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Khaosan, Rachada
2007년 12월 31일.
파란만장하고 다사다난했던 2007년의 마지막 날.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고
그저 자고 일어나면 숫자가 바뀌어 있는 것 뿐이지만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에 가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또 삶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물론 마의 아홉수를 앞둔 나에겐 단순히 즐거운 이벤트에만 국한된 게 아니지만.
32일이라고~33일이라고~♬
달리는 시간을 잡아두고 싶지만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게 내 삶의 모토이므로 기꺼이 즐기기로 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까...?
한국이었으면 친구들과 함께 있었겠지? 늘 그렇듯이.
하지만 이번엔 혼자 조용히 자숙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멀리 태국까지 온 것이므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싶었다.
혼자 조용히 시로코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혹은 강변을 산책하며?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카운트다운을?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딱히 와 닿는 것도 없거니와
고민하는 와중에 급격히 배가 고파져서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어떻게 된게 고민만 하면 배가 고프냐고 -_-;;)
나갈 채비를 하다가 문득 태국 간다고 했더니 다들 MK수끼를 꼭 먹어보라고 강추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수끼를 혼자 가서 먹긴 좀 그렇잖아...ㅠ_ㅜ
혼자 육수에 배추 담그고 고기 건지고...아아...생각만 해도 우울한 그림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하고 미뤘었는데
어제 카오산에서 만난 친구, 미우가 마침 오늘 쉬는 날이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매주 월요일 휴무. ㅎㅎ)
미우에게 전화를 했다.
-미우? 지금 뭐해?
-엄마랑 잠깐 쇼핑하러 나왔어.
-점심 먹었어?
-아니 아직.
-엄마랑 먹을거야?
-아니, 엄마는 친구 만나러 가신대.
-오, 잘됐다. 나랑 이따 MK갈래?
-어 진짜? 나 MK 완전 좋아해. 좋아. 같이 가자.
-응, 그럼 몇 시에 어디서 만날까? 근데 나 MK 어디에 있는지 몰라...ㅠ.ㅜ
-쇼핑하고 카오산에서 친구들 잠깐 만나기로 했거든?
카오산 근처에도 MK있으니까 카오산으로 올래?
-응, 그래. 그럼 이따 봐.
와와~다행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드레스업 하고 외출해야지~
한국에서 가져온 8센티짜리 하이힐을 신고 깜장드레스를 몸에 대고 거울 앞에 선 다음,
그 즉시 옷과 신발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깜장드레스와 하이힐, 그리고 지금 내 헤어스타일의 조화는...
마치 샐러리맨이 세일러문 머리띠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삘이었다...ㅠ_ㅜ
어제 카오산에서 산 100밧짜리 원피스를 입어봤다.
우와! 잘 어울린다. ㅋ
거기에 카오산에서 산 슬리퍼를 신었다.
더 잘 어울린다. ㅋ
머리도 마데 인 카오산, 등에 그려진 헤나도 마데 인 카오산,
옷도 카오산, 신발도 카오산. 나...카오산 오타쿠니? ㅋ
그런 차림으로 호텔 로비를 나서는데 주간 리셉셔니스트 언니들이
와, 하루만에 스타일이 확 바뀌었다며 잘 어울린다고 칭찬해줬다. ㅎㅎ
오늘 밤에 클럽 갈거냐길래 아직 잘 모르겠다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괜찮은 클럽 추천 해 달라고 했더니
그 중에서 제일 얌전하게 생긴 언니가 장르별 리스트를 쫙 불러준다. ㅋ
소중한 정보, 감사드리며...미리 새해 인사도 나누고 카오산으로 향했다.
낮에 보는 카오산 로드는 밤에 보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
그치만 역시나. 너무 좋아...........(나 카오산 오타쿠 맞나보다)
맥도날드 앞에서 미우를 만났다.
바스와 보이, 리도 함께였다.
MK가 있는 곳은 기본요금 거리지만 걷기는 좀 애매해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다섯명이서 한 택시를 타려니 뒷자리에 넷이 끼어 탈 수밖에 없었는데
내가 제일 안쪽에 앉고 그 다음 보이가 타려고 하자 바스가 갑자기 보이를 저지하며 미우를 앉혔다.
남자가 옆에 앉는거 내가 불편해 할까봐.
나랑 미우보고 둘 다 살 좀 빼라고 갈굴 땐 언제고. 님하, 매너가 좀 짱이신듯? ㅎㅎ
택시 안에서 미우가 핸드폰을 꺼내더니 폰사진을 보여주는데 왠 스님 사진이 이렇게 많아?
이 사람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자기 남동생이란다. 어제 봤던 봄.
어라? 봄 스님이었어? 어쩐지 모자 쓰고 있더라. 내가 놀라서 묻자 미우는 웃으며
태국 남자들은 스무살이 되면 한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듯이
절에서 잠시 스님이 되어 수행을 한다고 했다.
한국 남자들한테 군대갈래? 절에 갈래?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ㅎㅎ
MK는 멀티플렉스 건물 안에 있었는데 젊은 감각의 깔끔한 컨셉으로
태국 현지인들 뿐만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에게 호응을 얻으며
프렌차이즈 지점을 확장하고 있다. (무슨 홍보멘트 같다. ㅋ)
MK 수끼의 특징은 채소, 새우, 피시볼, 고기, 기타등등 갖가지 고명을
종류별로 취향대로 원하는 만큼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의논해서 서로 좋아하는 재료를 선택하고
그밖에 해초로 만든 그린누들과 양념에 졸인 오리고기 덮밥도 시켰다.
수끼 맛이야 어차피 육수와 재료의 신선도에 달려 있으니 설명 필요 없고
독특한 맛의 소스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엔 여기에 다진 팍치를 넣어놔서 순간 헉 했지만...
팍치 빼고 다시 달라고 한 다음부턴 잘 먹었다.
(개인적으로 팍치는 냄새만 맡아도 미칠 것 같다. 적응 안 됨..ㅠ_ㅜ)
나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태국어 써먹어 본다고 "마이싸이 팍치카-" 이랬더니
애들이 미친듯이 웃는다. 왜그래? 내 발음이 그렇게 웃기냐? ㅠ_ㅜ
하마터면 못 먹고 그냥 넘어갈 뻔 했던 MK수끼.
이 친구들 덕분에 완전 푸짐하게 먹었다.
게다가 더치페이해서 싸게 먹었다. 일인당 200밧.
어찌보면 나 때문에 온 건데 내가 내겠다고 했더니
괜찮다고 굳이 사양하던 아이들. 얘들아, 고마워...ㅠ_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저쪽에 인형뽑기 게임기가 있다. 50밧이었나?
갈고리로 된 것도 있고 동전을 넣고 화면에 나오는 문제를 맞히면 인형이 나오는 것도 있고. ㅎㅎ
일인당 두세판씩 했는데 다 실패하고 바스 혼자 토끼인형 한 개 뽑았다.
그런데 그걸 선뜻 내게 선물로 준다.
난 정말 얘네들한테 해준게 아무것도 없는데...;;
역시 난 인복, 먹을복은 타고난 것 같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해가 져서 어두웠다.
한 해의 마지막 날과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연말이 한여름이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뭐 할거냐고 바스가 묻는다.
일단 몸이 너무 뻐근해서 맛사지부터 받아야겠다고 하니 바스가 잠깐 기다려보란다.
카오산에서 하면 비싸니까 이 근처에 싸고 잘하는 마싸-가 있다고.
그런데 거긴 연말이라 문을 닫았다.
바스가 괜히 나한테 미안해 하길래 괜찮다고 카오산 가자고 했다.
그래서 받게된 타이 마사지. 아니, 허브볼 마사지.
낯선 여자가 내 몸을 만진다는게 좀 이상하기도 하고(남자가 만지는건 괜찮냐 -_-;)
마사지 받을 땐 별로 시원한 줄 모르겠더니
계산하고 밖에 나가니 몸이 확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잠도 솔솔 오고.
태국 현지시각 밤 9시 30분. (한국시각 밤 11시 30분)
한국 친구들에게서 문자와 전화가 오기 시작한다.
새해 복 많이 받고 하는 일 잘 되라고.
여기서 새해 인사를 하니 어쩐지 애틋하다.
누구는 홍대에서, 누구는 종로 보신각종 앞에서, 누구는 부산에서...
만약 한국이었다면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마사지를 받고 나오니 미우일행이 보인다. 날 기다린 눈치다.
미우가 다음 스케쥴을 묻는다.
어쨌든 마지막날은 혼자 조용히 보내기로 했으므로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가겠다고 했다.
(시로코는 슬리퍼 신어서 못 간다 ㅠ)
그랬더니 미우가 택시 잘 못 타서 늦게 도착할 수도 있으니 바래다주겠다고 나선다.
자기네들은 클럽에 가기로 했다며.
그래서 미우 일행과 함께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선 연말 분위기가 나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곧이어 DJ가 멘트를 했다.
그런데 미우가 그걸 듣더니 내게 월드트레이드 센터에 꼭 가야겠냐고 묻는다.
지금 라디오에서 그 쪽 차 엄청 막히고 사람들로 미어터진다고했다고.
아아...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괜히 사람 많은데 혼자 가서 헤매다가 밟혀죽기 싫어서
그냥 미우일행과 조인하기로 했다. (나중에 미우 동생 봄과 그의 여친도 조인)
그래서 가게 된 라차다.
거리 초입에서 흥미로운 불상 발견!
한 손에 피리를 들고 신명난 포즈로 봐선...댄스의 부다인가? 흐...;
제사상도 홍동백서가 아니라 동쪽은 과자와 음식, 서쪽은 과일.
과일도 코코넛, 파인애플 이런것들. ㅎㅎ
그 앞에서 어떤 언니가 분향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물론, 새해 관련 기도였겠지만 불상이 클럽 앞에 있는 관계로...
어쩌면 '오늘 웨이브빨 잘 받게 해주세요...' 이런건 아닐까 잠깐 추측해봤다.
(Leona, 나빠요)
원래는 클럽 Maxx에 가려고 했으나 사람이 많아서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다기에
옆에 있는 클럽 Inch로 갔다.
태국의 클럽은 한국에 비해 규모가 큰 편.
그리고 두 파트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공연클럽, 다른 한쪽은 힙합클럽이었다.
그리고 한국처럼 댄스플로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손님이 오면 직원이 테이블을 가져다 준다.
그러면 그 주위에서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식이다.
클럽 Inch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정자와 난자를 상징하는 조형물.
피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용도인거니? ㅎㅎ
20-30분 가량 기다린 후 직원이 테이블을 가져왔고 아이들은 익숙한 듯
생수와 소다, 조니워커 블랙 한 병을 주문했다.
쿵쿵. 심장을 울리는 비트. 들뜬 분위기.
자, 간만에 몸 좀 풀어볼까?
어라? 그런데 왜 아무도 춤 안춰?
다들 그냥 제자리에 서서 어깨만 살짝살짝 흔들고있다.
친구들한테 춤추자고 했더니 술 좀 마시고 추겠단다.
난 지금 딱 삘 받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언더락잔에 술을 가득 부은 후 원샷하고
먼저 시작했다. ㅋㅋ
잠시 후 사람들이 일제히 취기가 오른 듯 춤을 추기 시작했고...ㅋ
삘 잔뜩 받은 나는 부비부비 춤을 선보였다. -_-;;
그런데. 친구들 순간 당황. ㅋ
여긴 부비부비춤 없는거야? 그런거야? ㅠ_ㅜ
몇몇은 쟤 어디 아픈가봐...이런 시선, 몇몇은 오, 신기한 사람이다. 이런 시선.
보이와 리, 바스에게 부비부비를 권했더니 처음엔 쑥스러운듯 엉덩이를 뒤로 빼더니
나중엔 탄력받아서 내가 피곤하다는데도 계속 춤추자고...ㅋ
재밌지, 그치?
나야 뭐 여기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미친여자처럼 춤을 췄다.
정말 일년치 쌓인 스트레스를 여기서 다 푼 것 같다.
잠시 후.
음악이 멈추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10...9...8...7...6...5...4...3...2..................1!
Happy New Year!
서로 포옹하며 새해 덕담을 나누고 있는데 태국노래가 흘러나왔다.
으하하 그런데 사람들이 다 따라부른다.
엉(봄 여자친구)에게 이거 무슨노래냐고 물어봤더니 새해를 기념하는 내용의 태국 가요란다.
나는 그렇게...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 아주 행복하게 2008년을 맞이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댄스의 부다님도 Happy New Year~!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으로 갔다.
웁쓰! 그런데.
길가에 늘어 선 사람들. 절대 안 잡혀주시는 택시.
클럽데이의 홍대거리를 방불케 하는 풍경.
친구들도 나를 위해 백방으로 택시잡으러 뛰어다녔으나
숙소가 라차다 피섹이라 가까워서 그런지 안태워준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바스가 바이크 택시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마다 할 이유 있겠어?
마침 가겠다고 나서는 기사분이 계셔서 그리로 갔다.
아까 마신 술이 지금 취기가 오르는지...나는 갑자기 바이크를 보자 급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꺄아! 오빠 달려!!
앗! 뜨거!
왠일. 바이크 엔진에 종아리가 닿았다.
친구들이 몰려들어서 걱정하는데 별로 아프지도 않고 언뜻 보니 괜찮길래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바이크에 올라탔다.
괜히 나 때문에 놀란 기사 오빠. ㅋ
오빠도 Happy New Year!
로비에 들어서니 야간 리셉셔니스트 언니들이 웃으며 맞아준다.
남들 다 노는 정초부터 일하고 있다니...부지런한 언니들 같으니라고!
언니들도 Happy New Year!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갑자기 언니가 나를 불러세운다.
-Hey, miss, r u OK?
-Yes, I'm Ok~(딸꾹) Why?
언니가 놀란 표정으로 내 다리를 가리킨다.
What the hell.
종아리에 시커멓게 핸드폰만한 화상 자국이...ㅠ_ㅜ
아아.....
마의 아홉수.......
드디어 시작된거냐.....(덜덜....)
언니가 잠시 기다리라더니 연고를 가져와서 발라줬다.
이불에 안 닿게 조심하라며. 그 마음씀이 고마워서 눈물이 핑돌았다.
태국에서 맞이한 2008년은 내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몸의 흉터를 남겼지만
그와 동시에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사람들과의 추억 또한 남겨줬다.
Leona야,
앞으론 폐끼치고 다니지 말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되자.
Leona,
너도 Happy New Year!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저의 연애이야기입니다.
끈기있게 기다리시면 곧 나올겁니다. ㅎㅎ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