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ny-1년전 여행일기 #2
결국 비행기에서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머니 한분이 옆에 앉으셨다. 이상하게 EVA 항공의 기내식은 냄새만으로도 나를 힘들게 한다. 반년전 기내식을 먹고 비행하는 내내 속이 메슥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미리 채식자 식단을 주문했었다.
채식자 식단도 그 전의 기내식에서 고기만 뺀 똑같은 메뉴였다. 옆에 아주머니께서 타이페이 공항에 도착하기 1시간 전에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보신다.
" 학생 어디 아픈거야? 밥도 혼자 다른거 먹고, 그것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 아. 예. 이건 채식자 식단이구요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한 거에요. 중국음식이 비위에 않맞아서 못먹은 것 뿐이에요."
드디어 물꼬가 터졌다. 호구조사가 시작됐다. 어디를 가느냐 부터 나이와 직업까지. 나중엔 고마웠다. 메슥거림이 이야기를 하면서 없어지기 시작했다.
공항에 도착하면서 LA에 가신다는 아주머니를 Transfer 하는데까지 모셔다 드리고 면세점을 구경하였다. 구경할건 없었지만 시간을 때워야 했다.
또다시 기대가 무너졌다. 방콕행 비행기 옆 자리는 중국계 아저씨였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한자가 가득찬 신문을 읽고 계셨다. 저런 신문을 본다면 나는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나의 비행기 이용 사상 처음으로 기내식을 거부했다. 대신 스프라이트를 한캔 달라고 해서 주변 사람들이 기내식을 먹는 동안 컵에 코를 박고 탄산을 흡입했다.
수안나폼 공항에 도착했다. 매번 돈무앙 공항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것도 혼자인 나에게 새로운 공항은 도전 과제였다. 공항 지도를 펴고 여행 동행자가 있으면 상상도 못할 공항 투어를 시작했다. 다음에 또 올텐데 미리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셔틀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표를 구매하는 것으로 생각한 나는 매표소 처럼 생긴 곳에 가서
" 씨암 가는 버스표 주세요." 했다.
나의 태국어 실력은 숙박업소에 가서 가격을 알아낼 때까지 현지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딱 그정도 실력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
아저씨가 나오신다. 지도를 가지고 나오신다. 순간 흠칫했다.
'여행사 직원이 아닐까?' 귀찮아 질 수도 있는 순간이다.
하지만 아저씨는 씨암에 가는 버스는 없고 전승 기념탑에 버스를 타고 가서 갈아타라고 말씀을 해주신다. 시계까지 보시면서 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당부도 하시면서.
버스 가격을 물어보았다. 아직은 여행 초기이다. 초기에 바가지를 쓴다면 여행 기분을 망치기 때문에 가격을 항상 알아두어야 한다. 삼십몇밧 할거라고 하셨다.
버스 출발이 조금 남아서 터미널 의자에 앉아 있는데 몇몇 유러피언 사람들이 나 여행객이요 하는 차림새와 나 여행객이요 하는 유창한 영어로 나 여행객이요 하는 목적지인 카오산 로드 가는 버스를 물어본다. 아저씨가 "노 버스" 하신다. 전승 기념탑에 가서 택시를 탈수도 있다는 정보를 줄까 말까 하는 사이에 나 여행객이요 하는 태도로 택시를 타야겠다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역시나 이번에도 어려움에 처한 괜찮은 이성 여행자는 없었다. 전승기념탑에 가는 버스는 신기하게도 공항 1층을 들러서 출발하였다. 셔틀버스를 탄 보람도 없이. 아니다.. 보람은 있었다.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EVA 항공의 방콕 도착시간이 새벽 1시 정도여서 공항에서 시간을 때운 뒤 버스 시간도 천천히 알아보고 최대한 늦장을 부려서 5-6시 사이에 씨암 근처에 도착을 하면 early check in이 가능한 국립 경기장 옆의 숙소에 check in이 가능하겠다는 계획을 했었다.
그러나 무엇에 홀린듯 허둥지둥 대다가 너무 일찍 버스를 타버렸다. 게다가 전승 기념탑을 가는 버스는 너무도 너무도 빠르게 이동했다. 고속도로까지 이용하면서 3시가 넘어서 나를 전승기념탑에 내려놓았다. 한밤중의 전승기념탑은 무서웠다. 국수 노점들도 다 철수하고 이렇게 여행자 같은 배낭을 메고선 돌아다니기엔 너무 허술해 보인다.
이전부터 현지인들은 가방을 잘 메고 다니지 않는 것을 느낀 나와 사촌은 항상 여권 복사지와 일정 현금만 들고 가방은 없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것을 행동 수칙처럼 정해놓았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파리떼처럼 붙어대는 호객꾼들에게 지치고 지친 결과였었다.
" 마분콩 가고 싶어요." 하자.
택시 기사 아저씨는 친구들과 호탕하게 웃어댄다. 아주 대충 옅듣자면 외국인이 태국어를 하는 것에 대한 기분좋은 웃음인듯 했다.
" 요즘 방콕 날씨는 어때요?" 내가 물었다.
" 비가 많이 와." 하신다.
그 뒤로는 20% 정도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계속 하신다.
까올리 라고 하자 대장금 이야기부터 꺼내신다. 대장금 시간엔 길에 차가 별로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아슬하게 남은 잔돈을 안받고 택시에서 내린다음 숙소로 향했다.
"체크인 가능하나요?" 물었다.
"12시에 체크 아웃해야한다." 고 한다.
내일 12시에 체크 아웃하려면 언제 체크인 해야하냐고 하니깐 9시라고 한다. 그새 바뀐것은 100밧 가량이 올라간 숙박비 뿐만이 아니라 체크인 타임 까지 였다.
일단 나왔다. 약간 막막해졌다. 허둥지둥 대다가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일단 7eleven에 들어가서 물을 사먹었다. 좀 더 버티다가 라차다 쪽의 숙소로 갈까 고민을 하였다. 일단 카셈산 거리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숙소마다 early check in이 가능한지 물어보기로 했다. 들어서기가 무섭게 "no room" 한다.
러브 모텔같은 숙소를 마지막으로 들어설때가 4시 30분 경이였다.
" 체크인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 6시 입니다."
아.... 여행 초기부터 꼬인다 싶던 생각이 눈녹듯 사라진다.
옆에 소파에 앉아서 여행책자를 보며 6시를 기다렸다. 5시 30분쯤 되자 키를 주면서 체크인 가능하다고 한다. 숙소는 정말 낡았다. 침대 메트리스의 소재는 무슨 지푸라기 같기도 하고 코코넛 껍질 같기도 한 충진물에 가운데가 푹 꺼져 있는 최악의 상황이였다.
샤워를 하고 누웠다. 2분도 안돼어서 까슬까슬한 메트리스의 충진물이 등을 찔러왔고 허리가 아파왔다. 꺼지지 않은 침대의 가장자리로 가서 덮는 이불을 한층 더 깔고 새우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래도 early check in 의 매력을 한번 느껴본 사람은 담배에 중독되듯이 계속 끌리게 된다. 잠을 자고 12시쯤 일어나면 하루 숙박이 더 남았다는 행복감과 1일치의 숙박비로 2일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금전적인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 12시쯤 일어나면 마분콩의 꼭대기 층에서 인터넷을 하면서 처음 갈 여행지를 물색해야 겠다.'
타이페이 공항의 뚱뚱이 네스카페 음료수. 귀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