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공포영화는 쉽게 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나는 프롬퐁역 앞에 있는 benjasiri 공원에 누워있었다.
호수를 보고싶어 앞에 섰다가, 앉았다가, 누워버렸다. 그리고 조용하고 편안함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시간을 물어보니 치앙마이행 기차를 타기엔 두 시간이나 남았다.
후알람풍 기차역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지하철로 이동 가능한 곳이라면 여기서 딱 40분은 더 누워있어도 될 것 같았다.
호수를 보고 싶으면 고개를 내렸고, 하늘을 보고 싶으면 고개를 들었다.
목이 마르면 펩시를 마셨고, 안온함을 원하면 눈을 감았다.
젖은 잔디가 옷에 물들 무렵,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시간을 확인하니 다섯시 정도 되었다.
으아 나도 치앙마이에 가는구나
그런데 후알람풍 역은 MRT(지하철)이고 프롬퐁역은 BTS(지상철)이다. 게다가 둘은 사이가 안 좋아 환승이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두 역이 만나는 아쏙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BTS한정거장 정도야 배낭여행자에겐 껌이니까.
공원 앞까지 나가서 이제 걸어가자 하여 지도를 폈는데 또 문제였다.
방향을 잘 모르겠다.
조깅하며 지나가는 여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녀는 어디라며 방향을 가리키곤 다시 가던 길을 뛰어갔다.
역시 아름다운 오후야.. 하면서 나는 걸었다.
걸었다.
걸었다.
이날은 시멘트가 마르기 전 새긴 발자국 또한 웃음짓게 만들정도로 아름다운 오후였다.

걸었다
BTS가 보였다.
'Thong Lo'
뭐야이거, 지도를 펼쳤다.
ASOK --- PHROM PHONG --- THONG LO
오 마이...
현재시각 모름. 기차 출발 시각은 6시. 아쏙 역에서 후알람풍 역 까지는 6정거장. MRT 한 정거장에 몇 분 걸리는지 모름. 후알람풍 역에서 기차역까지 연결되어있는가에 대한 여부 모름 . 기차 못타면? 기차 침대칸 삯 800밧. 2일 트래킹 1,200밧. 돌아오는 비행기 삯 1,800밧.
순간 위에 늘어놓은 모든 생각이 3초도 안되어 다 튀어 나왔다.
지금은 말 그대로 위기일발危機一髮!!!
그 3초가 지난 뒤, 나는 그대로 남철 남성남 듀오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180'로 돌아 걸었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는, 주저함은 낭비라는 직관과 함께 반사적으로 택시를 잡아 탔다.
- 후알람풍 트레인 스테이션!
택시에 있는 시계를 보니 5시20분. 이게 맞는지 안 맞는지는 모른다.
점점 차들이 밀리고 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다.
교통지옥 방콕.
어디선가 들었던 또는 보았던 그 문구가 입가에 맴돈다. 교통지옥 방콕, 트래픽 잼, hell. 교통, 방콕, 지옥.
5시간 같은 5분이 지났을까, 고개를 옆으로 돌렸더니 아름다운 오후의 프롬퐁역이다.
아까 나에게 자신감있는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켰던 그 운동녀를 떠올려본다.
더불어 길을 물어봤을 때의 내 모습도 떠올려 본다. 그래, 나의 발음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다. 분명 아쏙과 통로의 발음은 너무 다르다.
아니, 지금은 누구 잘 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지.
이런저런 생각이 늘어질 때 쯤, 아쏙역이 앞에 보였다.
순간 시계를 다시 보았다. 5시30분.
그리고 지도를 다시 보았다. 6정거장.
그래, 번개같이 내려가서 지하철을 곧바로 탄다면 승산도 있다.
황급히 택시를 내리고 사거리를 건너 아쏙역과 붙어있는 MRT, 수쿰빗역에 다다랐다.
그 때, 경찰 누나가 시니컬하게 나를 잡는다.
- 가방 좀 열어줘
- 옷이야! 옷이라고!! 옷!!!
격정적으로 소리치며 가방을 열다보니 그만 옷이 튀어나왔다.
알았다며 됐다며 같이 옷을 주워주는 경찰 누나가 외려 고맙게 느껴졌던 건 쓸데없는 사치였을까? 아무튼 가방을 다시 들쳐메고 뛰어 내려갔다.
티켓자판기에서 코인을 뽑고 지하철을 탔다.
여행의 묘미라며 시계를 가져오지 않다보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카메라에 설정 모드로 들어가서 겨우겨우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이었다. 알고보니 택시의 시계가 조금은 빨랐던 셈. 그러나 안도할 순 없었다.
한 정거장이 몇 분인지 재어 보았다. 2분, 나쁘지 않다.
후알람풍 전 역인 삼얀 역이 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니 주위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문이 닫혀도 가만히 서 있자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았다.
불안해서 앉을수가 있어야지.
문이 열리자 뛰쳐다가 에스컬레이터를 단숨에 뛰어올라 insert coin 하고 근처에 '주변 맵'을 보니 세상에, 기차역이랑 붙어있어 THANKS GOD.
미친듯이 뛰어 기차역에 다다르니

좋아, 여유가 있어. 공포영화의 해피앤딩처럼 안도감이 찾아왔다.
화장실도 들렸다가 주전부리 즐겨보고자 군것질 몇 가지 마트에서 담아 나왔다.
다시 시계를 보니 5분 남았다.
그런데 게이트가 몇 번이더라? 하고 티켓을 보니 1번. 그래, 좋네 1번. 넘버 원.
1번쪽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기차에 올라서려다가 뭔가 여유가 생겨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에게 이게 치앙마이 가는 게 맞냐고 물어보았다.
- 여기가 아니고 4번 게이트야.
공포영화는 쉽게 엔딩을 보여주지 않는다.
- 여기에는 1번이라고 써있잖아, 왜 4번 게이트에요?
- 어쨌든 4번이야.
- 여기서 어떻게 가야하는데요?
- 별로 안멀어 저 앞에 앞에 있는 게이트 이거든.
말아먹을, 왜 되는 게 하나도 없나? 하는 눈초리로 역사를 빙 둘러본다. 아무래도 걸어온 곳을 돌아 가기엔 너무 불안한 지금 시각이다.
에잇.
나는 한국에서 한번도 못해 본 것을 외국에서 처음 한 것이 몇 가지 있다.
혼자 쌀밥 사먹기.
커피숍 혼자가기.
영화 혼자보기.
그리고 오늘, 나는 선로에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고 재미있었다. 다행이 나를 나무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성공적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시계를 보니 6시 1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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