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여행일기-추억의 음식 한 그릇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추억의 음식이 있다.
그 이름을 듣거나 향내를 맡을 때
머릿속으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애틋한 감정과 사연이 얽혀 있는 음식이 있다.
내게는 짜장면이 바로 그러한 추억의 음식이다.
어릴 적 변변한 먹을거리가 없었던 우리 세대에게
짜장면은 최고의 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그 시절 우리 또래들의 우상은
반장도 아니고 선생님도 아니고
바로 짜장면집 아들이었다.
그 맛있는 짜장면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그 애가 너무도 부러웠던 것이다.
우리들의 장래 희망 1순위도
짜장면집 주방장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짜장면집 주인보다
주방장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 주인보다 주방장이
짜장면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그 나이다운 유치한 생각 때문이었다.
식구 중 누군가의 생일이나 명절날,
온 가족이 새옷을 입고 짜장면집으로 향했다.
요즘은 짜장면을 주로 배달해서 먹지만
당시에는 짜장면집에 가서 먹었다.
별다른 이벤트가 없던 그 시절에는
외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그만큼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짜장면집에 가면 내가 단골로 향하는 장소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주방이다.
당시의 짜장면집들은 지금처럼 기계로 면을 뽑지 않고
100% 손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수타면이라고 하는 그 면 만들기 신공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주방장은
우상의 지위를 뛰어넘어 영웅이었다.
밀가루 한두 대접을 도마 위에 쌓은 후
물을 약간 넣고 몇 번 주물거리다가
어느 정도 반죽이 되면 양손으로 길게 늘어뜨리다가
도마 위에 냅다 패대기친다.
그때 도마 위로 떨어지는 밀가루 반죽 소리가
왜 그렇게 우렁차고 통쾌하게 들렸는지!
그렇게 몇 번의 패대기질과 늘어뜨리기를 반복하면
한 덩어리였던 밀가루 반죽은
어느새 수백 가닥의 면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지금도 짜장면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거나
짜장면 특유의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오면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까까머리 코흘리개 시절의 풍경들이
머릿속 한 구석에 신기루처럼 떠오른다.
비록 입성은 초라하고
먹을 것도 변변찮은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사람들과 세상살이가
지금보다는 따뜻하지 않았던가?
2000년에 동남아를 8개월 동안 여행할 때
말레이시아 페낭의 한 호커센터에서
짜장면처럼 보이는 음식을 발견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마주친 그 음식은
향수병에 시달리던 내게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페낭에 머무르는 1개월 동안
그 집을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짜장면을 보면 그 집이 생각나고
망명자들의 집합소 같았던 페낭의 거리와
한동안 깊은 신세를 졌던
치 부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푸켓에 가도 짜장면과 비슷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푸켓타운 시계탑 로터리 근처에
몇 군데 국수집이 있는데
그 중 한 집에서 짜장면과 비슷한 음식을 판다.
한국 여행자들에게 소문난 집은
‘쏨찟’이라는 국수집인데
내가 단골로 가는 집은
그 집 옆에 있는 ‘미팟 혹끼엔’이다.
이 집의 짜장면은 돼지고기, 해물,
믹스(돼지고기와 해물 섞은 것), 세 가지인데
나는 주로 믹스를 먹는다.
주문받을 때 계란을 넣을 거냐고 묻는데
개인적으로는 안 넣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믹스에 계란을 넣으면 50밧이다.
이 집의 단점은 손님이 너무 많아서
1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국수집이 30초 이내에
음식이 나온다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오래 걸리는 셈이다.
와서 먹고 가는 사람도 많지만
10~20인분씩 포장해가는 사람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종업원들이 무뚝뚝한 것도 감점요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상쇄하는 요인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뛰어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