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1일-여행중 하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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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11일-여행중 하루의 일기.

퍄퍙 5 1135

처음 혼자 한 2주간의 여행중 하루의 일기입니다.
2주간 매일매일 쓴 글이 있지만.. 하나만 올려요.
혼자 솔직하게 쓴 일기성격의 글이라 조금 민망하네요.ㅎㅎ
이 글은.. 그냥.. 기념삼아 올려봅니다.
이 날은 여행 중 가장 우울했던 날입니다. 이 때도 시위한다고 난리일때라,,
한국사람도 별로 없었구 약간 어수선했어요.
글을 쓰다보면 세세한 것까지 다 기억이나 생각보다 길어지네요. ^^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어제 관광에 클럽까지 피곤했던 모양이다.
일어나 샤워를 하고 대충 준비를 했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넘었다.
일단은 j가 걱정이 되어 짐을 맡겨 놓았다던 호텔로 가보았다. 카운터에 가서 숙박객 중에 이런사람 있는지 물어봤더니 찾아보는데 잘 못찾는 것 같다. 그래서 어제 짐을 맡겼다고 하니 아~ 하면서 아침에 이미 짐을 찾아서 나갔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왠지 맥빠진 기분이 되어 호텔을 나왔다. 이미 갔구나. 어디로 갔을까. 밤비행기니까 저녁까진 방콕 어딘가에 있을텐데 연락할 방법이 없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혹시 j도 혼자 여행온만큼 혼자만의 시간도 즐기고 싶었는데 나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또 카오산거리를 걷는다. 기분이 참 이상하다. 오늘은 마지막 밤도 아니고 내일 하루가 더 남았는데 왜 이럴까. 아. 그냥 치앙마이로 갔어야 했다. 갈까 말까 하다가 일행도 생기고 선뜻 저질러지지가 않아 그냥 방콕에 있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버렸다. 오늘,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안되겠다. 내일도 이런식일까 두렵다. k언니도 내일 떠나고 나 혼자 남을텐데 혼자 하루를 보낼 자신이 없다. 이제는 방콕에서 특별히 더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의욕도 떨어진다. 그래서 내일만큼은 바쁘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여행사의 일일투어를 신청하기로 했다.
방콕 근처 유명한 여행지로 칸차나부리와 아유타야 중에 나는 칸차나부리로 가보기로 했다.

동대문으로 갔는데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사장님이 지금 자리에 없어서 예약이 안된다고 5시에 다시 오라고 한다. 아.. 애매한 시간이네. 지금 어디라도 갔다오게 되면 5시까지 오긴 힘들 것 같은데.
 그래서 나는 다른 한인업소에서 예약을 하기로 했다. 카페에서 자주보던 홍익인간이나 만남의 광장에 가봐야지.
앗. 그런데 완소 카오산 지도가 없다. j랑 지난번 삔까오다리 갈때 꺼내보고 그 이후로 안봤는데 없어진 것 같다. 그 지도가 한인업소랑 유명한 집 위주로 잘 되어있는데 그게 없으니 어떡하지.
그래도 무작정 걸어보기로 했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지도에서 어디쯤이라는 걸 본 기억을 떠올리곤 그냥 막 걸었다. h언니가 머물렀다는 숙소도 좋다고 하던데 거기도 한번 찾아봐야지.
혼자 터덜터덜 걸었다. 가다보니 지난번 j랑 가려다 포기한 로띠가게 '로티마타바'도 있다. 아. 저기구나. 생각보다 꽤 멀잖아? 중간에 포기하길 잘했지 계속 걸었으면 완전 힘들뻔했다. h언니 숙소는 강변에 있다고 했는데 찾을수가 없다. 언니도 이제 없을텐데 굳이 찾을 이유도 없기에 일부러 찾지는 않았다. 난 그냥 여행사만 찾으면 되는데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가 않는다.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무작정 걸으니 의욕이 안생긴다. 그래서 어느정도 두리번대다 그냥 포기했다.
아! 생각해보니 카페에서 가장 많이 들어본 숙소 루프뷰도 한번 보고싶어 쏘이6 거리까지도 걸었다. 거기도 코앞까지 갔다가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그러고 보면 꽤 방대한 지역을 걸었다. 더이상 못걷겠다. 그냥 돌아가자.

이제 시간도 꽤 지나 배도 고프다. 뭘 먹어야 겠다. 오늘은 빵 말고 밥을 먹어봐야지.
지난번 수언룸나이트바자에서 먹었던 구운 치킨이 먹고 싶다. 그건 굽는거니까 화덕같은게 있는 곳에서 먹어야 겠지.
동대문 근처에 람부뜨리로드를 걷다보니 마침 밖에 화덕이 있는 식당이 있길래 들어갔다. 음.. 근데 메뉴를 보니 grilled chicken이 없다. 이상하다.. 왜 없지? 그래서 그냥 대충 비슷해 보이는 메뉴를 골랐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chilly chicken 어쩌구였는데 그거하고 밥을 시켰는데 막상 나온것은 치킨볶음이었다.. 어허... 영 다른 메뉴가 나왔네. 볶은거 말고 구운걸 원했는데. 이미 시킨거 어쩔 수 없지 뭐.
그러고 나중에 다시보니 stir 이라는 단어가 있다... fried는 없었지만 stir이 있었던 것이다... 아... 맛있게 먹긴 했지만 내 기분은 좀 더 우울해졌다. 메뉴에 없으면 그냥 직원에게 저거 먹고 싶다고 말을 할 걸 괜히 확실치도 않은 걸 시켜서는. 나의 융통성에 짜증이 났다.

밥을 먹고 보니 또 뭘해야 할지 멍해진다. 룸피니 공원에 갈까.
지난번 짜뚜짝 공원이 너무 좋은 기억으로 남아 그 이후로 룸피니 공원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아직 가보질 못했다. 밤에 가면 위험한 곳이지만 낮에 가면 꽤 좋다고 하던데.
갈까 말까. 일단 식당을 나섰다. 땀을 많이 흘려 아무래도 좀 씻고봐야겠다.
그런데 동대문 앞을 지나다 언뜻 보니 사장님이 계신 것 같아 얼른 들어갔다. 일일투어 예약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일단 앉으라며 의자를 내어 주신다.
- 내일 칸차나부리 가려구요. 예약하는 사람들 좀 있나요?
- 아직 아무도 없어요. 시위때문에 사람이 없어요. 어제도 한국에서 기자들 와서 촬영하고 갔는데.
헉. 촬영씩이나. 방콕은 너무나 조용한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뉴스에서 많이 떠드나 보다. 그나저나 예약이 한팀도 없다니. 좀 걱정이 된다. 친구라도 사귀어 마지막 밤을 잘 보내고 싶었는데. 그래서 카오산에 그 많은 여행사 중에 한인업소를 굳이 찾아온건데. 어휴.. 한숨이 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일단 예약을 했다.

아. 그러고보니 숙소를 오늘까지만 예약을 했다. 지난번에 3일치를 계산했으니 내일하루 더 연장을 하던지 방을 옮기던지 해야한다. 투어를 아침일찍 가기로 되어있으니 방을 옮기려면 오늘 알아보고 내일 투어가기 전에 옮겨야 한다.
어떡할까. 하루인데 그냥 있던 곳에 있을까 아님 한인업소 도미토리로 가서 모르는 사람이나마 사람들 속에 있을까.
잠시 갈등하다 동대문으로 가서 혹시 도미토리도 하는지 물어보니 동대문은 도미토리를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DDM밖에 없는데 그쪽으로 옮길까. 생각하다가 숙소에 도착하니 짐꾸리는게 또 귀찮게 느껴져 그냥 있는 곳에서 하루 더 머물다 얌전히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숙소에 가니 이미 시간이 또 많이 가버렸다. 룸피니 공원에 가기 정말 애매한 시간이다. 어떡하지.
 그래도 그냥 일단 가보기로 했다.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오랜만에 화장도 좀 열심히 했다. 클럽에 갈때만 바르던 반짝이 아이셰도도 발랐다. 그러고 나니 우울한 기분도 조금 풀리는 듯 하다.
공원에 가면 쉬는 게 일이니 책도 한권 챙기고 mp3도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그리곤 일단 k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 휴대폰으로 하면 서로 부담스러워 언니 숙소로 아까 여러번 전화를 했었는데 계속 방에 없다고 해서 이번엔 할 수 없이 해외전화 하는 곳까지 찾아가 휴대폰으로 걸었다. 다행히 연결 성공.
언니는 지금 애완동물 용품점에 왔다고 했다. 저번부터 언니가 가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별로 관심이 없어 흐지부지 안갔던 곳이다. j 혹시 연락 왔냐고 하니까 아까 못받은 전화가 한 통 있었는데 그거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j는 이대로 안녕인듯 하다. 언니하고는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번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약속을 정했다.
내일은 내가 투어갔다가 저녁 7시쯤 돌아오는데 언니는 밤 12시쯤 떠나니까 내일 만나기는 시간이 너무 빠듯할 것 같다. 언니가 카오산에 한 번 오고 싶다고 했던게 기억나서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는게 어떻겠냐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볼일 보고 하면 밤 10시 정도 될 것 같다고 한다.
약속 시간이 너무 늦어 약간 실망했지만 그래도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것이 든든하다.
이번에 처음해본 혼자만의 여행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밤 시간이다. 떠들썩한 바깥 소리를 들으며 혼자 숙소에 있자면 참 우울했다. 전화를 하고 나오는데 가게 앞에 있는 노점에 귀걸이들이 마음에 들어 2개를 샀다. 하나 20바트이니 싸기도 참 싸다.

자, 그럼 난 룸피니공원으로 가볼까. 약속시간까지 시간도 많으니 어디든 가보자! 자, 힘내고 고고씽!
이번에도 버스로 가려고 게스트하우스 아저씨에게 버스번호도 알아왔다. 그런데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차가 잘 안온다. 그래서 지루해진 나는 이어폰을 귀에 꼽고 버스정류장 한쪽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행 시작하고 열흘이 넘어서야 난 처음으로 책을 펼쳤다. 공항에서 책을 두 권이나 사고는 오늘 처음 책을 펼친 것이다.
책을 한참 읽을만큼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버스가 왔다. 한무리의 중학생들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이번엔 남자차장이 문앞에 서있다. 그런데 몇명의 사람이 탔는지 종이에 기록하고는 돈을 받지 않는다. 어? 왜 돈을 안받지? 내릴때 내나? 근데 어디서 탔는지 어떻게 알고? 마음이 또 초조해졌다. 그래서 문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봤는데 내리는 사람도 아무도 돈을 안낸다. 이상하네.. 돈은 대체 언제 내는 거야. 그리고 룸피니 공원에는 어떻게 내리지. 저 차장한테 말해 놓을까. 혼자 또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다. 또 비가 올것 같다. 비가 오면 공원에 갈 이유가 없잖아. 아.. 정말 답이 안나온다. 근데 나 잘 가다가 중간에 그냥 내려버렸다.
왜 내렸지. 언제 내려야하나를 고민하다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역에서 그냥 따라 내려버렸다. 비도 오기 시작했고 공원에 갈 마음도 사라졌다. 돈은 결국 내지 않았다.
아.. 근데 여기가 어디야. 가지고 있던 방콕지도를 펼쳐봐도 알 수가 없다. 중국식 병원이 있는 걸로 보아 차이나타운 근처인것 같기도 하고 후알람퐁 역과도 멀지 않은 듯 싶은데. 마음도 심란하고 비는 억수같이 내린다. 하늘이 흐려 마음도 좋지 않은걸까. 아님 j도 집에 가고 k언니도 곧 가고 나도 갈 날이 코앞이라 마음이 이상한걸까. 아. 정말 이상하다. 오늘이 꼭 마지막 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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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다...

스콜성 비는 금새 그치니 비가 오면 어딘가 잠시 앉아 피하는게 상책이다. 병원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병원 안으로 들어가 앉아있을까 하다 그냥 병원 앞 계단에 앉아버렸다. 그 앞에 앉아 비오는 것도 보고 빗소리도 듣는게 나쁘지 않았다. 때맞춰 mp3에서 김동률의 '출발'도 흘러나왔다.

[아주 멀리 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 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곳을 바라볼수 있을지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멍하니 앉아서 쉬기도 하고 가끔 길을 잃어도 서두르지 않는 법
언젠가는 나도 알게 되겠지 이 길이 곧 나에게 가르쳐 줄테니까
촉촉한 땅바닥 앞서간 발자국 처음 보는 하늘 그래도 낯익은 길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작은 물병 하나 먼지낀 카메라 때묻은 지도 가방안에 넣고서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내가 자라고 정든 이 거리를 난 가끔 그리워 하겠지만 이렇게 나는 떠나네 더 넒은 세상으로]

꼭 내 상황같은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난 잠시 감상에 빠져들었다.
태국에 와서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보면 딱히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유명하다는 걸 다 보러 다닌것도 아니고 일정이 밤낮으로 빽빽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돌아다니고 싶은만큼 돌아다니고 자고싶은만큼 자고 먹고 싶을때 먹었다. 어쩌면 나는 이번 여행에서 제대로 된 자유를 경험한 것 같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곳, 낯선 건물 앞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물론 사진도 찍어보고 지도를 펼쳐 여기가 어디쯤되는지 가늠해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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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앞 계단. 책과 음악과 비.

꽤 시간이 지났지만 비가 그치지 않는다. 이젠 결단을 내리자.
룸피니 공원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이나마 둘러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돌아갈 것인가.
난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젠 더이상 어디를 꼭 가야하지 않았다. 그냥 쉬자. 뭐하러 쫓기듯 여기저기를 돌아다녀. 그냥 마지막으로 카오산이나 더 즐기자.

이내 택시를 잡아타고 이제 내 고향같은 카오산으로 돌아왔다. 지도를 한참 들여다본 결과, 나는 룸피니 공원에 한참 못미치는 곳에 내렸고 거긴 차이나타운쪽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는 낯선 곳에서 나는 너무나 좋은 추억을 하나 더하고 돌아왔다.

카오산에 오니 비는 어느덧 그쳐있다. 카오산의 식당들도 바깥에 놓여있던 비맞은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다. 이대로 숙소로 들어가기도 싫고 아까 읽던 책도 더 읽고 싶어 식당 한군데를 골라 들어갔다.
밖에 나와있는 테이블에 앉고 싶었는데 빈 자리가 없어 그나마 바깥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를 하나 차지하곤 메뉴를 골랐다.
오늘따라 팬케익이 너무 먹고 싶어서 pancake with banana와 따뜻한 차를 함께 시켰다. 정말 심플한 팬케익과 바나나 하나. 이렇게 정직할 수가 있나.
약간 황당하기까지 한 심심한 팬케익에 꿀을 잔뜩 뿌려 먹기 시작했다. 차는 레몬티를 먹고 싶었는데 없길래 선택한건데 맛없다. 따뜻한 물에 티백과 우유를 함께 줬다. 이곳에서도 멍하니 앉아 음식을 먹고 책을 읽고 사람들 구경하고 또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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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꿀,팬케익접시,여행내내 넣어다닌 수첩과 볼펜,수고한 내 다리.

오늘따라 사람이 너무 많길래 오래 앉아있는게 괜히 신경이 쓰여 팬케익을 아주 천천히 먹었다. 맥주 한 병 달랑 시켜놓고 나보다 더 일찍와서 지금까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왜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걸까. 그래도 있고 싶은만큼 있다가 일어섰다.

자, 내일은 아침부터 바쁠거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가기 전에 거리음식은 꼭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방금 팬케익을 먹어놓고도 난 또 바나나로띠를 찾았다. 로띠는 전부터 먹고 싶었는데 내가 찾을 땐 꼭 문 연데가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여기저기 많이 있다.
로띠집에서도 팬케익을 판다. 아까 그 집 팬케익은 70바트 였는데 여긴 25바트밖에 안한다. 제길. 아까 왜 팬케익 먹은거야! 아냐. 자리값이 있잖아. 난 아주 오래 앉아있다 나왔으니 괜찮아. 또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리곤 바나나로띠에 꿀을 추가해서 시켰다. 아. 지독히 달다. 꿀을 마구 뿌리더니만 정말 달다. 그래도 맛있다. 많은 다른 여행자들처럼 길거리 걸어다니며 로띠 하나를 허겁지겁 다 먹었다.

자, 이제는 팟타이를 사먹자. 외국인들이 길거리 걸어다니며 하얀 스티로폼 그릇의 국수를 먹는 걸 매일 봤다. 그 유명한 길거리 팟타이, 난 이제서야 먹는 것이다. 도대체 그동안 뭘 한건지.
제일 맘에 들게 생긴 아가씨에게 팟타이와 스프링롤도 하나 곁들여 샀다. 그리고 숙소 돌아오다 원피스도 샀다. 한눈에 맘에 들길래 그거 역시 질렀다. 내일 투어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거고 투어 중 식사며 교통비가 투어요금에 다 들어있으니 이제 돈 들어갈 곳도 없고 그냥 개념없이 끌리는대로 돈을 썼다.
한 손엔 원피스, 한 손엔 팟타이를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아저씨와 눈인사를 하고 내 방에 돌아오니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또 허겁지겁 파타이 시식. 우왕... 완전 맛있다!! 이 맛있는 걸 이제야 먹다니. 억울하다. 아침마다 토스트따위 집어치우고 이거나 사먹을걸. 값도 20바트밖에 안하는데. 아 참 한심해. 게다가 이 스프링롤은 또 얼마나 맛있는가 말이다. 숙주가 아삭하니 씹히고 칠리소스와 함께 정말 환상의 궁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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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반한 팟타이..

팬케익에 로띠에 팟타이, 스프링롤까지 다 먹어치우니 배가 무지 부르다.
만족해하며 배를 뚜들기곤 아까 사온 원피스를 또 입어본다. 역시 예쁘군. 하하하. 그런데 이거 이렇게 긴 거였나. 전에 산 건 종아리 윗쪽까지 왔었는데 이건 거의 롱스커트다. 그래도 예뻐.
배가 불러지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 아까 읽던 책을 다 읽었다. 역시 시작을 하면 계속 읽게 된다.
오늘 하루를 기욤뮈소의 '당신,거기 있어줄래요' 와 함께 했다.

책을 읽다 보니 언니랑 약속한 10시가 되었다. 숙소 코 앞에 있는 버거킹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가는데 1분밖에 안걸리지만 3분전에 나갔다.ㅋ
버거킹 앞에서 혹시나 하고 한번 두리번거려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콜라를 한 잔 마실까 하다가 언니오면 금방 나갈텐데 하며 그냥 빈손으로 2층으로.
제일 구석자리에 앉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버거킹 중간에 앉아있어 아까부터 약간씩 눈이 마주쳤던 태국아이 세명이 내쪽으로 와선 말을 건다.
- 영어 할 수 있어?
- 응. 조금.
- 그러면 이것 좀 해줄래?
그 애들이 내민 종이를 보니 이 아이들도 지난번 왓 아룬에서 마주쳤던 대학생들처럼 설문조사 같은걸 하는 것 같다. 근데 지난번과 다르게 이번에는 글로 쓰는게 아니라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 나는 또 부담스러워 미안하다고 영어를 잘 못한다고 그랬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웃으며 자기들 자리로 간다. 생글생글 얼굴들도 귀엽다. 내가 거절을 하니 다른 테이블로 가서 촬영을 한다.
언니 기다리느라 책 읽는 중간중간 입구쪽을 쳐다보다 촬영하는 애들이랑 눈이 마주치면 서로 살짝 웃으며 아는체도 하고 그랬다. 아..귀엽단 말이야.ㅋ

그런데 언니는 왜이리 안오는거지. 30분쯤 기다리다 안되겠다 싶어 언니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안받는다. 그래서 다시 버거킹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커피를 한 잔 샀다. 한국처럼 믹스커피인데 완전 진하다. 커피를 사들고 다시 아까 그 자리에 앉았다. 그 태국대학생들 여전히 촬영중이다. 이번엔 내 바로 옆자리에서 촬영하는 통에 그 애들 질문내용이 들렸는데....
- Do you like thai food?
- What is your favorite thai food?
뭐야! 겨우 그 수준이야? 에잇..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괜히 무식한 사람됐네. 그놈의 소심증. 잘하면 괜찮은 태국 친구도 사귈 수 있었는데.
안타까운지고. 좀 용기를 낼 걸.

맘속으로 왕 후회를 하고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이제 거의 1시간이 지났다. 그래도 오지 않는다. 이젠 그 대학생들도 나가버리고 매장이 일순 조용해졌다.
걔네들이 나가버리니 왠지 허전한 마음도 들고 조용한 매장도 괜히 무섭다. 안되겠어. 다시 전화해보자. 이번엔 숙소로 한번 해볼까.
아, 또 비가 온다. 제길. 근데 공중전화는 어딨는거야... 공중전화를 찾다가 비를 피해 건물 안 라운지로 뛰어갔다. 어! 근데 그 태국 대학생 애들이 있다.
야.. 이거이거 무지 반가운데? ㅎㅎㅎ 그 애들도 나를 알아보곤 인사를 한다. 나도 인사하고 불쑥 다가가선... "이 근처에 공중전화가 어디있어?" 하고 물었다. 영어 못한다던 내가 영어로 물어서 놀랐나보다. 약간 놀란 얼굴로 맞은편 세븐일레븐 옆에 있다고 가르쳐 준다.
고맙다 하고 바로 전화로 뛰어갔다. 호텔에 전화했더니 언니가 전화를 받는다. 뭐야!! 왜 호텔에서 전화를 받는거지? 당연히 출발했어야 하는거 아냐? 조금 황당하다..
언니 얘기를 들어봤더니 오늘 면세점에 갔다가 거기에 여권을 두고 오는 바람에 그쪽 연락을 기다리느라 호텔을 비울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 그랬구나. 아니지.. 언니 휴대폰 가지고 있잖아. 나한테 연락하기는 힘들다 치더라도 아까 내가 전화했을 때는 받았어야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약속을 못지키게 되었으면 휴대폰에 신경을 계속 쓰고 있었어야지.

휴.... 허탈한 마음에 괜한 생각까지 하고 기운이 쭉 빠진다. 뭐야. 이럴거면 아까 그 태국 대학생들한테 차나 한잔 하자 아니,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할 걸. 정말 그럴 생각도 있었는데 언니랑 한 약속 때문에 안했단 말이야. 애들이 정말 착하고 괜찮아 보였는데. 게다가 대학생임이 확실해 믿음도 좀 가고.
황급히 아까 그 자리로 다시 뛰어갔지만 그 애들은 이미 가고 없었다. 생각해보니 아까 걔들도 다시 만난 나를 굉장히 반가워했는데 나는 너무 불쑥 내 할말만 하고 뛰어가버린 것 같다.
차라리 걔네들한테 휴대폰 있으면 좀 빌려달라고 할 걸.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아~~~ 뭐야. 뭐냐고. 오늘 왜 이래?

비는 계속 심하게 내리고 내 마음에도 비가 내린다. 오늘 하루는 정말 한 게 없네. 카오산만 몇번씩 왔다갔다 하고 룸피니 공원도 가다가 돌아오고.
 j는 오늘 갔을거고 언니는 내일 갈거고 난 내일 투어를 가야하니 언니와도 이대로 안녕이다.
이번 여행에선 전부 끝이 좋지가 않다. 여행중 만난 사람 어차피 한국가면 다시 못 볼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안녕 잘가 하고 기분좋게 헤어지고 싶었다. 그런데 홍콩에서나 태국에서나 전부 어영부영 헤어졌다. 첫날 클럽 갔을 때 그 때 만난 애가 자기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별로.. 그러길래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행중 인연이란 정말 이런걸까.
짧은 시간이나마 즐거운 시간과 기억을 공유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헤어지다니. 언니는 그나마 휴대폰 번호도 알고 태사랑 아이디도 알지만 j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냥 끝인 것이다. j 쪽에서 마음이 있어 언니에게 연락을 취한다면 모를까 내 쪽에선 방법이 없다. 아, j도 태사랑 회원이니 내가 글을 올려 연락줘~ 하는 방법이 하나 있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j 역시 클럽 그 애 처럼 그냥 며칠 같이 재미있게 보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마음이 참 쓸쓸해진다. 나, 내일 일일투어 정말 잘 신청한 것 같다.

비는 계속 내리고 나는 여전히 건물 앞에 서있다. 정말 우울하고 누구라도 붙잡고 '저랑 맥주 한잔 하실래요?' 그러고 싶다. 내 앞에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애 하나가 나처럼 혼자 비를 피하고 있길래 말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너무 무심해 보이는 그 아이의 표정에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조금 있으니 그 애도 그냥 빗속으로 뛰어가버리고 나도 곧 뒤따라 빗속으로 나갔다.

공들였던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하고 침대로 들었다. 그리곤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다 읽곤 충동적으로 책 속지에 글을 썼다.
나처럼 혼자와서 우울하신 분, 이 책을 친구삼아 즐겁길 바란다고. 글을 쓰며 맘속으로 나는 이 책을 게스트하우스에 주고 가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벌써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다. 내일 7시에 투어 가야되는데. 에이 뭐.. 여기서 맨날 알람 울리기 전에 잠깼는데. 잘 일어날 수 있을거야...
난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다.

5 Comments
방람푸 2008.10.18 18:40  
  너무나 멋진 여행일기네요..^^
예전에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여행을 한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일기 잘읽었습니다...
변강새2 2008.10.18 20:08  
  더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여행의 기분과 가장 중요한 객창감이 너무나 잘살아있는 글이네요~^^
시골길 2008.10.19 02:23  
  병원앞 계단,,사진이 아주 죽음이네요..ㅎㅎ
조아무개씨의 노래에서....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계단.......ㅎㅎ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쓰셨나요..비오는 계단에서..^^
퍄퍙 2008.10.19 05:30  
  방람푸님/ 혼자 한 여행 생각보다 쿨하지 않더군요.ㅎㅎ 가기 전엔 한국사람 많은 호텔 싫다며 피했는데, 막상 가서는 늘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참 아이러니하죠.^^

변강새2님/ 객창감이 무슨 뜻인지 사전 찾아봤습니다.ㅋ 제가 맞춤법같은것도 아주 민감한 사람이라 틀린 것 보면 못참거든요.^^ 다른 일기는 그냥 복사해 붙이면 되긴하지만 태사랑에서 만난 분들 얘기가 좀 있어 조심스럽습니다. ^^

시골길님/ 저 사진 얼굴도 나와있지만 살짝 잘랐어요. 그래도 체념한 듯한 표정이 보이죠? ^^
변강새2 2008.10.20 23:08  
  할~ 그런게 중요한가요~^^ 글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팬이 되어버렸는데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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