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의 뿔처럼] 캄보디아 - 똔레샵과 가비지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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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캄보디아 - 똔레샵과 가비지덤프

danaia 6 833
캄보디아 - 시엥립과 프놈펜,
‘똔레 샵(샵 호수) 와 가비지 덤프(쓰레기 마을) - 낭만과 현실’

(1) 똔레 샵의 사람들

앙코르 왓으로 유명한 시엥립에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바로 똔레샵이다. 똔레샵은 참 신비로운 호수이다.
건기에는 1m 깊이에 크지 않은 평범한 호수이지만 우기에는 10m 이상의 깊이에
동남아시아에서 제일 넓은 호수가 되어버린다.
호수 한 가운데서 보면 좌우로 끝없는 수평선이 펼쳐져 도저히 호수라고 생각 되질 않는다.
물고기도 참 많이 살아서 캄보디아인이 먹는 물고기의 상당량이 똔레샵에서 잡힌 물고기라고 한다.
똔레샵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산다. 호수의 주변에 집을 짓고 사는 게 아니라, 호수 위에서 산다.
호수에 보트 한 척을 띄우고 그 위에서 산다. 보트는 그들의 집이자 고기를 낚는 일터가 된다.
그리고 호수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자 일용할 식량을 주고 배설물을 받아주는 어머니가 된다.
이들이 자원해서 호수에서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낭만을 따라 살아가는 보헤미안이 아니고 어부의 삶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캄보디아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베트남 사람들이다.
1970년대 말 월남의 패망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보트에 몸을 실었다.
미국과 친밀하게 지냈던 사람들 혹은 자본가 혹은 월남군경과 그 가족들이었다.
제국주의 그늘에서 비교적 안락하게 살던 사람들이 졸지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끝도 없는 망망대해를 향해 정처 없는 항해를 시작했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매콩강의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국경을 넘었다.
내륙 쪽으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은 다시 두 갈래의 길을 선택했다.
북쪽으로 더 배를 몰아 라오스 국경을 넘거나 샵 호수로 들어가 캄보디아에 정착하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대양만큼 넉넉한 호수를 향해 뱃머리를 잡았다.
그러나 캄보디아 정부는 보트피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더욱이 79년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은 베트남군에 의해 축출되고 캄보디아에는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정부의 허가가 나질 않아 그들은 육지에 상륙할 수도 없었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저 좋은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배위에서 하루하루를 참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린 하루하루가 40년의 세월이 되었다.
간난 아이를 품에 안고 고국을 떠났던 새댁은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었고,
간난 아이는 장성해서 성인이 되어 건너 배 아가씨와 배 위에서 혼인식을 올렸고,
지금은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호수 위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최근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한국과 일본 사회에 조명되고 있다.
경쟁이라도 하듯 한국과 일본은 앞 다투어 이들을 위해 편의 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워주고 심지어 운동장까지 만들어 주었다.
호수 위의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나 호수 위에다 세웠다.
일종의 배를 만들어 띄우고 그 위에다 건축물을 올려놓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캄보디아 정부의 이들에 대한 제제가 최근 많이 완화 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가난한 나라에 살면서도 가장 가난한 계층에 속한다.
아이들은 함지박에 몸을 싣고 호수 위를 떠돌며 관광객들에게 구걸을 하고
다 큰 여자아이들은 시내의 술집에서 푼돈을 벌어 온다.

호수의 한 가운데 배를 세우고 저녁석양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데
수 백 미터 먼 곳에서 너 댓 명의 아이들이 함지박을 타고 우리를 향해 다가온다.
함지박이 새는지 한 손으로는 물을 퍼내고 한 손은 노를 삼아 물살을 헤친다.
호수와 함께 자라온 아이들이니 혹 함지박이 가라앉아도 빠져죽을 아이들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의 노 젓는 실력도 보통이 아니라서 무척 멀리 있던 아이들이 금세 가까이에 왔다.
얼굴을 마주하자 아이들이 대뜸 외친다.
- 오 달러!
간이 큰 놈들이다. 이 나라에선 일 달러도 상당히 큰 돈이건만 오 달러를 달란다.
이런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선 안 된다. 구걸에 맛을 들린 아이들은 영원한 거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혹 여행 중 구걸하는 사람에게 돈을 주더라도 큰 돈을 주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가 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함께 온 한국인 누나들이 다행히 초콜릿을 가지고 있었다.
맘 좋은 누나들이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누어 준다.
아이들은 고맙다고 말하고 저 멀리 떠있는 또 다른 관광보트를 향해 노를 저어간다.
아이들은 금세 멀어진다. 아이들의 검게 탄 등짝이 참 탄탄해 보였다.


(2) 가비지 덤프의 사람들

프놈펜의 킬링필드 인근에 그 죽음의 현장만큼 인상적인 동네가 있다.
바로 ‘가비지 덤프’ 라고 불리는 곳이다.
영어단어 덤프(dump)는 쓰레기 처리장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쓰레기더미 같이 초라한 집을 의미한다.
쓰레기처리장에서 살면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사는 사람들의 마을에는 이래나 저래나 적합한 지명이 된다.
어떤 사람들이 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다. 생긴 건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데,
어떤 여자는 상당히 미인이고, 어떤 아이는 너무나 귀엽게 생겼는데,
다만 너무나 가난하다. 그래서 쓰레기장 옆에서 살면서 매일 아침 찾아오는 쓰레기차를 기다린다.
쓰레기차가 도시의 새로운 쓰레기를 쓰레기장에 쏟아놓고 가면 사람들은 앞 다투어 달려가서 쓰레기를 뒤진다.
고철과 유리병과 캔과 뚜껑과 비닐, 이러한 것들이 이들이 찾는 노동의 대상이다.
아래의 사진을 보라. 많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뒤지는 사진을.
여러 색깔의 쓰레기가 다소 지저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평범한 노동의 현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저렇게 고생스럽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 사진이다.
시각만이 응용되는 사진이라는 제한된 매체는 그 때문에 사실의 일부만을 왜곡되게 담아 놓는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사진이 매우 싫어진다. 아래의 사진은 모두 가짜뿐이다.
저 마을의 진정한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을 느낄 촉감과,
인근 수 백 미터까지 진동하는 악취를 느낄 후각과,
수만 마리의 파리 때 앞에서 느낄 혐오감과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오물들이 피부에 닿을 때 느끼는 공포감 (쓰레기 중에는 동물들의 사체와 내장도 흔히 보인다.
발밑의 땅 속에서 내 살에 닿는 오물이 뭔지는 모를 일이다)이 필요하다.
아니다. 내 말이 틀렸다. 저 마을의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다만 긴 시간이 필요하다.
구역질나는 쓰레기 냄새가 더 이상 역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물이 오물로 보이지 않고,
쓰레기 봉투 속에서 버려진 태아의 시체나 사람의 손가락이 나와도 놀라지 않게 될 만큼의 시간이,
시간이 주는 그 익숙함이 필요하다.
그 때가 되면 가비지 덤프는 평범한 노동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커다란 고철 덩이를 줍고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그 고철 덩이 때문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은,
소소한 삶의 현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인내할 자신이 없다.
비겁한 나는 그래서 도망간다.

발을 씻을 물을 얻기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의 첫 집에서 한 남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의 마음이 열려 있으면 뜻은 언제나 통한다.
남자는 내 발을 보더니 집 옆의 물동이의 뚜껑을 연다(대부분의 집은 수도가 없어 빗물을 받아 사용 한다).
깨끗한 물을 몇 통이나 떠서 내 발 위에 붙는다.
그리고 내 발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솔로 정성껏 내 발을 닦아낸다.
그러지 말라고, 당신은 내 하인이 아니라고, 나는 남자를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앉아 내 발을 닦는다.
남자는 내 발을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에 자신의 한 평 쪽방을 보여주고,
더러운 이불 밑에서 자신의 가족사진을 꺼내 조심스레 보여준다.
남자의 품에 안긴 어린 아이와 그 앞의 두 아이는, 지금 함께 살지 않는다.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어, 아이들을 국제협력단체가 운영하는 센터에 맡겨 놓았다.
남자에게 1불짜리 지폐를 한 장 주고 마을을 나왔다.
그렇게 마을에서 도망을 쳤다.

돈을 줄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3) 보헤미안에 불과한 나를 반성하다

똔레샵 호수를 둘러볼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 멋지군. 비록 가난하지만 호수 위에서 호수와 함께 살아가나니.
나도 이들과 함께 살아보고 싶은 걸.
그러나 가비지덤프에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이들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 자신을 보았다.
가난은 언제나 악취가 난다.
그 악취에 참여하고 싶다면 낭만과 추상을 벗겨내고 현실의 맨살을 만져야 한다.
그러면 가난은 그 무엇보다 순수한 얼굴이 되어 친근한 웃음을 지어줄 것이다.

나는 가난하지만 오만하지 않은 자가 되고 싶다. 가난을 상처로 받아들이는 자는 곧 오만한 자가 된다.
가난은 상처가 아니라 순수가 되어야 한다. 가지지 않았다는 것, 욕망을 품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곳 평화와 안식이 되어야 한다.

나의 길이 아직 멀었음을 느낀다. 내 여행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해야겠다.

(출처) blog.naver.com/danaia
6 Comments
방배동 2006.09.04 23:56  
  우리의 할아버지도 이들 보다 결코 낫은 환경아니었고...이렇게나 살게 되었는데...36년 살아남은 넘들중..친일 아닌 넘 어디 있더냐? 남의 일이라니 나 안 당할려구 입다물구 있지..
삼천포 2006.09.05 15:49  
  아앗~!! 어제 이 여행기가 뜨자마자 읽었는데..ㅋ 댓글 달려다가 로긴이 안되어 있어서 귀차니즘에 뒤로 미뤘더니 님이 제 글에 먼저 댓글을 다셨더군요..ㅋ
지난 번 쓰신 여행기도 읽었습니다. 그중 이 번 글이 젤루 좋네요^^
마음이 쏴~해지는 느낌이었어요...
6개월 여행자시라구욧~? 염장을 듬뿍 지르시고 가시는군요..캬캬..
넘 부러워용..아 배 아포~~~!-_-;;
여행 중 가끔씩 올려주시는 글 열심히 읽을께용^^
좋은 여행, 느낌 있는 여행 하시구요...

사진 크기 쫌만 줄여주심 안될까요?-_-;; 눈 아파요..ㅋ
danaia 2006.09.06 18:27  
 
 방배동님의 악플 감사합니다. 저 역시 제국주의 그늘 속에 편하게 여행중이긴 합니다만... 죄송합니다. 도저히 입은 못다물겠는데요?
삼천포님.... 첫번째로 제 글을 읽어주신 축하 선물로 제 블로그 무료 이용권을 드립니다. blog.naver.com/danaia 로 오셔서 매일마다 마음껏 이용해 주세요. 재미있는 여행 이야기가 아주 많답니다. ^^

ㅋㅋ 삼천포님의 여행기처럼 수많은 답글에 댓구를 하고 싶은데 악플 한 개에 동정표 하나라..... 뭐 나쁘진 않군요.
(202.62.101.98)  2006
따라구룽 2006.09.06 19:27  
  지난해 캄보디아를 다녀왔더랬습니다. 찬란한 과거의 영화와 현재의 고통이 한데 엮인 그 곳에서 마음이 참 무겁고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들과 함께 활동하는 분들이 많으셨고, 그분들과 열심히 삶을 일구는 캄보디아 사람들을 보면서 희망도 보았습니다. 킬링필드에는 시간이 부족해 찾아가보지 못했는데 찾아갔더라면 좋았을걸..이란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올려주실 여행기, 기다리겠습니다. 건강하게 여행하시길..
달띵이 2006.09.08 18:57  
  저도 톤레삽에 갔었습니다..  배를 타고 떠나자마자 한국인이 세운 교회가 있더군요..  운동할수잇는장소도 배위에 잇는것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대야(?) 양동이(?) 아무튼 뭐라  표현하기 힘든 그런 김장할때 그릇(?)들을 타고 호수 위를 자유롭게 다니더군요..  생각보다 멋졌드랬습니다.. 
danaia 2006.09.09 15:22  
  따라구룽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여행해야 하는데,.... 벌써 마음이 조금 지치네요.... 어느덧 한국을 떠난지 7개월째입니다..ㅋ
달띵이님.. 운동장... 참 기발나지 않아요? 비록 좀 좁긴하지만... 배 위에서 뛰어놀 수 없어 발육이 안좋은 아이들에겐 아주 커다란 선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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