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다녀왔습니다] 12. 위앙텅⇒수언힌땅⇒쌈느아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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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다녀왔습니다] 12. 위앙텅⇒수언힌땅⇒쌈느아 (終)

vixay 15 3881

(BGM) Missing Island - 길을 잃지 않도록 음악끄려면 ESC

어제의 그 성태우로 후아므앙까지 갔다. 후아므앙은 위앙텅에서 쌈느아까지 가는 길의 중간쯤에 있다. 성태우 기사 아저씨는 사람이 좋은데, 아줌마가 좀 깍쟁이인듯 하다. 25,000K이면 덮어쓰고도 남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바득바득 우겨서 기어이 28,000K을 받는다. 앞으로 며칠간 이 성태우 타는 사람들은 피곤할 성 싶다. 아줌마의 표정에서 어제의 벌금 10$을 꼭 복구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후아므앙에서부터 6km를 죽을동살동 걸었다. 거의 대부분 오르막길이라, 꽤 오랫동안 운동과 담쌓고 지낸 두 다리는 초장부터 진동모드다. 배낭을 후아므앙의 구멍가게에 맡겼기 망정이지, 그것까지 지고 왔으면 틀림없이 중간에 무슨 사단이 났을 거다.
목적지는 수언힌땅. '서있는 바위의 숲'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널찍한 바위 판때기가 삐뚤빼뚤 서 있는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 석기시대의 유적이라는데, 고인돌처럼 장례와 관련있을 거라는 추측만 해 볼뿐, 정확하게 알려진 사실은 없다. 씨앙쾅의 돌단지 유적과 그 시기나 사용된 돌의 재질이 비슷하고, 근처에서 나온 부장품들도 비슷한 게 많아,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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눕고 선 수언힌땅의 판석들. 영국의 스톤헨지 같은 분위기도 얼핏 느껴지는데, 정말 뭐였을까

내가 보기에, 이 바위판들은 외계인의 화투패고, 씨앙쾅의 돌단지는 그들의 술병 또는 도시락이었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이 근처에서 나지도 않는 돌로 그 큰 판때기며 단지를 만들어 옮겼다고 보기엔, 그 무게나 양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게, 오히려 더 납득이 간다.
먼 옛날, 외계인 배낭여행자들이 지구를 방문했다. 한참 모아이 섬이니 이집트니 열대지방을 돌던 그들은 더위도 식힐 겸 해서 시원한 씨앙쾅으로 술단지를 들고 소풍을 갔다. 여기저기 제일 전망이 좋은 곳으로 옮겨 다니며-실제로 씨앙쾅에서도 가장 경치좋은 포인트에 돌단지들이 널려 있다.- 천렵을 즐기던 그들은, 술기운이 불콰해지자 화투를 시작한다. 뭐, 꼭 화투가 아니라도 좋다. 카드로 하는 놀이면 뭐건 상관없다. 외계인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째 알랴. 여튼 한참을 열중하다, 카드놀이는 결국 싸움으로 번진다. 불리한 패를 쥐고 있던 한 외계인이 판을 흐트려서 멀리 던져버린다. 그들은 대판 싸우고 구시렁대며 자기네 별로 돌아가고 만다.
그렇게 화투패가 날아와 꽂힌 곳이 수언힌땅인 것이다. 판을 흐트릴 때 술병뚜껑도 몇 개 섞여서 같이 날아온 걸 보면 이 추리는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왜 학자들은 이런 쪽으로 가설을 세우고 연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럴싸하구만.

그 고생을 하고 걸어와서 이 유적지를 보면 '애걔, 겨우 이거?' 싶을 정도로 규모는 작다. 그렇지만 오는 길은 나름 경치도 좋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관심을 가져볼만 하지 싶다. 6km를 걷는 데 보통은 1시간 반 정도, 빠르면 5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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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므앙에서 수언힌땅까지 가는 길가의 풍경. 전기도 수도도 없는 마을들이 띄엄띄엄 있다.

후아므앙으로 돌아가는 길은 거의 내리막이라, 만만하게 여기며 걷기 시작했는데, 어제 위앙텅에서 만난 J를 거기서 또 보게 되었다. 좀 늦게 자기 오토바이로 뒤따라온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태워준다길래 얼씨구나 하고 올라탔다. J가 맨 산만한 배낭 때문에 그 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꼴이 영 우스웠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 걸 뭐. 1시간 반 동안 땀을 한 바가지는 흘려가며 겨우겨우 걸어간 그 길을, 10분도 안돼 쌩 내려오고 나니 뭔가 좀 허탈하고 화까지 나려고 한다. 오토바이, 좋긴 좋구마. 여튼 J군, 땡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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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언힌땅에서 업어왔음이 분명한, 후아므앙 동네의 한 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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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므앙. 이 동네는 뭘로 먹고 사는지, 그리 가난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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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므앙의 다리. 아이들 놀기 딱 좋은 둔치에 오리떼가 먼저 와 꽥꽥거리고 있다.

J는 먼저 쌈느아로 떠나고, 나는 후아므앙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한 시간 좀 넘게 기다리니 씨앙쾅에서 출발한 버스가 온다. 이것도 어제 관광안내소에서 얻은 정보다. 2시쯤에 도착할 거라더니, 시간도 얼추 들어맞는다. 거 쓸만한 관광안내소군...
버스 꼬라지를 보니 씨앙쾅을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얼마나 고충이 심했을지 상상이 간다. 창문 밑에 무언가 확 펼쳐진 모양으로 엉겨붙은 저것은 필시 꽃지짐 자국이렸다. 차를 타서 보니 두 군데의 꽃지짐 자국 옆에 각각 앉은 코쟁이 아가씨와 현지인 처녀, 눈이 풀린 것이 거의 사망 직전이다. 다른 청년들도 얼굴이 그리 썩 좋지는 않다. 음... 다음에 씨앙쾅-남넌 구간을 한 번 도전해봐야겠구만. 경치가 멋지다던데. 멀미하지 않는 B형 피를 물려주신 부모님께 잠깐 감사의 인사를.

중간에 버스 하체의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바람에 그걸 고치느라 잠깐 지체했고, 고산족 마을을 지나다 기사가 '누멧'이란 놈의 앞다리를 사느라 또 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기사는 탁월한 운전실력을 발휘해서 예정보다 빠른 4시쯤에 버스를 쌈느아에 골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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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모자를 쓴 주인은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고, 살구색 셔츠의 버스기사가 누멧의 다리를 들고 흥정하고 있다. 누멧은 너구리 정도로 커다란 쥐의 한 종류다. 그 앞에 기다랗게 늘어진 구렁이도 파는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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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손님이 앉아 있는 머리 위에다 누멧 다리를 걸어 놓았다. 나라면 기겁을 했을텐데, 저 아줌마는 태연하다. 그 구렁이를 사서 걸어 놨어도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엊그제의 그 숙소의 내 방은 내가 나간 상태 그대로 비어 있었다. 짐을 던져놓고 간만에 뜨거운 물로 구석구석 씻었다. 잠깐 누워서 쉰다는게, 어느새 해는 저물어 있다. 아까부터 배가 살살 아픈 게 낌새가 좋지 않다. 낮에 수언힌땅까지 걸으며 정신없이 먹었던 바나나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버스 기다리면서 먹었던 캔커피랑 과자가 유통기한이 지난 거였을까. 이렇게 배가 아파서야, 여행 마지막밤의 비아라오를 못 먹잖아!

배도 진정시킬 겸, 시내를 슬슬 걸어다녔다. 길은 넓지만, 역시 밤에는 다들 일찍 문을 닫는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새로 들어선 야시장을 빼고는 거의 갈 만한 데가 없다. 이렇게 조용한 도시를 보면 궁금해진다.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다들 뭐를 해먹고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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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길의 아이들이 물소를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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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이 늘어선 쌈느아의 주도로. 7시도 안 된 시간, 이 넓은 길에 다니는 차의 수는 0으로 수렴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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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이 섰다. 파는 물건이래봤자, 상설시장이나 다름없다. 단지 싼 옷가지들이 좀 더 많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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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터뜨리기는 야시장이 서는 곳이면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화살 3개에 1,000K. 화살 셋 중 하나는 무게중심을 옮겨놔서, 어지간해서는 풍선이 안 터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좀 허기가 진다. 배아플땐 굶는게 최고랬는데, 미련하게도 또 밥을 먹으러 갔다. 그래도 최대한 덜 자극적인 걸로 시켜서 천천히 꼭꼭 씹어먹었다.

밥집에서 P라는 싱가폴 아줌마를 만났다. 라오스를 너무 좋아해서, 모든 육로국경으로 라오스에 들어와 보는 여행을 몇 년째 하고 있단다. 이번에는 베트남-라오스 국경 중 최북단인 남쏘이-나매오 국경으로 들어와 씨앙쾅, 싸이솜분 특별주, 타캑을 거쳐 태국으로 나가는 경로라고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여행기와 정보들은 흥미로웠지만, 좀, 아주, 너무, 많이 수다스러웠다. 배가 아프던 것이 머리쪽으로 올라와 뎅뎅거리기 시작해서, 이제 그마안,하고 헤어졌다.
컨디션만 좀 좋았더라도 좀 더 수다를 들어줬을텐데. 아줌마, 미안. 커피는 참 맛있었어요. P 아줌마는 매니아 기질이 다분했다. 라오스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 것도 그렇고, 커피는 베트남 커피, 라면서 Trung Nguyen 상표의 족제비똥 커피와 Falcon표 연유, 베트남식 드립퍼를 늘 가지고 다니는 것도 그렇다.

여튼 이걸로 여행은 끝이다. 내일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위앙짠으로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 시작되는 거다. 여행에서 뭘 얻었냐고? 그런 거 없다. 여행을 하건 안 하건, 시간은 알아서 잘 흘러간다. 지난 2주간 지나온 길에 내 흔적은 이미 남아 있지 않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나는 조만간 지워질 기억이기를.
어느 순간, 어느 특별한 곳에서 다른 공기를 마셔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운이 좋은 경우, 기억 한 켠에 숨죽이고 있다가 가끔 추억이란 이름으로 되새겨진다.
하지만 그런 추억을 만들기 위해 여행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있어 흘러가듯, 길이 있어 떠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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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짠으로 가는 17인승 비행기. 쌈느아도 이제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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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앙짠에 거의 도착했다. 남움댐 위를 지나는 중.
15 Comments
vixay 2006.11.22 18:21  
  드디어 여행기를 마쳤네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
읽어주시고, 관심가져주신 분들, 감사드려요.

다음 주부터, 다시 한 달 정도 방랑길에 오릅니다.
혹시 또 여행기가 쓰고 싶어질런지... ㅎㅎ
again05 2006.11.22 19:36  
  오~ 잘 봤습니다.
처음 부터 여기 까지 한방에 읽었네요.
12월에 2주 정도 라오스에 갈려구요.

아마 이 리플이 태사랑에서 처음 다는 글인것 같은데...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d 2006.11.22 22:27  
  여행에 대한 인식과 감상에 100%로 100번 공감하며, 느낌과 감동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님에게, 섬세한 정서로 엮어내신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님께 무한한 행운이 함께 하길 빌어봅니다.
파랑까마귀 2006.11.23 09:11  
  그동안 님의 여행을 공유하게 해주신 거에 대해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다시 떠나는 방랑길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즐겁고 멋진 여행이 되시길 진심으로 바래요~
미라클69 2006.11.23 10:56  
  쌈느아가 항아리같은 돌들이 많은 곳이지요? 많이 가고싶은 곳인데... 뱅기가 무척 무서워 보입니다... 야크기... 기행문 넘 재미있었고 더 돟은 기행문 기대합니다.
vixay 2006.11.25 10:21  
  again05님/ 첫 댓글의 영광을 저에게... ^^; 감사합니다.

20d님/ 행운을 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님께도 늘 행운이 깃드시길.

파랑까마귀님/ 그동안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여행기를 쓰게 된다면 아마도, 님의 응원 덕분일 거예요.

미라클69/ 돌항아리가 많은 곳은 씨앙쾅주의 폰사완입니다. 쌈느아는 그 이웃한 주에 있고요. 저 비행기가 야크기군요... 옆에 Y-12라고 적혀 있긴 하던데...
피비 2006.11.27 10:24  
  님의 글을 보고 나니 라오 갈 일이 더 기대됩니다.^^
라오 남부를 부실하게 돈 적이 있어서 남부를 다시 가나, 북부를 가나, 했는데... 북부로 올인입니다.
참, 근데... 12월 퐁살리 날씨는 많이 추울까 걱정이네요.ㅠㅠ
암튼... 사진에 담긴 라오 북부, 너무 멋져요! 
담번 여행기도 기대할게요!ㅋ
이번에도 라오로 가시는지 궁금하네욤.^^
사깨우 2006.11.30 08:56  
  조금 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훌륭한 여행일기네요
차분히 마음을 가지며 구석구석 다니신 모습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감솨~~
휴식 2006.12.06 09:07  
  라오스..다녀온지 벌써 4년이나 됐지만..아직도 가슴한켠이 아릿합니다. 님 글대로 운이 좋아 추억으로 불릴만한 행운을 경험했던것 같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이런 기분을 다시 느끼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담엔 저도 이쪽루트를 꼮 다시 밟게되는 날이 조만간 오길 바라면서...건강하세요~
vixay 2006.12.07 19:37  
  피비님/ 12월의 퐁살리는 춥습니다.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따뜻한 옷들을 좀 준비하세요. 지금은 라오...^^

사깨우님/ 감사합니다. 꾸벅.

휴식님/ 4년 전이면 제가 라오스에 첫발을 디뎠을 때군요...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 라오스는 라오스입니다. 더 변해버리기 전에 빨리 오세요~
아는 남자 2007.01.17 04:58  
  싸이형!! 형님의 글 잘 봤습니다.. 이런 곳에서 만나니까.. 참 신기하네요..ㅎㅎ 이게 그 때 다녀오셨다던.. 그 윗지방이구나... 아항!!ㅎㅎ
vixay 2007.01.28 22:32  
  아는 남자? 뉘시온지... 혹시 싸이너이?
후니니 2008.03.26 19:00  
  잘 보았습니다. 저도 라오스를 제법 다녔지만 늘 그리워 지는 곳이랍니다. 다시 떠나면 쌈느아와 라오스 북부를 여행할랍니다 다음엔 어디를 가시는지... 여행기가 기대됩니다
까꿍이엄마 2010.11.06 00:18  

삼누아(후아판 주)의 젖줄 난는을 꼭가보세요....그곳은 장래에 한국인의 손에 개발될 예정 지역입니다.....수력댐 삼단식으로

그런풍경 2012.01.06 12:38  
한국인의 손에 파괴될 지역이 또 늘었군요 --;; 이렇게 말씀 드려 죄송합니다만...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ㅠㅠ 죄송하지만 제 맘은 좀 아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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