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11. 빠이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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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11. 빠이의 낮과 '밤'

피비 20 3863

어제는 흐림. 오늘은 맑음. 내일은 비 예상.
날씨의 변덕은 자연스러운데,
왜 사람 맘이 들쑥날쑥한 것은 그리도 간사하게 여겨지는 걸까요.



빠이에서의 내 일기장이 꼭 그 짝입니다.


 
남친에게 전화를 해대며 투정을 부리는 것은 바로 이 날로 끝납니다.
그 이후,
남친의 전화는 못 받기 일쑤이고 때로는 귀찮아서 슬그머니 꺼놓기도 합니다.



그리움이란 건,
심심할 때 내 맘대로 꺼내 씹는 껌 같은 건가,
그런 건가...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나는 슬그머니... 전화기 탓을 해봅니다.



생각나는 것과 보고 싶음은 다릅니다.
보고 싶음은 통증을 수반한 감각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전화기 덕분에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게 됩니다.
단축 버튼 하나로 바로 연결됩니다. 
문명의 이기란... 이렇게 그리움의 감각마저도 마비시키고 맙니다.



2006년 6월 17일



어제는...
타페 중고책방에서 산 하이틴 로맨스를 읽느라 밤을 샜습니다.
아침 일찍 첵아웃하고 강변 쪽의 숙소로 옮기려는 내 계획은 불발로 끝납니다.
눈을 뜨니 이미 첵아웃 시간입니다.



천천히 씻고 나와 빠이 동네를 어슬렁거려 봅니다.
한 시간이면 몇 바퀴 돌고도 몇 분이 남을 아담한 동네, 빠이.



강변 쪽으로 나가봅니다.
여행지에서 딱히 할 일이 없을 땐,
다음 숙소 물색하는 게 가장 좋은 소일거리입니다. 



터미널을 지나 강변으로 가는 그 거리에서,
한 남자분을 만납니다.



“니혼노 까따데쓰까?” (일본 분이십니까?)



이렇게 말을 하면 열이면 열 일본인들이 다 속습니다.
그는 속지 않습니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박또박, 발음에 신경 써서 얘기하는 그의 말투는 무척 독특했습니다.



“3개월 이상 여행하셨죠?”



억양도, 국적도, 나이도, 정체불명인 그는...
한눈에 장기여행자임이 분명했습니다.



3개월이 아닌 3년째 여행 중이라는,
나올 땐 백인이었는데 이제 점점 황인종이 되어간다는,
그래도 여전히 뽀얀, 가늘고 긴 머리칼의 ‘그’와
점심을 함께 먹으며,
이리저리 겉도는 얘기들을 잔뜩 했습니다.--;



점심을 먹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로에게 바이를 하고,
나는 나의 길을, 그는 그의 길을, 갔습니다.



나는 강변 쪽의 숙소를 쭉 둘러보았습니다.



하루 1500밧의 리버코너빠이,
히피 분위기가 물씬 나는 골든헛방갈로,
베란다에 삼각쿠션이 있는 아기자기한 방갈로 반빠이빌리지까지...



결론적으로, 나는 강변 숙소 찾기에 실패합니다.
현재 빠이 강가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사 때문에 모래는 다 파헤쳐 놓았고 불도저 한 대가 중간에 떡 하니 서 있습니다.



그렇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딱 저녁을 먹을 타이밍에 또 한명의 한국분을 만납니다.



낫키친이라는 레스토랑을 지나는데,
오후에 얼핏 본 남자분이 식사 중입니다.



맞은편에 앉아서 같이 저녁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데,
이분 이력이 잼 납니다.



빠이에 1년을 체류하면서 빠이 다큐를 찍은,
왕년에 영화 몇 개 엎고 다큐로 방향 전환을 했다는,
이번엔 휴식을 취하러 빠이에 왔다는,
네이티브 스피커. 



이때부터 나는 그를 영화인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빠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특히, 밤문화에 대해.



열시면 조용해지는 빠이,
그 이유는 모두가 잠들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외곽에 위치한 ‘바’들로 순회를 가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렇게...
나는 그와 함께 ‘비밥’에 가게 됩니다.



23시.
비밥의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블루스 느낌의 질질 늘어지는 듯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귀를 쩡쩡 울리는 음향 시스템으로 옆 사람과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치앙마이 짠순이 언니에게 살며시 전화를 걸어 ‘비밥’을 들려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정각 12시에 비밥이 환상적인 나이트 무대로 변신합니다.
무엇보다 휴그랜트 닮은 가수가 압권입니다.



하이네켄 첫 모금에...
아, 바로 이것이야...란 강한 느낌!
목구멍을 싸, 하고 훑고 지나가는 알코올의 감각.



생음악과 차가운 맥주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고 맙니다.



현지인들과 외국인들이 어울려 맘껏 춤추고 나니, 어느새 1시.
영화인과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가,
다시 아쉬워 비밥 옆 sayhi로 2차를 갑니다.



거기서 싱을 마시며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_-;



빠이는...
정말 밤이 아름답습니다...


20 Comments
피비 2006.08.04 08:51  
  일기장에 몇 자 없는 관계로...
지금 즉석에서 기억을 되살리다 보니...
그냥 경어체로 쭉 써버렸네요.

들쑥날쑥...

제 캐릭터가 원래 그렇습니다.--;
액자 2006.08.04 09:23  
  ㅋㅋㅋ사람 사는게 다 그렇지 않던가요...
제 글씨체 처럼 들쑥날쑥...
그래서 사는게 즐겁다고 하나봅니다.[[웃음]]
필리핀 2006.08.04 09:49  
  3년 전...
빠이는 조그만 산골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더 좋아진 건지...
더 나빠진 건지...
너무 빠르게 변하는 빠이의 모습이...
두렵네요...
JLo 2006.08.04 10:11  
  딱 1년전에 빠이 갔을때...
오토바이타고 속속들이 다 뒤져다녀도 그런 빠는 없었는데... 빠이는 정말 빠르게 변하는 것 같네요.

많은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_-;  <== 압권 ㅋㅋ
요술왕자 2006.08.04 10:34  
  빠이는 지금이 딱 좋은데...
아마 많이 변하게 될 듯...
엄청 몰리고 있음... 중국인들까지...
요술왕자 2006.08.04 10:36  
  2005년 8월 대홍수가 빠이를 휩쓸고 간뒤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것들이 많이 들어섰고 또 지금도 계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요술왕자 2006.08.04 10:37  
  그리고 비밥은 꽤 오래된 펍이에요... 원래는 시내에 쬐끄맣게 있었는데 2003년인가 외곽으로 확장이전했지요...
아일랜드 정 2006.08.06 16:53  
  낫키친이 아니라  '나' 키친임다 여주인 이름이 나 인데
음식이 넘 예쁘고 맛있고 그녀의 미소 또한 한몫함다.
아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그곳
알리바바 2006.08.06 22:10  
  헉.... 빠이에 꽂히다.. 이런 중증 여행증후군이 또 다시
JLo 2006.08.06 23:14  
  알리바바님 빠이 정말 좋아요T-T
요왕님이 빠이 지금이 딱 좋다는 말 하시니 당장 달려가고 싶네요 으흑흑
피비 2006.08.08 10:38  
  오!!!!! 요술왕자님~ JLo님이 쪽지로 "니 성은 입었네"라고 한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네요. 요왕님의 리플~ㅋ

아일랜드님~ 언제 또 돌아가시는지?ㅋ 빠이 주민들이 기다린다고 하더라구요!

알리바바님~ 빠이... 좋져... 휙 보고 오기에 말구요... 한 며칠 오래 머물면서... 빠이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와야 된답니다. 담에 갈 땐... 한달을 빠이에 올인하고 싶어요.
아리잠 2006.08.08 17:36  
  그렇타니 더더욱 빨리가야겠군요 =_=
kirk69 2006.08.11 13:55  
  피비씨 남친하고 같이 나와요...
EJ도 8월말이나 9월초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럼 혼자서 한달을 보내야해요;; 심심해서 ㅋㅋ
여기 온천 원래 돈을 받았나요? 외국인은 200밧
현지인은 20밧 내야 한다네요...(주차료 별도;;)
좋은 정보좀 알려주세요...잘 지내시구요...
피비 2006.08.11 21:01  
  영~ 오빠! 그 남친 곧 여름 휴가라 내가 맨날 꼬시는데 절대 안된다고 하네요. 태국 얘기 하려면 앞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하대요.--; 암튼... 빠이... 한국인들 제법 있는데.ㅋ 문제는 다들 숨어 있어서 찾아내야 되요. 외곽으로 굉장히 럭셔리한 리조트도 있다던데... 오빠 가봤는지요?

아... 그리고 온천은 원래 돈 안 받았는데 6월 1일부터 돈 받았대요. 그래서 빠이에서 데모도 하고 그랬는데 암튼 외국인은 200밧인데... 거기 매표소 타이인을 잘 구슬려서 빠이 살고 있으니 20밧에 해달라고 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20밧에 들어가는 한국인들 있었어요.^^

피비 2006.08.11 21:16  
  레스토랑은요! 야시장 가는 길에 있는 구청 맞은편에 까이양과 쏨땀 파는 곳 있데 거기 진짜 맛있구요! 오후 5시까지만 해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시장 가는 길에 까이양 파는 집 가기 전에 베지테리안 레스토랑이 나란히 있거든요. 그 중에 노란색 간판, 대만 사람이 하는 건데... 거기 음식 맛있어요. 베지테리안 푸드가 글케 맛있는 줄 몰랐어요.^^ 거기 25밧 이면 덮밥 먹구요. 거기 울면 팔거든요. 그것도 맛나요...
피비 2006.08.11 21:19  
  여행 잘 하시구요...
거기 있는 오빠가 너무 부러워요.ㅠㅠ
셋쇼마루 2006.08.13 12:10  
  여행기 계속 좀 올려주세요~[[하이]]
못된바보 2006.08.14 04:05  
  쩨리상, 김상, EJ상,, 모두 지인이라 어쩐지, 피비님까지 알고있는 느낌이예요.. 재밌습니다.. / 김상, 전 9월엔 이산지방으로 갈꺼 같아요..그 전이나 후에 뵐 기회를 찾아볼께요. 빠이 가고싶네요~~!!
피비 2006.08.14 17:02  
  마루님~ 거짓말 안보태고 님 리플 보고 '바로' 여행기 쓰기 시작해서 어제 밤에 올렸어요.^^;

바보님~ 글게요. 저도  왠지 친숙.ㅋ 1% 오빠를 만나다니... 부럽.ㅠㅠ
kirk69 2006.08.15 14:05  
  못된바보님이 누구신가 했더니 윤상이었군요 ^^
이산이라...지금 숙소를 9월말까지 계약을 해놓은
상태라 그때까지는 못움직일것 같은데...쪼금 아쉽네;;
그래요 서로 기회를 봐서 볼 수있음 보고 안된다면
다음을 기약하죠...

피비씨 여러가지 정보 고마워요...쪽지도...
근데 다 알고 있는 곳이네요 하하
요즘은 무료 온천을 찾아내서 가끔 그 곳으로 간답니다.
목욕은 못하지만(뜨거워서) 계란은 삶아 먹을수
있거든요 ^^;
그리고 1%얘기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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