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침략기 - 출발에 앞서
조금만 참아라.
호기심은 금물이다.
지금의 인내가 네 미래를 바꾼다.
이렇게 하면 너 전문대도 못간다.
서울에 집 놔두고 지방에서 방 얻어 대학 다닐래.
고등학교 시절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들.
지겹고 신물나고 짜증났던 말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저 따위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습관처럼 내뱉는
건조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이던가, 차디찬 겨울 바람만 스산한 늦은 밤거리를 걸어
마치 폐렴환자처럼 거칠고 격한 기침을 하며 집으로 돌아오다
나는 문득 커다란 상실감을 느꼈다.
공부가 하기싫고 미래가 불안하고 목표가 없는 아이들에게,
그만한 시절 나 역시 참으로 못마땅했던 저런 잔소리를 버릇처럼 해대는 나는
과연, 그렇게 타령하는 대학이란 걸 나와, 뭘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라는 반문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일상이라면, 하다못해 일탈이라도 좀 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난, 직장에 몸을 둔 채로,
타이 행 티켓을 끊고 무작정 두 달짜리 휴직서를 제출했다.
혹여 그러다 복직 안 되면 어쩌려고, 라든지 다들 그렇게 사는데 참 유난이다, 라든지의
우려의 시선과 곱지않은 비아냥도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방학이 되니 더 일찍부터 더 늦게까지 혹사당하는 불쌍한 나의 어린양들을 보며
최소한 난 수험생은 아닌데 뭘, 이라는 느긋하고 철없는 여유를 탐닉하기로 해버렸다.
난 만년아동이고 싶으므로,
애당초 흰머리 생기는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들을 감당하는데는 용량이 작은 인간이니까.
사실 태국 여행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대한 불안으로 매일밤을 불면으로 시달리는 게 아니라
천성 백조처럼 먹고 놀고 자는 데 탁월한 적성을 보이던 내게
유럽까진 아니더라도 가까운 나라라도 나가보라는 이모님의 지령이 떨어졌었다.
정말 하해와 같은 후원이 아닐 수 없었다. ㅜ_ㅜ
그때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밤낮 서핑질 끝에 결정한 가까운 나라, 가 바로 태국이었다.
한손엔 그 해 겨울 3년여의 영국 유학을 막 마치고 돌아온 사촌언니의 손을 잡고
한손엔 20kg을 꽊 채운 러기지를 끌고 15박 17일의 자유 여행을 시작할 때에만 해도
태국은 그저 물가 싸고 구경거리 많은 동남아 여행지 정도의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부터 다시 떠나는 현 시점까지 태국은
언제나 그리움의 나라였고 목마른 자의 닿지 않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태국은 지난 번에 다녀왔으니 다른 나라를 가보지 그러니, 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난 단호히 태국을 가겠노라,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내게 다시 해외여행이란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태국행을 선택하리라고 마음먹었었으므로.
태국에 다시 가게 되기까지 나름대로 긴 시간이 흘렀고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가게 되었다, 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게 사실이었다.
지난번 여행 때에는 호텔에서만 묵었고
너무 좋은 곳에서만 식사를 했고
오직 언니와 나 둘만이 여행의 전부였다.
해서 이번 여행에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안 이 태사랑이란 사이트에서 듣고 본
카오산 로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한낮이든 밤이든 원하는 순간 아무 때나 병맥주를 들고 거리를 거니는
한층 더 자유롭고 즉흥적인 여행을 하고자 했다.
3년만에 드디어 다시 태국으로 떠난다.
내 머리와 마음을 짓누르는 많은 생각과 계획들은
잠시 한국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내 몸과 태국을 원하는 마음만 훌쩍 그곳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