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Phi Phi
세상에는 파라다이스, 혹은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 너무 많다.
대표적으로 몰디브, 보라보라 등 태평양 연안의 섬들이 있을테고
태국만 보더라도 꼬따오, 안다만의 시밀란 등 여러 곳이 있다.
그런 곳들에 비하면 피피섬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피피섬은 환상의 섬이며 신이 주신 선물이며
생각만해도 심장에 나비가 앉은 듯 가슴이 파르르 떨리는
아련한 추억의 장소이다.
푸켓에서 배를 타고 약 한시간 반.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더니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2층 갑판대에 올라가 있던 나와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은
비를 피해 아래층 선실로 들어갔다.
선실 유리창으로 마치 걸리버 여행기 삽화에나 나올법한 신비한 풍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피돈 선착장.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배를 탄 나는
이 빗속에서 숙소를 구할 생각에 잠시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선착장에 발을 딛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치고 햇살이 다시 따갑게 내리쬐었다.
서울에서 방콕으로, 방콕에서 푸켓으로.
잘 닦인 길만 딛고 다니던 내게 맨발로 모래바닥을 걸어다니는 피피섬의 주민들은 낯설었다.
니스에서 싼 값에 산 낡아빠진 중국제 대형 여행가방을 끌고 섬 안으로 들어갔다.
가뜩이나 언제 부서질지 몰라서 불안불안한데 모래밭이라 잘 굴려지지도 않는다.
다들 예약한 숙소 직원들이 리어카를 끌고 나와서 짐을 실어주는데
나만 혼자 낑낑대며 짐가방을 들고 걸어갔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와서 물었다.
-숙소 예약했어?
-아니.
그러자 곧 사진이 덕지덕지 붙은 나무판자를 들이밀며 얼마짜리 방을 원하냐고 묻는다.
-제일 싼거. 무조건 제일 싼거.
(품삯 입금이 한달 뒤로 늦춰져서 예산이 빠듯하다)
남자는 난색을 표하며 책자를 뒤적였다.
책자에 적힌 숫자를 보니 죄다 3000~7000밧이라고 적혀있다.
-대체 어느정도로 싼 걸 원하는건데?
-글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일 싼거.
-음...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선착장 한켠에 있는 어떤 장소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엔 피피섬의 다양한 숙소 사진과 금액이 적힌 나무판자가 있었다.
-이 중에서 골라봐.
사람 욕심이...좋은 걸 보면 그보다 못한 건 취하기 싫어지는 법.
게다가 늘 그렇듯 마음에 드는 건 죄다 비싸다.
결정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이 남자, 바쁘게 여기저기 뭔가를 물어보고 다닌다.
그러더니 미안한데 사진에 있는 숙소들 다 꽉 차서 방이 없단다.
극성수기. 젠장.
여기서 또 노숙해야 되는거냐....ㅠ_ㅜ
-우리집에 올래? 내 침대에서 나랑 같이 자자.
남자가 말했다.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입술을 찢어 미소를 만들며 말했다.
-고맙지만 정중히 사양할께.
남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다시 이리저리 책자를 뒤지며 무전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밝게 웃으며 말했다.
-헤이, 방 하나 났대. 방금 첵아웃했대.
하하하...
굿 타이밍~!
거지도, 노숙도 팔자에 있어야 한다듯 역시 어딜가든 내 한 몸 누일 데는 있구나.
푸켓에서도, 피피에서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첵아웃 해 주신 분들, 누군진 모르지만 다들 쌩유~!!
복 받으실 거에요~!
숙박비는 하루 1500밧. 더 싼 방은 없단다.
여기서 2박3일 있다가 끄라비로 갈 계획이므로 우선 이틀치를 먼저 계산했다.
남자와 함께 롱테일 보트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남자가 숙소에 대해 설명했다.
거기 화장실은 밖에 있고 핫 샤워는 안돼...어쩌고 저쩌고....
-으악. 안돼. 다른건 몰라도 나 찬 물에 샤워 못한단 말야...
-어쩔 수 없어. 방이 이거밖에 없는걸. 그래도 거기 되게되게 멋있어.
산속에 있는데....블라블라...
핫샤워 안된다는 말에 충격받아서 나머지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하아....
유일하게 예약하고 갔던 방콕의 숙소가 그리워...
누굴 탓하겠니. 다 내 탓이오.
눈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 지 전혀 짐작도 못한 채 숙소로 향하는 길.
잠시 후.
화장실은 밖에 있고 핫샤워도 안되지만 그나마 피피섬에서 하나 남은 숙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피돈 선착장과 롱비치 사이의 움푹 들어간 곳에 단독으로 자리하고 있는 곳.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배에서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라....?
여기.....괜찮은데?
(그 남자는 눈치도 없고 개념도 없을 뿐더러 장사에도 소질이 없나보다.
나같으면 여길 훨씬 더 좋게 묘사했을텐데. 단점부터 얘기해버리다니;)
남자는 어이없어하는 나에게
오늘밤, 찾아갈께. 라는 헛소리를 또 한번 지껄이고는 배를타고 떠났다.
레스토랑 겸 리셉션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방을 안내받기로 했다.
직원이 내 가방을 어깨에 들쳐매고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그.런.데.
헉......!!!!!!
나보고 지금 여길 올라가라는거야?
60도 각도의 비탈진 산 길.
나무 뿌리를 잡고 헉헉대며 거의 기다시피 해서 근근히 올라갔다(산 타는거 질색이다)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나를 보고 직원은 사람들이 으레 그런 반응을 보인다는 듯 웃으며
이건 지름길이고 편하게 돌아 내려가는 길이 있으니 좋을대로 이용하면 된단다.
그렇게 안내받게 된 방. 아니 집?
정확히 말하면 방갈로.
(선착장의 그 남자는 여기가 방갈로라는 것도 얘기 안해줬다)
역시 누군가 방금 첵아웃을 하고 나간 듯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방 정리를 마무리하느라 분주하다.
잠시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한 발 내 딛었다.
그리고 나는.
이 방갈로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방 내부를 우선 보자.
사진을 너무 대충 찍은 티가 난다;;
어쨌든.
네츄럴하면서도 아기자기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담요 하나, 사소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쓴 티가 나는 너무 멋진 방.
사진엔 자세히 안보이지만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이며 거기 놓은 조명이며...
전부 독특하고 게다가 꽤 고급스럽고 엔틱한 것들이다.
뿐만아니라 내 맘을 단숨에 사로잡은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방 문을 열면 바로 이런 풍경.
해변에 해먹을 걸쳐놓고 누워서 잠자는 것이 내 평생 로망이었다.
그게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단 말이다...ㅠ_ㅜ
아무런 노력 없이 이런 멋진 숙소를 얻게 되다니...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니.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곧바로 해먹에 누웠다.
부드러운 바람, 바람에 실려 사뿐히 내 귓가에 내려 앉은 밥 말리의 노래 소리...
멀리 보이는 쪽빛 바다...오후의 햇살...
흔들 흔들...해먹을 요람 삼아 드러누워 눈을 감으니
죽어 천국에 가면 천국이 여기겠구나. 싶었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아무리 여름이라도 산 속이라 살짝 한기가 들어 손바닥으로 팔을 쓸어내리며 일어났다.
그러고보니 밥 때가 지났네.
아래로 내려갔다.
이번엔 좀 더 자세히 보자.
아...이 숙소 이름이 바이킹 리조트였구나...(이제 알았다;)
이런저런 사람들로 북적이는 다른 해변과 달리 이 곳의 해변은
오직 숙소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마치 전용 풀장같았다.
얼핏 보기엔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질서정연한
해변의 테이블, 비치 체어, 식물...모든 걸 꼼꼼하게 신경 쓴 티가 났다.
리셉션으로 가서 메뉴판을 뒤져 음식을 주문했다.
치킨 캐슈넛과 피나 콜라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놓인 테이블에 앉아서 밥을 먹는데...
야옹이가 폴짝. 내 무릎에 와 앉았다.
꾸륵꾸륵꾸륵...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발 아래를 보니 닭도 있다. ㅎㅎ
안녕? 하고 닭에게 인사를 하자 닭도 폴짝. 내 옆자리로 뛰어 올라왔다.
밥을 한 술 뜨려는데 야옹이가 슈렉냥이 눈빛으로 나를 본다.
너도 배 고프구나?
닭고기를 조금 뜯어서 손바닥에 얹어 야옹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야옹이는 냄새만 맡더니 고개를 휙 돌리고 바닥으로 내려갔다.
어라? 우리집 야옹이들은 없어서 못 먹는 닭고기를...왜 싫어하지?
다시 밥을 한 술 뜨려는데 야옹이가 내 옆자리로 와서 앞 발로 옆구리를 톡.톡. 건드린다.
-왜? 닭 싫다며?
-아이, 닭 말고 저거.
-닭 말고 뭐? 캐슈넛?
-아니아니. 그거 말고. 쳇. 바보.
야옹이 눈이 가리키는 건 다름아닌 밥.
-뭐? 너 밥먹고 싶은거야?
설마 하면서 밥 몇 톨을 퍼서 입에 갖다대줬다.
하하...이럴수가.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계속 더달라고 옆구리를 찌른다.
꾸륵꾸륵꾸륵,
닭도 내 옆으로 와서 뭔가 요구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설마...하며 닭에게도 밥을 줘봤다.
잘 먹는다.
어머...너네들 베지테리언이냐. ㅋㅋ
나 한 입, 야옹이 한 입, 나 한 입, 쿠쿠 한 입.
사이좋게 오손도손 밥 한접시를 비웠다.
여행 후 모처럼...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었다.
피피의 해질녘.
잠깐 해변을 거닐다가 밖으로 나가긴 늦고 방으로 가자니 일러서
레스토랑에서 맥주 한잔을 하기로 했다.
푸켓에서 먹지 못한 용과를 여기서 먹으며...(용과,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ㅠ)
여행 일기도 정리하며...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기타 소리가 들린다.
이 곳 직원으로 보이는 태국남자가 기타를 연주하고 또 다른 한 남자는 콩가를 두드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내 방을 안내해줬던 매니저 몽을 비롯, 여기 직원들이 꽤 많다.
다들 20대 중후반 젊은 남자들이다.
태국의 다른 곳 남자들과는 약간 분위기가 다르다. 확실히 남국풍이라고나 할까.
헐렁한 마 소재의 바지에 상의는 민소매, 혹은 아예 안 입었거나.
모기향에 불을 붙이며 돌아다니던 마른 몸매의 남자아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물론 시작은 Where r u from?
몇 살이냐, 무슨 일 하냐, 왜 혼자 왔냐...등등 통성명과 간단한 호구조사를 마친 뒤 그애가 말했다.
-피피섬에 온 걸 환영해. Have fun 하다가 가. 여긴 그러라고 있는 곳이야.
아참, 그리고...혹시 마리화나 필요하면 얘기해. 널 위해선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아이고. 됐거든?
담배도 못 끊어서 힘든데 더 보태고 싶지 않아.
피피섬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이것은 나의 또 다른 연애 이야기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