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가족 롱넥마을 가기
바람 가족 매홍손 카렌족 롱넥마을 가다.
치앙마이에서부터 서둘러서 출발을 했는데요.
매홍손에 도착을 하고 시장 다니고 밥먹고 시간이 어중띠게 남았습니다.
그냥 숙소로 들어가서 아이들과 씨름을 하면서 노느냐 아니면 어디 한곳을 더 다녀오느냐. 지도를 찍으니 메홍손에서 불과 15키로를 가면 롱넥 마을이 나온다고 합니다.
아 그 테레비에서 본 .. 지구촌 여행인가 하는 것.. 태국 북부의 오지마을 탈렌트가 들어가서 목에 링한 사람들과 사는 그 때 본 그 목 긴 사람들.
시간이 빠듯하긴 한데 그냥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뭐 가다 못가면 돌아오면 그만이구요.
삼거리를 지나 작은 마을로 들어가서 골목골목을 지나고 나니 큰 길을 지나고 나니 강을 하나 건넜습니다. 다리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것 같습니다.
아마도 탁신때 만들어진 다리와 도로 같은데요. 다리 옆에는 옛날 구름 다리가 아직도 걸려 있었습니다. 오 그래. 군대에서 유격훈련 받을때 저런 비슷한 다리를 건넜지. 아래는 급류인데 잘못해서 술마시고 가다가 떨어지면 바로 황천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광객들도 올라갔다가 아마도 반도 못가서 기어서 돌아올것 같습니다. 이 다리가 생기지 않았다면 얼마나 불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명을 달리 했을까요. 새로 생긴 다리 덕분에 편하게 간다 생각하고 한참을 더 가서 리수족 마을을 지나니 산속으로 목 긴 사람들의 마을이라고 표시가 나옵니다.
차가 갈 수 있을까? 승용차인데 걱정을 하면서도 이미 산길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돌멩이가 차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리는데 연료통 구멍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예전에 한번 밀고 올라가다가 연료통에 구멍을 내서 껌으로 막고 난리를 치며 겨우 겨우 돌아온 적이 있거든요.
슬슬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길은 작은 개울을 건너서 산으로 산으로 올라만 갑니다. 여기저기 골이 진 황톳길은 비가 오면 절대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예전에 인치업 한 4륜구동을 몰고 다녔는데요. 차라리 자갈길이나 모래길은 쉬워도 황토길은 정말 어렵더군요.
머드 타이어를 끼고도 차는 이리저리 휘둘리는데 길에 차가 패대기 당한 적도 몇 번 됩니다. 오늘은 순하디 순한 순정 오펠 승용차. 올라가는데까지만 올라가고 핑계김에 돌아 나올 생각입니다.
바닥을 벅벅 긁으며 한시간을 올라가니 군 초소가 나오더군요. 군인이 어디가냐 묻기에 롱넥 카렌족 보러간다 그랬더니 오늘은 끝났다고 합니다.
나:몇시에 문을 닫는데요?
군인:여섯시요.
나:그럼 지금이 여섯시 39분이니 이미 문을 닫았겠네요.
군인:예 내일 다시 오세요.
(최대한 불쌍하고 지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치앙마이에서 12시간이나 왔거든요. 롱넥마을 보려구요. 지금 돌아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 줄 몰라요. 고생 댑따 많이 했어요. ..
정말 치앙마이부터 매홍손은 강원도길 굽이굽이 여덟 시간입니다. 천천히 가면 열 시간이구요...
군인:러싹 쿠루 캅..쫌만 기달려 보세요.
차에서 나와서 병사와 이러 저러한 수다를 떠는데요. 항상 레파토리 그대로 입니다.
일본 사람이지?
아니야 까울리야.(한국사람)
너 태국어 무지 잘한다 몇년 살았냐?
뭐 몇년은 여덟달 살았는데 여섯달은 맨날 학원다니면서 태국어만 공부했다. 그냐? 여긴 머하러 왔냐?
놀러왔다.
언제 가냐?
낼 간다.
태국어 연습을 위하여 필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롱넥마을 이장이 나옵니다.
원래는 안되는데 특별히 들어가도 된데. 잘 다녀와.
고맙다야. 촉디 .
군초소에서 한 오분을 들어가니 아무것도 안보이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두런 두런 사람들의 소리가 나더군요. 어둠 속에서 사람들 소리는 짐승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조금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 사물이 보이기 시작을 하니 마을이더군요. 우리를 데리고 간 친구가 띠누인데요.
띠누 말로는 이곳에는 50여 가구가 산다고 합니다. 집들은 골짜기를 따라 간소하게 아랫층은 가축우리와 창고 이층은 거실겸 침실의 단순한 태국 고산족 전통가옥 그대로 입니다. 아직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 마을은 촛불로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외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여기저기서 호기심에 가득찬 눈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정말 목에 링을 차고 있는 롱넥족이 맞습니다. 나이가 많을수록 링을 많이 달고 있다고 하는데 그말이 맞더군요.
사람들은 한밤중에 쳐들어온 이 낯선 이방인들을 경계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인사를 건네옵니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는 어둠 속에서도 금방 마을 어린아이들과 친해져서 뛰어 다닙니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쫓아다니는데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이 작은 마을에도 학교가 있고 보건소가 있습니다. 보건소에는 마침 어린아이가 진찰을 받고 있었는데요. 우리 작은 아이 또래만한 아이인데 열이 있다고 합니다. 정식의사는 아닌 것 같은 정부에서 파견된 간호사 정도 되는 보건소장이 청진기를 들고 아이를 진찰하고 있습니다.
보건소는 여자들의 사랑방 정도 되는지 십대 카이얀족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습니다. 낮에는 모르겠지만 밤에는 그냥 태국 10대들처럼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더군요. 그런데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목에 링을 달고 손목에 팔찌를 하고 있는 모습이 색다르고 낯설기도 하지만 상당히 멋스럽더군요. 아마도 이런 파격을 패션이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호기심 많은 십대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우리 가족에게 어디서 왔니 어디 사람이니 물어봅니다. 우리는 항상 호구조사에 즐겁게 응하는데요.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은 다들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이제 태국어 1단계를 마치고 생활적응 연습을 하는 아내에게는 한마디 태국어말하기가 엄청 도움이 되거든요.
학교는 밤에 보아서 겨우 카메라 후렛쉬를 터뜨려서 교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띠누의 큰딸이 이곳의 선생님인데요. 나이 열아홉에 6개월 임산부입니다. 3반을 맡아서 가르치고 있는데 가르치는 학생이 모두 10명입니다. 이 학교에는 100여명이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12명이 있다고 합니다. 태국에 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이 나라는 아이와 교육에는 참 열심인 나라입니다. 버마 국경에 있는 이 작은 마을 작은 학교에도 열두명이나 되니 말이지요.
띠누의 큰 딸은 영어가 상당히 유창한데요.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헤어졌다구요. 그런데 아주 당당하더군요. 띠누 역시 그런 것에 개의치 않구요. 그러고 보니 마을은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따로 모여서 노는것 같습니다.
모든 진실은 밤에 나타난다고 밤이 되니 사람들은 술도 마시고 옆집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노래부르고 처녀들이 이리저리 수다를 떨며 돌아다닙니다. 그래도 이마을 전체에 불이라고는 촛불 대여섯개가 끝입니다.
옛날 어렸을때 강원도 산골 고향마을이 떠오릅니다. 이곳에 와서 자꾸 옛날 고향생각이 나네요. 지금은 포장도로가 생기고 전기 들어오고 수퍼마켓에 술집 당구장 까지 있지만 어렸을때만 해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깡촌이었거든요. 태국의 북부가 산세나 풍광이 딱 강원도 같고 사람들 사는 모습이 우리 가난하고 어려웠던 그시절 하고 이모 저모로 똑같아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나 봅니다.
한밤중에 마다하지 않고 마을을 안내해 준 띠누가 고마와서 혹시 우리가 아이들의 학용품에 보탤 수 있도록 천밧 정도 리양을 해도 되겠느냐고 하니 고맙다고 하더군요.
원래 이년 전만해도 도움을 주는 서양인들이 있어서 연필과 공책은 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이 도움이 끊어져서 열명 정도의 아이들은 연필과 공책도 없이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이곳이고 밤이 길어 아이들이 많다보니 학용품이나 아이들 용품은 더더욱 귀하겠지요.
너무 긴 시간 그들의 휴식을 빼앗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인사를 하고 돌아나왔습니다. 물론 돌아나오는 길에도 차 바닥은 드륵 드륵 긁혔습니다. 매홍손에 도착하여 전기를 보니 드디어 문명세계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그 깊은 산속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이골짜기 저골짜기에서 들려오는데도 사람이 살고 웃음이 있고 음악이 있었습니다. 진부한 질문이지만 우린 지금 행복한가요? 편리한 모든 것이 있다고?
집에 돌아와 글을 쓰면서도 마치 외계의 어느 곳을 다녀온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추신: 저는 지금 치앙마이에 가족들과 10개월째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