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가게 된 홍콩 03 - 여행전야
나는 지병이 하나 있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걸 계속 의식하지만,
재빨리 해치우진 않고 데드라인까지 계속 스트레스만 받으며 머릿속으로 계획만 세우다가
데드라인 직전에 부랴부랴 완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완성까지 계속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완벽주의가 만든 나쁜버릇 같지만 특유의 게으름과 합쳐져서 잘 고쳐지진 않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계속 그랬다.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여행기에 데드라인이 없으니 더 늘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짐 싸는 일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나흘 전 부터 짐 싸야지~ 하는 마음을 먹었지만
정작 짐을 싼 것은 출발 전날 이었다.
나흘 전에 한 일은 앉아서 메모지에 뭘 들고 갈 것인가를 끄적거린게 전부.
그걸 보고 또 보고, 동생에게 묻고 또 물어서 빠진 것이 없나 체크를 했고,
다다음 날엔 외출한 김에 여기저기 들러서 집에 없는 준비물을 구입했다.
출발 열흘 쯤 전부터는 홍콩의 독감비상에 대한 뉴스가 하도 많이 나와서
또 엄청 겁을 집어먹고 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우리나라 전쟁날까봐 무서워하는 서양인들과 똑같은 종류의 겁인거 같아서
그냥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준비해서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래도 마스크는 약국에서 병원균 막아주는 필터 붙어있는 비싼걸로 샀다.
손소독제는 네이처리퍼블릭이라는 화장품 가게에 가면 손 큰 남자의 엄지손가락만한 것을 판다.
향이 매우 다양해서 고르는 재미가 있지만 가격은 예상보다 조금 비싸다.
둘이서 팍팍 쓰고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면 4개는 필요할것 같아서 샀는데, 만원 가까이 들었다.
이것도 약간 병적인 부분이긴 한데, 손 소독제를 지갑이 든 가방에 넣어가면 혹시나 가방검사때 걸려서 버리라고 할까봐 좀 걱정이 되었었다.
액체류는 아니지만 애매하게 액체류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두 개는 캐리어에 넣고 두 개는 동생이랑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다녔는데,
걱정과는 달리 전혀 언급도 없어서 약간 서운하기까지 했다.
메모해둔 준비물을 하나 둘 씩 가져다 모아두고 펼쳐둔 캐리어에 넣었다.
고작 5일 다녀오는 여행인데, 무슨 캐리어가 그리 꽉 차는지-_- 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용물을 살펴보면 이해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은 옷이었다.
여행기간의 홍콩 날씨는 우리나라 가을날씨. 평균 15도 내외. 아침저녀으로는 10도 내외라 했다.
그런데 다들 알겠지만, 우리나라에 봄 가을 없어진지가 꽤 오래 됐다.
겨울 지났다 싶으면 꽃샘추위 오고, 그러다가 벚꽃 좀 핀다 싶으면 금방 더워지는지라
패딩입다가 패딩 벗고 후드만 입다가 더워지면 반팔 입고 다녔었던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봄가을 옷차림이 어떤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가져갈 옷이 많아졌다.
약간 쌀쌀한 가을날씨의 옷부터 초여름 날씨의 옷까지..
태국 갈 때 가져가는 한여름 옷과는 한 벌의 부피 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이건 홍콩여행이다.
패션의 도시, 그것도 그 한복판 침사추이에 근거지를 둔 여행인데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태국여행과는 옷차림이 좀 달라야 할 것 같았다.
소호의 밤문화도 경험해 봐야 하는데 츄리닝 비슷한 옷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다보니 가방의 반은 옷으로 가득찼다.
옷을 여러벌 챙기면 또 다른 짐이 늘어난다.
신발.
옷 분위기에 따라 다른 신발을 신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이니 발이 피곤한 상황을 대비해 운동화도 필요하고, 예쁜 옷 입을 땐 안어울리니 예쁜 신발도 필요하고..
신발은 옷처럼 접어서 넣을 수 없는 꽤 부피를 차지하는 품목이라 더 짐싸기가 어렵다.
구겨지면 곤란하니까.
그 외에 호텔이 믿을만하지 못해서 혹시나 싶어 여분 수건도 챙기고,
드라이 해야 하니 고데기도 챙기고,
비상약과 화장품 파우치도 넣고 보니
무슨 이삿짐 같았다-_-
그런데 가방이 좀 커서 공간이 남아 그랬는지
평소에 안하던 짓까지 하려고 했다.
한국 컵라면을 들고가려고 했던 것.
동생한테 한 소리 듣고 정신차렸다.
아무리 처음 가는 홍콩이라도 우린 음식때문에 고생하진 않을거라는 소리..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방을 챙기면서 든 생각은 여행이 참 번거로운 행사라는 것이다.
물론 단촐한 짐으로 가볍게 떠나는 여행자들이 많은 태사랑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내 스타일이 확실하고 내가 상황에 맞추기 보다는 상황을 나에게 맞추어가는것을 좋아하는 나는
한국에서 살던 인프라를 여행에서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있는것 같다.
특히나 이것저것 신경쓰며 사느라 "뷰티"따위를 제일 먼저 포기하는 한국에서의 나와는 달리,
모든것을 끊고 여행을 간 나는 여행기간 동안에는 나에게만 집중하고싶기 때문에 더 그런 것들을 신경쓴다.
그래서 챙겨가야 할 것들이 많고, 신경써야 할 것이 늘어나서 번거로워지는 것이다.
물론 이 번거로움을 견디는 이유는, 여행이라는 일탈을 하면 생활속에서의 기본적인 번거로움이 사라지므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번거로움의 총량은 오히려 줄어들기 때문이다.
여튼, 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워낙에 큰 캐리어인 탓에 공간이 남아
나름 '그래도 꽉 차진 않았네. 이 정도면 선방했어' 하는 생각을 했는데,
가방을 잠그려고 뚜껑을 닫는 순간 느꼈다.
'돌인가'
지퍼를 잠그고 가방을 세우는데도 엄청 힘들었다.
하지만 뺄 수 있는게 없다.
가방에는 바퀴가 달려있으니 그냥 가기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다.
전과 달리 설레는 맘으로 잠을 설치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