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THAI - 프롤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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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밖에 좀 나갔다 올게."
- 그래, 누구 왔어?
"아니, 그 밖 말고."
- 그럼 무슨 소리야?
"물 밖."
- 어디 갈 건데?
"몰라, 원래 스페인 가고 싶댔잖아~ 근데 요새 환율 때문에라도 비싼 데는 못 가겠다."
- 그래. 다녀와. 근데 누구랑?
"그냥.. 나 혼자 가게"
- 여행이 혼자 가면 무슨 재미야? 친구들한테 같이 가자고 해.
"엄마, 내가 만날 얘기했잖아. 혼자하는 여행 해보고 싶다고. "
- 알았어. 그래도 누구한테 같이 가자고 얘기해 봐~ 근데 너 뭐 믿는 구석 있어?
"나 어렸을 때부터 세뱃돈하고 심부름센터 해서 번 용돈 모아둔 거 있잖아. 그거 깨면 갔다올 수 있을 거 같애."
- 그 코 묻은 돈을 깬다고?
"상관없어. 나 여행가는 데 쓰는 거니까 안 아까워."
1월 어느 저녁, 엄마와 저녁을 먹던 중 난 저런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올 해는 다른 때와 달리, 방학을 맞아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배우러 가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럴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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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연말연시 분위기로 한창인 12월, 현실은 냉혹했다.
물론 우리나라 전체 역시 경제위기 운운하는 어려운 때이고..
'09년을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까'보다는
앞으로 1년을 어떻게 더 공부하지..하는 걱정이 앞섰다고 하면, 젊음에 대한 무례라고 평가될까?
평소 잠귀가 예민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건강한 수면생활을 영위해왔던 [여행중엔 예외이지만 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지만
어느새부터인가 늦은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한 번 깼다 하면 다시 잠들기가 너무 힘든..
불면증이라 표현하긴 너무나 싫지만 인정해야만 했던 증상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새해를 맞았다. 더이상은 자존심이 허락질 않았다.
욕심쟁이인 나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난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체질이다.
1월 내내 나는 같은 본질을 향해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총 일곱 군데에 정식으로 원서를 넣었고,
서류통과, 면접통과, 실기 등등을 몇 번 거쳤지만
일곱 번 넘어졌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평소 나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어왔던 내가, 내 자신을 한심하고 초라하게 여기고 모든 일에 자신감을 잃은 것 같았다.
이건 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카오산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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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road, 카오산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늦은 밤, 룸메이트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때
스탠드와 노트북만을 켜 놓은 채 구질구질한 화질의 영상을 보면서도 설렜고
내 세계여행의 출발지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다큐멘터리와 책.
물론 이번이 첫 여행도, 첫 방타이도 아니지만 카오산이어야 했다.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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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태국 가려구."
- 우와 좋겠다. 언제?
"2주 후쯤?"
- 누구랑?
"혼자. 너도 갈래?"
-가고 싶다. 나 장학금 나오면 엄마한테 보내달라고 해 볼게.
"내일부터 새벽기도 해야겠다."
-ㅋㅋㅋ
혼자 가겠다고 어마마마에게 엄포를 놓을 땐 언제고, 나도 모르게 친구를 꼬이고 있다.
다행히 친구는 대학생활 처음으로 전액장학금을 받았고,
난 가장 친한친구와의 여행을 계획하는 가이드로 임시취업했다.
경유편이지만 그런대로 괜찮다고 생각되는 가격의 항공권을 구했으며,
숙소니 투어니 하는 예약은 도착해서 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성격상 이런 무계획 여행은 해본 적이 없다.
어딜가든 숙소와 이동루트는 정해져 있어야 마음이 편했으며
어디서 무얼 타고 갈 것인가, 어느날 무얼 먹을 것인가까지 미리 공부하고 정해놓는 스타일이다.
한 마디로 일신 피곤한 완벽주의-_-
하지만 이런 성격과는 반대로 대단한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통일인] 실험을 해보려는 대략 무계획을
무조건 찬성해 준 친구까지 있어 시작은 무척 순조로웠다.
친구는 이번주 토요일(21일) 모모 시험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닥 미련을 두지 않는다며 그래도 양심상 3일전엔 들어와야겠으니 여행일정을 17일까지로 잡자 한다.
대단한 똥배짱이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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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번 여행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아바마마는
공항에 시간맞춰 나가려면 신새벽에 나가야 할 거라면서
차라리 하루 전에 서울가서 자고 가라며 한강변이 180도 통유리창을 통해 내려다 보이는 서울의 모 호텔방까지 잡아주셨다. ㅠㅠ
오랜만에 면세점에 볼 일이 많았던 어마마마는 친히 서울까지 따라와 공항에서 들고나갔다와야 할 짐을 살짜쿵 쌓아주고 가셨고;;
처음으로 구경하는 러그져리한 ㅅㅇㅌ룸의 시설에 얼떨떨하기까지 하면서
신이 난 나와 H는 사진을 마구 찍어대며 있는대로 촌년짓을 하고 놀았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맛난 퓨전일식까지 먹고 들어온 방에는
짜잔~
요런 티라미수 케이크가 배달되어 있었다. 으어어-_ㅜ
이거 뭐 반가운 일로 시작한 여행은 아니지만, 초반부터 뭐 이렇게 기분 좋은 일만?ㅎㅎㅎ
하지만, 그 기쁨에 비례하듯 부담도 따라왔다.
올 해엔 꼭 합격해야 한다, 그러고야 말리라는 다짐.
커피와 티라미수를 깔짝거리며 우리집 tv보다 훠얼씬 큰 평면티브이로 꽃보다 남자를 보며 히히덕거리기도 하다가,
늦은밤까지 싱숭생숭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잠이 오지 않는 상태를 친구의 엠피쓰리로 달래며 출발 5시간 전쯤 잠이 들었다.
그리고 두시간 반 정도 잤을까..
나는 또 깨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몸을 피곤하게 할 만한 거리를 찾고 있었다.
케이크를 먹고 자서 그런지 속은 더부룩했고,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얼마나 뒤척이다 잠이 들었을까.. 벌써 알람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