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ped moment @ Somewhere in Phuket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 얼굴과 온 몸이 눈물, 콧물,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여름 밤의 포근하고 상쾌한 바람이 내 볼을 닦아준다. 개운하다.
여름 밤의 바람 냄새는 언제나 날 설레게 한다.
첫사랑을 여름에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미 해가 져서 사방이 캄캄하다.
까론까따와 나이한은 내일 가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전히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지만 가다 보면 나오겠지 싶어 무작정 엑셀을 밟았다.
참 웃긴게...
그렇게 찾을 때는 없던 주유소가 한 집 건너 한 집 꼴로 보인다.
역시 마음을 비우면 안 보이던 게 보이나보다.
그 동안 욕심에 눈이 멀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못 보고 살았을까.
앞으론 아등바등 하지 말고 좀 편하게 살자.
아참, 기름 값은 한 칸 남은데서 가득 넣었는데 500밧.
으음...태국 좀 짱인듯.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빠통비치에 도착했다.
거봐, 어떻게든 될 거랬잖아.
이래저래 심신이 지쳐 간만에 기름진 식사를 해야겠다 작정하고
빠통에서 제일 크고 북적거리는 사보이 레스토랑에 갔다.
입구부터 벌써 사람이 꽉 차서 줄서서 들어가야했다.
줄서서 기다리면서 찍은 레스토랑 입구.
진열 돼 있는 생선을 고르면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오픈키친에서 바로 조리해서 주나보다.
생각 같아선 랍스터를 먹고싶었으나...
역시나...혼자 먹긴 부담스러운 관계로...패스.
(혼자 여행의 단점은 한번에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문한 것은...
아래에...
양송이 슾과 비엔나 와인소스의 서로인 스테이크,
그리고 신혼부부들이나 마실법한 칵테일, 스페셜 마이타이.
가뜩이나 생긴것도 부담스러운데 빨대가 두개인게 마음에 안들어서 하나 빼버렸다.
(솔로천국, 커플지옥)
천천히 음미하며 고기를 씹어삼키고 있는데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도 신혼부부, 저기도 신혼부부, 저기는 게이 커플.
다들 혼자 밥 먹고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자기네들끼리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혼자오면 이런데서 밥 먹으면 안되냐! -_-;
스테이크를 반쯤 먹었을 때 왠지 더 먹으면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양도 많기도 했고. (맛은 not bad)
계산을 하려고 종업원을 부르려다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지갑을 확인해봤더니...
이런, 젠장. ATM에서 돈을 안 뽑아왔다.
(해외 현금카드는 체크카드 기능 안 되고 신용카드는 사용 안한다;;)
누군가 같이 왔다면 전혀 문제 될 상황이 아니었지만 나는 혼자란 말이다...ㅠ_ㅜ
밥 값보다 더 비싼 카메라와 mp3가 들어있는 가방을 둔 채
직원에게 얘기하고 얼른 갔다오긴 했지만
고새를 못참고 내 자리 주변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 직원들을 보니 참...어이가 없었다.
왜, 556밧 땜에 도망갔을까봐? -_-;
식당의 손님들도, 직원들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심사가 꼬여 있으니 매사가 부정적으로 보였다.
1월 3일. 오늘 하루를 요약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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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푸켓 백팩커스에서 첵아웃하고 버스타고 가다가
용과를 냉장고에 두고 온 걸 뒤늦게 알아챔.
(게다가 이틀전에 맡긴 빨래를 직원이 까먹고 안해놔서 한소리 했더니
부랴부랴 지금 해준다며 기다리래서 한참 기다림.
세탁비도 바가지 씌웠음. 원피스 세개에 150밧. 하하...)
점심-새로 잡은 숙소에서 짐을 풀며 빨래 가방을 열어보고 경악함.
옷은 다 쭈글쭈글. 아끼는 원피스의 단추 여섯개가 모조리 다 떨어져있음.
미안하단 말도 없이 옷 속에 몰래 집어넣어놨음.
오후- 원래 1월 5일날 들어오기로 돼 있었던 내 품삯이 결제가 늦어져서
한 달 뒤로 미뤄졌다는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음.
(덕분에 홍콩 일주일 스탑오버 하기로 한 거 취소시킴)
저녁- 모처럼 비싼거 먹으러 갔다가 ATM에서 돈을 안뽑아와서 빈대떡 신사 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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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일진 참....-_-;
오늘은 더 돌아다녀봤자 좋을 거 없겠다 싶어서 일찍 숙소로 돌아갔다.
하루종일 꼬인 일진 때문에 다크포스를 풍기며 숙소에 도착.
리셉션 겸 카페에 앉아 극빈자 모드 여행으로 일정을 고치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 총각이 술잔을 내밀었다.
아까 오후에 내가 여기 칵테일은 안 파냐고 물었는데
주인 총각이 맥주만 판다고 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어쨌는지...나 주려고 만들었다며...
난생 처음 만들어 본 칵테일인데 맛이 어떤지 마셔보고 얘기 해달라고...
오렌지 주스와 말리부 럼을 적당히 섞은 칵테일 맛은
상큼하고 부드러웠다.
너무 맛있다고..고맙다고 했더니 쑥스러운 듯 웃으며 사라진다.
주인 총각의 순박한 마음 때문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날 처음으로...웃었다.
*
다음 날.
밤새 잠을 설쳤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우르릉....쾅!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눈을 떠 보니 눈 앞에 바다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살려달라는 비명소리, 몰아치는 파도. 무너지는 건물. 나무 판자들. 개도 있고.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어떤 남자의 절박한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상이 밤새도록 나를 괴롭혔다.
꿈이 아니다. 눈을 뜨고 있었으므로. 가위 눌린 것과도 조금 다르다.
(신기 있는거랑은 좀 다른데...가끔 내 눈에 이런게 보인다)
퀭한 몰골로 로비로 내려가니 주인 총각이 굿모닝-이라며 인사한다.
-아니...잘 못 잤어.
저기...미안한데 혹시...여기 게스트 하우스도 쓰나미 때 피해 입었었어?
-응. 그 때 다 휩쓸렸다가 다시 수리한거야.
-아...그...그래...?
-왜?
-아무것도 아냐.
-아참, Leona. 이따 11시에 다른 방 손님 첵아웃 하는데 창문 있는 방으로 옮겨줄까?
-아...아...아....음.....응. 그렇게 해줘. 고마워.
-뭘, 그런 걸 가지고.
사실 방이 아니라 숙소를 옮기고 싶었으나 어차피 다음날 피피로 떠날 예정이고
방을 옮기면 혹시 괜찮아 질 지도 모르니까...사실 다른데 알아보기 귀찮기도 하고.
(옮긴 방은 훨씬 쾌적하고 좋았으며 쓰나미 영상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반드시 안 헤매고 까론까따에 가고 말테야.
주차장으로 갔다. (주차비는 일일 40밧)
햇빛에 노출돼 프라이팬이 돼 있는 차를 식히고 그 안에서 떡이 돼 있는 커피를 버리고 출발.
15분만에 까론까따 비치에 도착.
(혼자 놀기의 결정판. 타이머+연사 설정해놓고 딴짓하기.
이거 은근 중독성 있다. ㅎㅎ)
자, 이제 나이한으로 가 볼까?
그러나.
뭐 또 당연하게도 길을 잃었다.
근처 주유소에 들러서 길을 물었더니 직원, 사장, 손님, 심지어 경찰까지 와서
다들 아는 단어 총동원 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는데 한 20분간 듣고 있어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서 그냥 고맙다고, 다 알아들은 척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한 시간 동안 이 주유소 5번 봤다. -_-;;
아무리 다른 길로 가도 계속 이 주유소가 보였다. 신기루 주유소인가? ;;
한 두어번은 다들 날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줬지만 세번째부터는 서로 민망해서 외면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 곳을 벗어나긴 했으나...또 영웅자매 동상을 보고 말았다.
나이한 가는 건 애저녁에 포기하고 빠통비치라도 잘 찾아가자 했는데...
또 4시간 정도 해맸다.
그러다가 너무 피곤해서 어느 한적한 마을에 차를 세우고
마침 아무도 없길래 셀카놀이를 했다.
(다리에 화상자국이...ㅠ)
(본네트 위에 삼각대 얹어놓고 타이머 설정해서 찍은 것. 그래서 사진이 기울었다)
하하...그런데 문제는...
어딘지도 모르는 이 마을이 푸켓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는 거다.
이름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어느 집 앞마당에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다가갔다.
-Excuseme. I'm lost. how can I go to paton beach?
아아...못 알아듣는다.
푸켓 지도를 보여줬다. 여기요. 빠통비치.
지도를 보더니 자기들끼리 태국어로 한참 얘기를 한다.
그러더니 뭐라고 하는데 빠통비치는 멀고 까론까따가 가깝다고 하는 것 같다.
길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또 뭐라뭐라 설명을 하는데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내가 계속 못 알아듣고 있으니까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기다리란다.
그러더니 집 안에 들어갔다가 어떤 여자애 두 명을 데리고 나온다.
그리고 한참을 서로 더 얘기를 하더니 그 중 한 명이 스쿠터를 타고 안내 해 줄테니 따라가란다.
와...너무 고마워요.
잠시 기다리는데 여자애가 난감한 표정으로 뭐라뭐라 말을 한다.
들어보니 스쿠터에 기름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 같다. ㅠ_ㅜ
그래도 이렇게 성의있게 도와주려고 하는 게 어디야.
어쨌든 너무 고맙다고 하고 돌아서는데 아저씨가 다시 나를 불러세운다.
그러더니 다른 여자애가 차에 타고 안내를 해 주겠단다.
너무 고마운 사람들.
여자애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가만 보니 이 아이, 뭘 먹었는지 치아가 온통 새카맣다. 그리고 신발도 안 신었다.
-몇 살이야?
-16살.
-아까 그 사람들은 가족?
-아니. 가족 아니야.
(그럼 뭐지? 궁금했으나 안 물어봤다)
-음악 좋아해?
-응
-어떤 음악 좋아해?
- ..... (뭔가 말하고 싶지만 설명 못하는 것 같다)
오디오 볼륨을 올렸다.
헤어스프레이 ost가 나오고 있었다.
이 아이, 하품한다.
재생목록을 검색해서 제니퍼 로페즈를 틀었다.
음악 좋다며 고개를 까딱까딱 박자를 맞춘다.
-음...좀 춥지 않니? 에어컨 끄고 창문 열까? (난 에어컨 바람 싫어한다)
-아니, 좋아. 굿 굿.
내 팔엔 소름이 돋았는데 이 아이는 완전 좋아한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렇게 15분쯤 갔을까. 까론까따 비치가 나왔다.
차에서 내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택시 타고 가라고 준비한 돈을 건네려는데 갑자기 이 아이, 바이크 택시기사에게 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더니 나한테 300밧을 달라고 했다.
어차피 500밧 준비해놨기 땜에 그걸 줬다.
잘 가라고 인사를 하려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가버린다.
바이크에 올라탄 그 애는 깔깔깔깔~묘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떠났다.
하아....그냥 한 천 밧 정도 달라고 하지 그랬니.
뭐 어쨌든 그 사람들 아니었음 여기까지도 못 왔을텐데 고맙게 생각하자.
고마워, 이름모를 소녀.
그래서 해질녘에 본의 아니게 또 가게 된 까론까따 비치.
배고파서 들른 푸켓 아일랜드뷰 호텔에 있는 야외 레스토랑.
소고기 스테이크 샐러드와 치킨 캐슈넛, 그리고 피나콜라다를 주문했는데
스테이크 샐러드는 손도 못댔다. 골라도 골라도 계속 나오는 그득한 팍치 땜에...ㅠ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빠통비치로 향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살아 돌아왔구나...ㅠ
오늘은 푸켓에서의 마지막 밤.
살아 돌아온 것도 기념할 겸 간단히 맥주 한 잔을 마셨다.
방라로드는 여전히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안녕, 꺼떠이 언니들.
안녕, 신혼부부들.
안녕, 착한 몸매 오빠들.
안녕, 쏘이 에릭.
사실 이 곳은 신혼여행 등 패키지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혼자 가기에 그리 좋은 곳은 아니다.
상대적인 외로움을 부추기는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비록 외롭고 재미없고 두려울지라도
살면서 이런 절대 고독을 한 번쯤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오롯이 혼자만 있게 될 때 비로소 자신도 몰랐던 마음 속 깊은 얘기가 들리게 될 것이다.
*
다음날.
그 동안 정들었던 완소 유로델리 레스토랑에서 마지막으로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먹었다.
이 집은 어떻게 된 게 뭘 먹어도 맛있는거냐!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음식 하나하나가 간이 너무 잘 맞았다.
(요리는 밸런스야! -우리 어머니 말씀)
편의점에서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너무 웃긴 껌을 발견!
저 남자, 어쩜 좋아. ㅋㅋㅋ
그 동안 정들었던 차를 반납하기 전에 빠통비치를 바라보며 한 컷.
수고했어. 키트.
(또 화상 흉터...ㅠ)
차 반납하고 돌아와서...
피피가는 배 타기 전에 시암 게스트하우스 주인 총각과 기념사진.
같은 골목에 있는 여행사의 일본인 여주인을 남몰래 사모하고 있는 것 같던데 부디 좋은 결과 있으시길!
피피 가는 배.
자, 드디어.
내 여행의 하이라이트!
피피섬이다!
-이것은 나의 또 다른 연애 이야기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