로 가서 50링겟짜리 더불룸에 묵겠지만(중급 이상의 호텔은 어디에나 있다) 혼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짜리 쪽방을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빌린다.
30링겟이 아닌 게 다행이야, 정신 건강을 위해 그렇게 내 스스로를 위로한다.

 배낭을 던져 놓고 숙소 밖으로 나온다.
숙소 일은 금세 잊어버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낯선 곳에서 내딛는 첫발은 늘 그렇게 날 흥분시킨다.

 
 (2) 윤과 에멀리
 
 인포메이션 센터가 없는 곳이다.
마을에 대한 정보를 중국인 숙소 주인에게 물으려 했으나,
주인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몰라 몰라, 나 영어 못해, 그런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윤과 에멀리의 카페다.
제법 고상한 분위기가 나는 카페를 중국인 남자 윤과 미국인 여자 에멀리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이는 둘 다 오십대 중반으로 보인다.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한국인이라 했더니 윤은 아리랑과 에밀레종에 대해,
그리고 에멀리는 김기덕 감독의 여러 작품들에 대해 한참을 늘어놓는다.
윤은 불교에 대한 에세이를 저술하고 있다고,
그리고 에멀리는 뉴욕의 신문사에 소설을 기고하고 있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누는 중 윤과 에멀리가 말레이시아에서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멜라카를 꼽는다.
자가용으로 1시간 30분쯤 걸리는 곳이지만 대중교통으로는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윤이 문득 제안한다. 지금 바로 자신의 차로 멜라카에 함께 다녀오자고, 자신들이 멜라카를 안뽀?주겠다고.
왜 그런 선의를 베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내가 말한다. 그러자 윤이 말한다.
여행객들과 함께 여행하는 게 자신의 즐거움일 뿐이라고.

 멜라카로 가는 중간 중간 에멀리가 열심히 가이드를 해준다.
저건 말레시아 전통 건축양식, 저건 이 근방에서 가장 좋은 호텔, 저 너머는 비치가 예쁘고.......
내가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열심이다.
중간에 우리는 차를 세우고 노점 과일가게에서 두리안을 먹어본다.
말레이인이 가장 사랑하는 과일이 바로 두리안이라고, 에멀리가 설명해 준다.
맛은.......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 파인애플과 닭고기와 빵 조각을 적당히 섞어 놓은 듯한 이상한 맛에 고약한 냄새가 난다.
계산은 윤이 한다. (저녁 식사도, 기름도 모두 윤이 담당한다. 내가 내 몫을 내겠다고 하자 그는 ‘돈 워리, 돈 워리’를 반복한다.
그는 늘 50 링겟 짜리 지폐로 계산하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다. 그는 상당한 부자인 모양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어느덧 윤과 나는 선문답을 나눈다.

 “신. 당신이 여행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나요?”

 “존재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간지러운 대답이지만 난 사뭇 진지하다. 그리고 윤도 진지하다.

 “존재의 본질이 뭔가요?”

 “나는 의자에 앉아 있고 의자의 감촉을 느끼고 의자 덕에 편안함을 느끼지만
 의자라는 존재 의 진정한 정체는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요?”

 “고통입니다.”

 “그러면 삶에 의미가 있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다. 

 “삶에는 의미가 없어요. 당신이 선생이었다니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고 나는 학생이에요. 갑자기 내가 일어나서 당신에게 이야기해요.
‘선생님, 난 선생님이 하는 말을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요. 다 거짓말로 들려요.’
당신을 믿지 못하는 나에게 당신 수업이 의미가 있을 수 있나요?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삶과 죽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어집니다.
당신은 왜 고통의 세상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나요?”

 “나는 목적 없이 달려가는 기차에 잠시 올라타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기차에서 내리겠죠. 나에게는 많은 돈이 있어요.
나는 그 돈으로 여행도 하고 사업도 하며 편안히 살아가죠.
당신과 내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여행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나의 여행과 나의 삶 속에서, 나는 늘 거창한 그 무엇을 꿈꾸지만,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또다시 공포처럼 나에게 밀려온다.

  (3) 바실리나

 바실리나는 윤과 에멀리의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이다.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앳되고 귀여운 아가씨다.
에멀리가 잔소리를 꽤 하는지 카페의 종업원들은 하나같이 예의바르고 품위 있게 행동하는데,
그런 격식이 바실리나의 천진스러움을 감추지 못해 바실리나의 주변 공기에서는 늘 풋풋한 향기가 난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자 바실리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가수들 이름을 이야기 한다.
한국 드라마도 좋아해서 인터넷으로 종종 드라마를 보기도 한단다.
그러나 전편을 다 볼 수가 없고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작품의 조각조각 작은 부분이라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는 바실리나가 말하는 가수 중 한 사람도 알지 못하고 드라마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내 무지에 바실리나는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표정은 금세 바뀌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나라에서 날아온 왕자라도 되는 듯,
나를 애정과 존경의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 눈빛과 웃음이 내 마음을 녹여 내 눈에는 바실리나가 마치 말레이 왕국의 공주처럼 보인다.

 윤과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포토 딕슨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한다.
멜라카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음날은 뮤지엄에 함께 가자고 윤과 에멀리가 제안한다.
나는 윤의 에세이와 에멀리의 소설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윤과 에멀리가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카페에 찾아 갔을 때, 뮤지엄에는 택시를 타고 혼자 가야겠다고, 에멀리가 내게 말한다. 소설을 보여 달라고 말했지만 보여주지 않는다.
아, 여기가 경계선이구나, 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선 안되겠구나,
여행자로서 나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구나,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카페에 다시는 가지 못하고 포토 딕슨을 떠난다.
바실리나의 얼굴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이웃 도시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서 난 혼자 중얼거린다.
“삶에는 의미가 없는 게 아냐. 바실리나가 내 의미인 걸.” 그리고 웃는다.
언젠가 더 큰 의미,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내 자신을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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