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 낯선, 그러나 낯설지 않은
낯선, 그러나 낯설지 않은
너무 일찍 공항에 도착했나 보다..
비행기 출발 시간 보다 무려 세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느긋하게 출발 수속을 밟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약을 구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하로 내려가 환전을 하는 동안 고민을 많이했다.
한달동안 쓸 돈을 모두 환전 할 것인지,
조금만 환전하고 현지에서 현금카드로 뽑아 쓸 것인지..
'귀찮아, 그냥 운에 맡기고 모두 환전하자...'
잔돈까지 섞어 환전해서 채운 내 벨트쌕은 터질듯 하다.
아직도 두시간 이상 남았다.
항공사 라운지로 간다.
약간의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인터넷으로 시간을 떼우려 했는데
이런...
보안 문제로 컴퓨터를 모두 치웠기 때문에 개인이 소장한 노트북 밖에 쓸 수 없단다..
간식들을 깨작거리며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이럴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빼 둘걸....
아직 한국을 떠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내가 익숙했던 것들에 대한 단절의 시작인가...
적응하기 힘들다..
물 한 병 들고 왔다가, 담배 한 대 피우러 갔다가,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또 담배 피우러 갔다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안절부절 한다.
여기저기 전화라도 할까?
아니다. 쓸데없이 여행간다고 생색내는 것 밖에 더 되나....
'근데 송크란이 다가 오는데 카오산에 방은 있을까?'
'아무렴 방 하나 없을라구'
바람이 다독인다..
출발부터 생각지 않게 만난 '무료함' 이란 복병으로
별 목적의식도 없이, 아무런 예약도 없이 무작정 떠나온 것에 대해 갑자기 불안을 느낀다....
나는 기다림을 싫어한다.
그래서 약속도, 예약이란 제도도 익숙하지 않다.
어느 일정된 약속이 생기면 그 약속시간까지 생기는 모든 스케줄은
그 약속에 맞춰 움직이고 조절해야 그 귀찮은 메카니즘....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예약과 계획없이 움직이는 것은 시간적으로 금전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잖아, 자유를 얻는 댓가는 치뤄야지....'
'그럼, 시간에 대한 구속은 벗어버리자고!'
드디어 비행기 탑승시간이다..
여행하는 동안 피울 담배 한 보루만 산 채 비행기에 오른다.
미리 비상구 좌석을 부탁했던 터라 좀 편하게 갈 수 있겠다.
그런데, 내 맞은 편에는 국내 항공 비행기임에도 태국인 여자 승무원이다..
비행기가 떠오르는 동안 시선을 어디 둬야 할 지 몰라 난감했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눈이 마주치면 어색한 웃음만 짓고...
본 궤도에 오르자
그 태국인 승무원이 일어나 뒤돌아서서 전화기를 들고는 한국어 안내방송이 끝나자 뒤이어 태국안내 방송을 한다.
자연히 내 시선은 정면의, 그녀 엉덩이로 간다.
바람의 일갈!
'너, 엉큼하게 어딜 보는 거야?'
'아냐, 자연스러운 내 시선일 뿐이라고, 일부러 의식하며 외면하는게 이상하잖아.....'
그 태국 승무원의 동그랗게 업이 된 엉덩이는 무척 앙증맞고 이뻤다.
'어디까지나 미학적인 관점일 뿐이지 성적인 관점은 아니거든..'
'성적인 관점과 미학적인 관점은 불가분의 관계 아냐?'
'그럼.... 난 지금 하반신으로 느낀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상반신으로 느끼는 걸 얘기하는 거라구. 됐냐?'
음료수가 나오고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다...
항상 밤비행기만 타고 다녀 이런 노을 빛깔은 처음이다.
눈으로 느끼는 아름다움 중에, 사그러드는 빛 만큼 현란하고 고혹적인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아니, 그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연민이 더해서 일 뿐이겠지.....
그렇게 또 무료한 다섯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한다...
비행기를 나서는 순간,
코를 통해 폐 깊숙히 들어오는 이 따뜻하고 습한 공기....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그래, 또 왔구나..
항상 이렇게 첫숨을 들이키면 묘한 설렘과 흥분으로 가슴은 뛰고,
미소가 절로 나온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배낭을 찾아 매고 2층 7번 출구를 찾는다.
임대폰의 300 바트짜리 카드를 사서 판매하는 직원에게 충전을 부탁한다.
그리고 다시 1층 맨 왼쪽 출구로 가서 공항버스 티켓을 사고
AE2 공항버스를 기다린다..
대중교통은 처음이다..
주위를 돌아보니 실크처럼 얇고 통넓은 반바지 차림의 독일인 둘이 뭔가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고 있다.
내가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이자리...
한낱 스테인레스로 만들어진 이자리...
주체하지 못하는 호기심으로
얼마나 많은 여행자들이 여기서 설레임을 안고 기다렸을까..
방콕이 아시아 여행의 허브인 만큼
아마도 이 세대의 내로라하는 배낭 여행자들이라면 이 자리에 앉았다가 갔겠지?
그들은 똑같은 곳에 와서
무엇을 가지고 갔을까?
저 독일인들은 무엇에 대해 토론중일까...
시시콜콜한 궁금증이 인다...
20여 분을 기다리자 버스가 왔다.
승객은 나와 서양인 커플 2명..
버스가 달리는 동안
혹시 눈에 익은 건물, 거리라도 나타날까
쉴새없이 고개를 돌려보지만
어둠 속의 시내는 여전히 낯선 풍경만을 선사한다.
막힘없이 시내를 가로 질러 달려온 버스는
카오산로드 아래 정류장에 세 사람을 내려준 뒤 바삐 떠나버린다..
함께 내린 서양인 커플도 어디론가 사리지고
스노클링 장비까지 묶은 배낭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잠시 길 잃은 아이처럼 주위를 둘러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드디어...
이곳은 여행자들의 숲...
함께 온 바람은 흥분해서 저 속으로 달려가 사라진지 오래지만
설렘도 잠시,
내 배낭은 무겁고, 벨트쌕 속의 돈다발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일단 숙소부터 잡고
사냥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하기로 한다.
더 걸어 올라가 람푸뜨리 골목으로 접어든다.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맘 속으로 찜해 둔 게스트하우스는 있다.
다른 이유는 없다.
환전을 할 때 많은 현금이 부담이 돼
안전금고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이 떠오른 것 뿐이다...
"얼마죠?"
"850바트."
헉, 아무리 곧 송크란이라지만 너무 비싸다..
"6박을 할건데 좀 깎아 줘요"
"그럼 하루 840바트."
'장난해? 걍 다른데 가자...'
바람이 부추긴다
'안전금고가 있는 다른 게스트하우스는 모른단 말야..'
'븅신.. 글게 돈은 왜 전부 환전을 해와가지구...'
먼저 방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름 깔끔하다..
계산하고 방에 들어와 짐을 푼다.
그런데 너무 좁다..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인데, 모든 게스트하우스가 이렇게 좁나..
한 2박만 하고 다른 곳도 좀 알아볼 걸...
하지만 내 귀차니즘은 상상을 초월한다.
원래 한 4박만 하고 깐짜나부리로 뜰려고 했으나
많은 돈을 소지한 채 초반에 많은 곳을 이동하는 것도 귀찮았고
짐을 풀고 싸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데 잠자리 만큼은 좀 까탈스러운 편이라 맘이 편치않다.
앞으로 배낭여행객 모드로 여행하자면 모든 숙소들이 그리 맘에 들지는 않을텐데..
그렇다고 혼자 머물면서 숙소에 돈을 퍼붓는 것도 아까운 일 아닌가..
처음으로 동행이 없는 것에 대해 아쉬운 한다.
샤워를 하고 밖으로 나와 땡모반을 하나 사들고
다시 로비에 들어와 쓴 돈과 일정들을 정리한다...
(저 부채..
중국과 몇 차례 동남아 여행을 할때면 늘 함께한 내 동무이자 부적이다..)
첫날 밤이다..
혼자 술 마시는 걸 지극히 싫어하지만
여행시작의 자축과 무사한 여행을 위해 그냥 잘 수는 없다.
방콕바였던가..
태국은 여러가지 맥주가 명물이지만
나는 맥주를 못마신다...
소음인중에도 극소음인 체질이라 차가운 성질의 맥주를 많이 마시면
속에 탈이 난다.
그래서 위스키 온더락을 한 잔 시키고
멍하니 술 잔만 바라본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혼자 앉아있자니
갑자기 몰려드는 회의...
'내가 지금 뭐하러 여길 혼자 와 있는 거지?
내가 뭣때문에 외롭게 여기서 청승을 떨고 있는 거냐구..'
항상 여행동료들과 함께하며 웃고, 떠들고 즐거웠던 여행..
혼자 떠나오며 각오는 했지만 어쩐지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미칠 지경이다..
'진정해, 대책없는 친구... 뭘 하러 온 게 아니라 이제부터 고민하라구. 나중에 무얼 가지고 돌아가고 싶은지....'
이말만 던지고 무책임하게 바람은 사라지고
술 몇 잔을 비운 내 머릿속에는 밤새 온통 비만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