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극.복.여행기] vol.01 - 카오산 입성기
시작하기에 앞서.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너무나 좋은 말들로 위로해 주셔서 정말 기쁘고 행복했답니다...
상처는 혼자 애쓴다고 절대 아무는 게 아닌것 같아요.
제가 위안받고 달래진만큼 태사랑에 계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 내가 잊어야 하는 게...
| 만난 그 처음인지,
| 사랑한 그 순간인지,
| 함께했던 그 영원인지,
| 남이되던 그 끝인지.
| 난 어디부터 잊어야 하는 걸까...
해외여행 한번 할라치면 최소 한 달 전에는 비행기 표를 구입하는 것은 기본이고
일정 동안 묵을 모든 숙소 예약과 여행기간의 하루도 빠짐없이 예상 일정표를 준비해왔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워낙 즉흥적이었던 탓인지 만사 귀찮은 탓인지 비행기 표 한 장 사고
도착하는 첫날 묵을 숙소만 달랑 한 곳 예약으로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드디어 출발하는 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아니, 고맙지만 그냥 공항버스로 가겠노라고 예의도 바르게 사양까지 했는데도
부득불 꼭 데려다 주겠다는 (평소 양보, 배려, 희생 등의 단어가 무어냐 물으면
그 따위 것들이 뭔데요, 라고 당장 사전 펼칠 여자인) 언니님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기로 한다.
정작 여행가는 나랑 덕수는 한겨울 한국과 한여름 태국을 통과해야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어정쩡하고 후질근한 노숙룩인데,
지가 무슨 고소영님이라고 호피코트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누가 카메라만 꺼내면 당장 화보 찍을 기세인 언니님의 폭풍간지패션이 살짝 민망하다.
그렇지만 난 너그러움의 미덕을 아는 여자이기에 공항 가는 김에
밀라노 패션쇼 초청 여행 쯤 다녀오는 기분이라도 내고 싶은가 보다, 이해하고
강도 높은 서든어택을 가하려던 방정스러운 입을 닫는다.
그런데 문제는 언니님의 민망한 패션 따위가 아니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 다사다난했던 이번 여행의 제1사건이 터졌으니,
1. 오늘 아침 형부가 출근 할 때까지도, 불과 한 시간 전에 김덕수가 언니님의 심부름으로
저지방 요거트 따위를 사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현관문 도어락 작동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기능)되지 않음.
2. 이 집 안주인은 도대체 집안 살림을 어떻게 하는 여편네인지
(이쯤 되면 언니, 라는 호칭은 버리기 아까우면 개라도 주시오, 가 되는 거다)
보조키를 어디다 둔지 전혀 찾지 못함.
3. 면세점에 들러 폼 나게 쇼핑을 한다, 공항 라운지에서 분위기 있게 차를 마신다 등의
사치성 여유시간은 2번에 해당하는 망할 여편네가 엣지 있는 스타일을 완성하는데
이미 써버렸음.
지금에 와서 공항버스를 탄다는 건 비행기를 놓치겠다는 거고,
택시를 탄다는 건 비행기를 안타고 말겠다, 라는 환장할 상황임.
4. 세 명이 머리를 맞대 겨우 생각해 낸 유일한 해결책, 옆동네 아파트 주민인 모친께 전화를 걺.
5. 그 시각 모친은 우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고 계시던 중이었음.
찬송가 부르다 부랴부랴 교인들을 돌려보내시고 택시타고 달려오셨음.
“요즘 같이 경기도 어려울 때 넘의 나라 가서 돈 쓰러가는 것도 남부끄러와 말을 몬하는디
무신 큰 일 하러 간다고 예배 중인 엄마를 오라 가라 해쌋노!
참말로 가지가지로 한데이, 니 같은 효녀가 또 어데 있겠노?”라는 욕을
한 17절까지 들은 듯함.
6. 도어락 A/S를 부르고 사랑하는(?) 모친을 문도 안 잠기는 집에 홀로 방치(?)하고
천하의 불효녀는 해외여행을 떠남.
이상 상기한 내용이 사건 개요이다.
그렇게 겨우 공항으로 가며 뚫린 입이라고 참으로 뻔뻔하게
“현대 기술 문명에 너무 의존하고 살면 어떻게 되는지를 일깨워주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라고
이 사건을 격상시키는 언니님의 조동아리가 평소에도 별로 맘에 안 들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얄밉다.
[나]란여자 : 노빅띨(주인보고도 짖는 시끄럽고 크고 멍청한 앞집 개시키를 우리집에서 칭하는 말)
국회 진출하는 소리하고 앉았네.
비행기만 놓쳐봐, 아주 춘향이 안 부럽게 주리를 틀어버릴 라니까!
라고 협박질을 하지만, 사실 우리 언니님한테 쪼금, 아니 많이 고맙기는 하다.
그날 밤 덕수 놈을 불러내 소맥을 말아 마시고 집에 들어간 나는
망할 술기운으로 용기백배해진 ‘하이드’라는 자아를 만나,
안 그래도 맞선남의 주선자를 통해 전해진 나의 맞선 결과에 심기불편하신 모친께
[나]란여자 : 나 시집 안 가면 안 갔지, 이제 선 다신 안 봐!!!
선이랍시고 그딴 개허접한테까지 입술에 경련 일어나도록 웃는 거
진짜 체질에 안 맞아서 더는 못해 먹겠어!
5년 사귄 놈한테 차이자마자 그래도 결혼 한번 해보겠다고
틈만 나면 선 자리 쫓아다니고, 쪽팔려 진짜! 결혼 그까짓 게 대체 뭔데?!
라는 제임스딘이 울고 갈 반항드립을 쳤다가,
모친 : 니 지금 제정신이가? 이 문디가스나가 뚫린 게 입이라고 뭐라 왈왈 짖어쌓노?
선 한번만 보라캐도 사랑에도 의리 어쩌고 주접을 바가지로 싸는 소리하드니
5년 내 니 혼자 삽질 한번 깊게도 했대이!
놈팽이 간수 하나도 제대로 몬하고 빙신같이 채인 주제에 니는 벨두 읎나?!
내가트믄 그 문디자식 고자는 몬만들망정 눈에 쌍불을 켜고 딴 놈 만나 보란듯이
그 너마 회사 앞에 청첩장을 뿌려도 성이 안풀릴끼다!
니가 국회의원 아부지빽이 있나 고소영맹키로 이쁘기나 하나?!
엎친데덮쳤다고 이쟈 니는 젊지도 않대이,
그라믄 선이라도 들어올 때 좋은 자리 골라 시집가야 할 거 아이가?
그리고 뭐? 쪽팔려? 그래, 니 말 한번 잘했데이,
여적 다른 너마랑 연애질한 서른 다 넘긴 딸년 선 자리 사정 할 때마다
내는 을매나 남사스러운 줄 아나?!
내 늘그막에 딸년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망신살이 뻗쳐가 고개를 몬들고 다닌데이!
하이고!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화풀이 한다카드니,
그 문디자식한테는 찍소리 한마디 몬하고 와서는 속에서 천불이 날라캐도
모지란 딸년 넘의 아파트 옥상 가 뛰내리 디지까봐 암말 몬하고 참고만 있는 에미한테는
두 눈 까 디집고 생지뢀 잘도 헌다!”
라고 소리 고래고래 지르며 바리깡을 들고 나를 향해 돌진하시던 모친을 온몸으로 막아
태국은커녕 머리만 박박 밀려서 창문도 없는 다용도실에 감금당할 위기에서 구출해주신 것도,
그 와중에 머리 그까이꺼 밀 테면 밀어보라고 고개를 들이밀며
주정드립의 초절정을 달리던 ‘하이드’가 소심A형오지라퍼 ‘지킬’로 돌아올 때까지
양지 바른 곳에 뉘어 재워주신 것도,
그 사이 여행이라도 보내서 일단 마음부터 정리할 시간을 주자고
참으로 이성적으로 우리 모친을 설득해
태국행 승낙이라는 쾌거를 이뤄주신 것도 바로
(물론 술이 깨고 이성을 차린 뒤 손에서 연기가 나도록 빈 건 두 말하면 입만 아픈 일이다)
지금 영화 스피드의 산드라님 부럽지 않게 거친 질주로
나와 김덕수를 식은땀 나게 하는 언니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마운 것도 잠시,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가 타야할 항공편 수속을 곧 마친다고
서두르라는 안내방송을 듣게 되는 순간 다시 주리를 틀 여편네가 되고 마는 언니님이다.
모친께서 기도를 5분만 더 하셨어도, 욕을 3절만 더 하셨어도 놓치고 말았을 비행기를,
비행기 문이 닫히기 직전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겨우 탑승할 수 있게 해주신 모친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
이래 뛰어봐야 개 발에 땀이 괜히 나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
담부터는 절대 언니님의 배웅 따위는 받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해당 항공편 탑승 수속 마감에 보딩했으므로
나와 덕수의 좌석은 당연히(?) 따로따로 배정 받았다.
함께 앉는 것 따위야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어차피 떨어져 앉는다면 누구나 옆 좌석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 않은가.
난 기차 무궁화호에 오를 때도 옆자리 멋진 남성과의 므흣한 운명적 만남을 꿈꾸는,
아직도 소녀(?!)같은 감수성을 가진 그런 여자다.
특히 이제 난 외로움에 사무치는 싱글이 아니던가.
막판 보딩을 했으니 창가 자리 같은 건 언감생심 꿈도 안 꿨지만 찾고 보니 내 자리 안습이다.
네 개 붙어 있는 좌석 중 세 번째,
그리고 양쪽으로 포진하고 계신 국적불명의 할아버지(그것도 서로 다 모르는 사이의) 세 분.
긴 한숨과 소녀 같은 감수성은 접고 밥 먹고 잠이나 자자, 라는
서른 넘은 피곤한 여자의 현실성을 되찾아 온다.
그리고 감사한다. 나를 포위하고 계신 3분이 무적의 초딩 부대가 아닌 게 어디인가.
제 좌석을 찾고 내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온 덕수의 좌석은 창가 쪽이란다.
뭐 이따위 극단적 좌석 배정이 있을 수가?!, 라고 해봐야 전적으로 늦은 우리 탓이다.
내 자리를 본 덕수가 할아버지 속에 파묻힌 내가 좀 거시기(?) 해 보였는지
자기 자리랑 바꾸자고 하지만 귀찮다.
그리고 내가 갑자기 자리를 바꾸면 이 할아버지들도 기분이 유쾌하진 않으실 것 아닌가.
(라는 걸 신경 쓸 정도로 난 극소심 트리플에이형다)
덕수가 자리로 돌아가고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한다. 이때의 기분이 가장 야릇하다.
일단 뜬 이상 멈추지 않는 놀이기구에 탄 듯 한 흥분과 두려움이 섞인 그런 느낌 때문일 거다.
대한항공 기내식, 불고기 덮밥. 그저 그런 맛.
그리고 맥주 한 캔.
뱅기를 타면 솟구치는, 꼭 맥주를 마셔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
밥도 먹었겠다, 맥주도 한잔 했겠다, 수다 떨 상대도 없겠다
어젯밤 설친 잠을 보충하기로 하고 팔짱을 끼고 바로 취침 모드에 돌입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제2사건이 터진다.
1. 자던 중 급작스레 머리가 핑핑 돌며 현기증이 나더니
스무 살 철벽 위장 시절, 소주 6병을 대작하던 날 밤에도 느껴보지 못한
아찔한 구토감이 올라옴.
화장실에서 모든 걸 게워냈지만 돋보기안경을 쓴 것처럼
눈앞이 어질어질한 엄청난 현기증이 여전함.
2. 이마를 덮은 앞머리가 식은땀에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 창백하게 질린 채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내게 덮쳐질(?) 뻔한 불상사를 겨우 피한 승객이 부축해
승무원 의자로 옮김.
승무원들이 웅성웅성 모여들었으나 행여나 기내에서 제공한 약을 먹고 이상이라도 생길까봐
우려해서인지 그 흔해빠진 가스활명수 하나도 주지 않음.
3. 경이로운 초강력 텔레파시로 내 신변의 이상을 감지하고 김덕수가 달려옴.
하지만 덕수에게도 가스활명수 따위는 없음.
4.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리턴행 티켓을 끊어야 할 것 같은 환장할 상태가 됨.
5. 그때 저만치서 내가 꼴까닥꼴까닥 숨넘어가는 꼴을 주시하고 계시던 승객 한 분이
기적처럼 강림하셔서 정체불명의 약 한 봉지를 주심.
(정말 홍금보님처럼 이렇게 생긴 분이셨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생명의 은인이시다. )
승무원들은 물론이고, 평소 매사 너무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김덕수조차
만류의 눈빛을 쏘아댔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정상을 벗어나 있던 나는
리턴행만 타지 않을 수 있다면, 이란 일념 하나로 입안으로 냄새도 생소한
낯선 하얀 가루를 과감히 털어 버림.
덕수야, 혹시라도 나 잘못되면 모친 모르게 약물중독 재활치료원에 넣어줘...
6. 오 분 여의 시간이 경과 후 얼음장처럼 찼던 손발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눈앞에서 뱅뱅 돌던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며 현기증도 구토감도 사라짐.
십 수 명에게 에워싸인 채 모두의 우려 속에 진행된 약물 실험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음.
지켜보던 모든 이들에게서 마치 인류 의학을 한 발 진보시킨 듯 한 환호가 터져 나옴.
국제선 비행기에서 박진감 넘치는 메디컬 드라마를 한 편 찍는 생쇼를 벌인 나는,
덕수 옆 좌석 승객분의 배려로 자리를 옮긴 후 승무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덕수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승무원들은 그들의 직업이며 의무라고 생각해서 제공한 일종의 서비스였을지 모르겠으나
이 일회성 공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낯선 사람들이 베풀어준 친절과
차디찬 내 손을 꼬옥 쥐어준 덕수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잠결에도 마음이 뭉클했던 나는 바보처럼 또 찔끔 울고 말았다.
정말 드.디.어 태국에 도착했다.
비행시간은 고작해야 4시간인데 이렇게 긴 비행은 처음 한 기분이 든다.
어쨌든 무사히 태국에 발을 딛고 정말 놀라울 만큼 다시 회복된 컨디션이 다행스럽고 고마울 뿐이다.
공항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이걸 타고 시내나 다른 지역에 접근할 수 있는
버스를 탈 수 있는 공항 내 정류장에 간다.
비행기에서 나 때문에 많이 놀랐는지 이제는 지가 더 사색이 돼서 우려의 낯빛을 감추지 못한 채
계속해서 그냥 택시를 타고 가자는 덕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몸이 직접 카오산에 가는 버스표 두 장을 끊어온다.
김덕수씨 : 체력도 돈이야. 이제 막 왔는데 안 아픈 게 훨씬 중요해.
(사실 김덕수란 놈은 택시 따위의 편리를 위해 돈 쓰는 걸
굉장히 아까워하는 일인으로,
놀다가 막차가 끊기면 첫차가 다닐 때까지 놀다 귀가하는 청년이다. )
[나]란여자 : 알아. 이제 진짜 괜찮다고. 나 몰라? 무다리 스트롱걸?
김덕수씨 : (그제야 특유의 시골 웃음으로 히죽 웃는다)
덕수 놈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운 좋게 대기하고 있던 카오산행 버스에 오른다.
사실 택시를 타면 훨씬 편하고 쾌적하긴 하지만 로컬 버스를 타고 싶은 건
그만큼 내가 현지에 와있다는 느낌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나의 헤비 트렁크에 걸터앉아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방콕의 엄청난 정체의 물결 속에서 서다 가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이번 태국 여행의 첫 여행지이자 고향이 될, 카오산로드KhaosanRoad에 당도한다.
아, 벌써 덥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한겨울 한국과 한여름 태국을 통과해야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어정쩡하고 후질근한 노숙룩이
금세 차오르는 열기에 땀이 오르기 시작하는 몸에 휘감기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후끈한 열기가 그리워 온 만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조차 행복하고 신난다.
도착 첫날 크고 무거운 짐더미를 들고 여기저기 떠도는 게 싫어서
한국에서 예약을 마치고 온 G.H 사왓디 방람푸 인.
(방에 들어가 크게 당황했던 부분은 붙어있는 트윈침대)
가격대비 그럭저럭 괜찮았던 방.
손바닥만 한 바퀴벌레가 나오는 건 아닐까 많은 우려를 했으나 다행히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음.
카오산로드 중간에 있어 늦게까지 놀다 들어가도 편한 위치가 가장 큰 경쟁력이며,
(에어컨/냉장고/드라이기/핫샤워 제공)
짐 풀고 샤워하고 나니 아까 그 난리를 친 게 무색하게 배가 고프다. 또한 술도 고프다.
모친께 그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나를 굴하지 않게 하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팟타이와 비어 씽이 아니던가!
붙어있는 트윈베드에 대한 걱정 따위는 잠시 접고 당장 배낭여행자들의 메카,
카오산로드로 나선다.
Centerbar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카오산로드의 명소 실크바Silkbar.
유명세대로 늘 Westerner웨스터터터터터너들로 득시글거리지만
유명세만큼 좋은 점도 딱히 없는
30B이면 먹는 길거리 팟타이보다 못한 몇 배 비싼 팟타이와
역시 그저 그런 맛의 돼지고기 스테이크, 였음.
말이 필요 없는 건 그저 비어beer 씽singha 과 창chang 뿐.
팟타이에 내 사랑 비어 씽을 한 병을 그새 다 마시고 주문한
두 번 째 비어 창을 한 모금 넘겼을 때
덕수 놈이 카드 사이즈의 흰 봉투 하나를 내민다.
일전에 카드 사이즈 흰 봉투에 한번 후덜덜한 적이 있던 나로서는 이제는
저런 모양의 봉투만 봐도 괜히 주눅부터 든다.
[나]란여자 : 이게 뭐임?
김덕수씨 : 엄마가 줬어.
한국에 와서 언니 부부 내외, 고로 우리 완소 형부와 함께 우리집에 드나들던 덕수는
처음으로 형부를 동행하지 않고 나랑 집에 왔던 날 우리 모친을 장모님, 이라고 불러서
모친은 물론이고 원체 얌전하신 부친마저 씹던 밥을 공중분사 하게 만들었다.
이후 덕수의 설명을 듣자하니,
첫째, 외국인이라면 색안경부터 끼고 멀리하시던 -사실 부끄럽고 어색해서였던-
우리 모친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둘째, 나랑 언니는 모친을 엄마라고 하는데 형부는 다른 소리의 장모님, 이라고 부른다.
셋째, 그런데 형부가 장모님, 이라고 하면 모친이 그를 뭔가 예뻐하고 귀여워한다.
넷째, 남자 = 장모님 = 모친의 애정이라고 결론짓는다.
다섯째, 형부 앞에서는 좀 쑥스러워서 형부가 없는 날 불러보기로 한다.
(모친의 애정을 독점하고 싶었던 모양-_-)
이라는 나름의 주의 깊은 관찰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 모양이었으나,
그 날 덕수 놈의 장모님, 소리 한 번에 이후 한 석 달 열흘은
우리 모친의 집요한 의심과 추궁에 시달려야 했던 가장 큰 피해자가 나였음은
두 말 하면 역시 입만 아플 일이다.
어쨌든 지금은 우리 모친에게 완소 형부에 못지않은 총애를 받으며
나보다 더 효자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다행...이 아니라,
나의 설 자리만 점점 없어지고 있다. -_-
우야동동 나의 위기론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봉투 이야기로 돌아와,
김덕수씨 : 너랑 나랑 보라고.
[나]란여자 : 넌 봤어?
김덕수씨 : 응.
뭐지, 하는 궁금증 반 괜한 불안함 반으로 집은 봉투는 생각보다 두툼했고
봉투를 여니 카드 하나가 들어있다.
특별할 것 없는 밋밋한 카드를 펼치니 모친 특유의 휘갈김체 몇 줄이 쓰여 있다.
[덕수에게. 미국사람들은 자기일이 아니면 굉장히 무관심 하다고 하던데 너는 정말 착하다.
맨날 우리 모자란 딸 술 주정 받아주느라 네가 고생이 참 많다.
거기서도 우리 모자란 딸 술 취해서 주정 부려도 엄마를 봐서 잘 좀 챙겨줘.
부탁한다.
딸에게. 더운 나라 가서 너무 많이 울지 마.
그리고 올 때는 그 놈 다 잊어버리고 와.
너무 많이 사랑한다, 내 딸.
둘 다에게. 이 돈 보태서 좋은 데서 좋은 거 많이 먹고
아프지 말고 재밌게 잘 놀다와.]
읽는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참을 새도 없이, 소리도 없이 그냥 뚝뚝 떨어졌다.
어려서부터 잘못하면 매를 아끼지 않으셨던 엄하고 무서웠던 엄마.
입담은 늘 걸쭉하셔도 마음은 누구보다 여려서 누구한테도 모질지 못하는 엄마.
남에게 못할 짓 하고 살면 못 쓴다고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항상 양보하고 져주라는 엄마.
그래서 당신 배 아파 낳은 딸 눈에서 눈물 빼는 놈도
결국은 남의 집 귀한 아들이라고 악담 한번 안하신 엄마.
죄송하고 감사하고, 주신 사랑이 너무 깊고 커서 그저 한없이 목이 메었다.
앞에 앉은 덕수가 가만히 티슈를 내민다.
그제야 코를 훌쩍이며 눈물콧물 찍어내며 멋쩍어서 싱긋 웃자
덕수가 제 잔을 내게 부딪쳐 온다.
그리고 우리가 왜 이 여행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준다.
“Are you ready to forget your love? I am ready when you are!"
그래. 이제 진짜 시작이다.
나는 그를 떠나온 이곳에서 울고
나는 그가 있는 곳으로 갈 땐 더는 울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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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퇴근하고 밤 10시부터 지금까지 꼬박 쓴 게 이 수준입니다. ㅜㅜ
읽어주신분들 다 너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