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표로 부터의 이탈 - 53. 마지막 왕조의 향기 in 후에
-후에 황궁Hue Imperial city : 1804년~1945년 동안 응우옌Nguyen왕조의 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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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Nguyen왕조는 베트남 전역을 통일한 첫 왕조이자 마지막
왕조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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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암Siam왕국에서 망명중이던 응우엔아인Nguyen Anhi이 시암과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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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이선TaySon왕조를 무너뜨리고 1802년에 후에Hue에서 왕조를
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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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는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이 개국되기 전까지 143년동안 존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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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황궁Hue Imperial city은 1804년에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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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명의 모든 황제는 이 곳에서 머무르며 왕국을
통치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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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가치와 통치의 유적을 인정받아 1993년 유네스코로 부터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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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외부의 해자 토목양식이나 내부 건물의 건축양식, 조경양식이 중국의 것과
아주 유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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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문자가 없었던 탓에 모든 통치자료는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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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도를 넘는 더위에도 수 많은 관광객이 향기를
찾아온다.
-민망MinhMang 황제 : 왕조의 2번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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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망황제는 개조인 지아롱GiaLong황제의 4째 아들로 1791년에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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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기지 재편, 지방행정구역 정리, 고위관료의 세재 강화등과 같은 통치
개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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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위해 도량형 통일, 구휼소 설치, 국립 교육기관 설립, 도로망
개선등의 정책도 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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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국이었던 참파Champa국을 완전히 병합하여 베트남 전역을 최초로
통일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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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에게 패권을 행사하고 서방제국주의에 맞서고 기독교를 탄압 할 만큼
자신감이 충분 했었던 것 같다.
-뜨득TuDuc 황제 : 왕조의 4번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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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1847년 부터 1883년 까지 36년을 통치한 왕조의 최장수
황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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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황릉은 후에황궁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왕비인
티엔안스ThienAhhs의 능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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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 동안 기독교를 탄압하고 수만명의 기독교인을 처형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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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빌미가 되어 1858년 프랑스 제국주의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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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후 4년 뒤, 1862년에 항복을 선언하고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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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3개주 할양, 전쟁 배상금 지불, 프랑스 전함의 메콩강 자유 항행,
기독교 포교 자유는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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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외교권 행사시에 프랑스 황제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치욕적인 조항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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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프랑스는 1867년에 남부 베트남과 사이공을 식민지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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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역사의 흐름속에 던져진 황제의 휴식을 위해 이 만큼이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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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의 무력을 앞세운 침략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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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그의 고뇌가 그가 남긴 기록물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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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왕조의 기록물 중에 절반 이상이 그의 재위기간에 편찬되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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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관습, 국제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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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명석한 황제였다고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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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혼란은 프랑스 제국주의가 더 깊이 베트남 땅으로 파고드는 계기가
된다.
-까이딘Khai Dinh 황제 : 왕조의 12번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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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1885년에 태어나 1916년에 왕좌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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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능은 생전인 1920년 부터 사후 1930년 까지 10년
동안 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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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나 조형물의 양식이 이전과는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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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왕조의 모든 권력은 프랑스 제국주의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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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국가적 행사나 공연, 고위 공무원 임명이나 파면에 대한 결재 뿐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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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13세의 아들, 바오다이BaiDai에게 이름뿐인 권좌를 남기고
승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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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황제 바오다이는 즉위 후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 황제가 왕국에
없어도 되는 시절이었다.
이상 후에궁, 민망 황릉, 뜨득 황릉, 카이딘 황릉에서 응우옌 왕조의 사라져감을 밟아 보았다.
이 외에도 후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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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무ThienMu사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1808년에
지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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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년 응우엔 가문의 호앙에 의해 축조된 티엔무TienMu사원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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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의 예언에 따라 나라와 가문의 번영을 위해 7층 석탑을
지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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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몇번의 개축을 하고나서 응우옌 왕조의 신성한 사찰이 되었으며 후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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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그 노파의 예언처럼 200년 후에 응우옌 가문은 이곳에서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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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추옌HoQuyen 원형 경기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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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뤄 짐작하건데,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처럼 이 곳에서도 죄수들의 격투가
있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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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가까운 곳에는 희생자들을 위한 사찰도 있는 듯 하다만 개인적인
추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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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단남지아오DanNamGiao가 후에성으로
부터 정남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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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년에 축조되었고 매해 봄에 황실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1891년 이후
부터는 3년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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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의 외곽단은 사각형이고 내곽단은 원형인 것은 중국의 제단 양식을
철저하게 따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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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에는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있었던 왕조의 흥망에 관한 향기가 온
도시에 베여있다.
이제 활기찬 젊은 베트남의 향기를 이 곳에서 맡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