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여행-제2합 : 수완나품 택시운전사 1
새벽 3시의 수완나품은 스산했다.
비행기는 정시에 착륙했는데
웬일인지 활주로에서 1시간 이상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비행기도 여러 대 그렇게
활주로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암튼,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입속으로 열댓 번씩 중얼거린 후에야
겨우 지상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택시 승차장으로 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젊은 태국 남자가
‘어디 가냐?’고 묻는다.
‘카오산 간다’고 하자
‘400밧’이라고 한다.
‘노, 미터!’라고 외치자
녀석은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흘리더니
뒷쪽의 택시를 가리킨다.
허걱~ 엄청 고물택시다.
문도 잘 안 열린다.
힘껏 당기자 삐꺽~ 소리가 난다.
알고 봤더니 택시운전사가 문을 잠가 놨다.
문제는 잠금 해제를 했는데도 문이 안 열린다는 거다.
아... 아까 새 택시로 바꿔달라고 할걸.
왠지 불행의 늪으로 한 발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우 문을 연 택시 운전사는
순순히 운전석에 앉더니 미터를 켜고 운전을 시작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일반적으로 공항에서 카오산까지
택시미터로 200밧이 약간 넘는다.
그런데 아직 카오산이 한참 남았는데
미터기는 벌써 200밧에 근접해 있다.
결국 카오산에 도착하니 미터기가 320밧을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 고속도로 통행료,
(사실 새벽 3시에 고속도로를 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운전사는 제멋대로 고속도로를 탔다.
항의하려다 문문제도 있고 해서 참았다.)
공항수수료를 합하면 거의 500밧에 가까운 돈이다.
아, 아까 그 젊은 놈이 400밧 불렀을 때
순순히 따르는 건데...
그런데 운전기사가 택시비를 받고도
배낭이 들어 있는 트렁크 문을 열어줄 생각을 안 한다.
그러더니 문 수리비로 500밧을 내라는 거다.
오, 마이 국왕!!!
물론 나로 인해 그 문에서 비명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이 그 전부터 이미 고장이 나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솔직히 미터기 숫자가 320밧이 찍힌 이후로
운전기사에 대해 상당히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리비 이야기가 나오자 폭발할 지경이었다.
내가 못 내겠다고 하자
경찰서로 가자고 한다.
좋다, 가자!
하지만 여기는 태국 땅, 운전기사는 태국사람,
경찰도 태국사람, 그러나 나는 한국사람...
후진국 일수록 애국심과 단결력이 강한데,
잘못하면 완전히 바가지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되겠다, 평소에 알고 있던
모 한국식당 사장님께 SOS를 쳤다.
마침 한국에서 오는 친구 분 기다리느라
가까운 곳에 계시던 그 사장님,
흰 머리를 휘날리며 단박에 달려오셔서
한바탕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친 끝에
300밧에 합의보기로 했다. 쩝!
동방항공에 의해 입은 내상이 채 아물기도 전에
만만하게 생각했던 택시운전사에게
한 칼 깊숙이 당하고 말았다.
이제 태국에 도착한지 겨우 2시간 남짓한데,
이렇게 만산창이가 되다가는
이번 여행을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퐁퐁 솟아났다.
하지만...
가공할 내공을 지닌 수완나품 택시운전사는
하나가 아니었다...
*사진은 택시운전사에게 입은 내상을 달래기 위해 숙소 근처를 산책하다가 찍은 짜오프라야 강과 라마 8세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