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일동안의 가을방학 -9- 싸얌의 야경, 그리고 치앙마이로...
출국 13일째
일행은 이 날 저녁 치앙마이로 향했지만 나는 이틀 연속으로 장거리 버스를 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게다가 태국에 있다는 나의 SNS 포스트를 보고, 나와 팔로우되어있던 태국친구가 만나자는 댓글을 달아주었기 때문에, 버스티켓은 다음날 예약하기로 하고 방콕에서 하루 더 머물렀다.
점심엔 싸얌 근처의 짐톰슨 하우스를 구경하고 마분콩 쇼핑센터를 돌아다녔다.
짐톰슨 하우스엔 탐나는 제품들이 몇몇 있었는데, 좋은 품질과 디자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편이긴 했지만 전날의 잔고 출혈 탓에 입맛만 다시다 돌아왔다.
2차대전을 계기로 태국에 파병되었다, 전역후에도 태국의 매력을 잊지못해 방콕에 머무르며 자신의 집에 각양각색의 미술품을 수집했던 짐 톰슨.
나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수공업으로 비단 실을 뽑아내는 것도 흥미로웠다.
MBK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금연 표시판과 나란히 있던 총기, 두리안 반입금지 표시판.
히잡을 쓴 이슬람 여인들이 많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인종의 인파로 북적거리는 쇼핑몰에서 시간을 떼우다가 약속한 친구 Y를 만나러 싸얌 파라곤으로 향했다.
싸얌 파라곤 정문에서 만나자는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긴 했지만 그 정문이 1층을 말하는 건지, BTS와 연결된 2층 광장쪽을 말하는 건지가 애매했다.
겨우 겨우 와이파이 존을 발견해서 우리는 지하 스타벅스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후 출국하기까지 3번이나 더 만나고, 파타야로 여행도 함께 갈 만큼 친해졌던 Y의 첫 인상은
'와, 키크다.'
자신의 키가 171이라고 밝힌(내 추측엔 그것보다 조금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큰 키때문에 남자 사귀는 것이 쉽지않다고 토로했다.
다행히 내 키는 178(대외용 키는 180. 하하.)로 그녀보다 컸고, 그녀는 그 점에 안도하였다.
Y는 앞서 만난 친구들처럼 한글 랭귀지 스쿨을 수료했고, 영어교육 세일즈가 직업이라 영어도 유창했고, 간단한 대화는 한국어로 주고 받기 편할 만큼 우리 말도 잘하는 친구였다.
친절하고, 열정적이며, 한국에 3번이상 방문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문화에 관심이 많은 Y.
루프탑 바에 가고싶단 내 말에 그녀는 자신의 차를 이끌고, 나를 레드 스카이 바로 안내해주었다.
방콕의 야경은 아름다웠고, 라이브 연주는 은은하게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사실 재즈보컬이 서양남자라서, CD를 틀어놓은 줄 알았는데 나갈때 보니 라이브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더라.)
레드 스카이 바의 특징은 눕거나 등을 기댄 채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베드좌석이 따로 있다는 것.
독특한 그 좌석이 당연히 끌렸지만, 우리가 갔을땐 이미 만석이었다. ^^;;
2잔씩의 드링크를 마시고 그녀가 소개해 준 곳은 통로-에까마이 근처의 퓨전 레스토랑.
두툼한 쇠고기 스테이크가 무척이나 맛있었다.
메뉴에 "소주"가 있었지만, 알고보니 정체불명의 사케였다 ^^;;
그녀는 소주를 시키고, 나는 비어 씽을 시켜서 건배.
이 날 역시 계산을 모두 태국친구가 하려하기에 1차는 너가 샀으니 2차는 나의 몫이라고 어필했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나중에 나 한국 놀러가면 그땐 너가 사주면 돼."
식사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녀는 전승기념탑 근처에서 날 내려주었다.
K-POP이 울려퍼지는 차안에서 창밖의 가로등을 바라보며 노곤한 피로에 젖다가,
주고받은 몇마디의 농담에 웃음이 터진 그녀가 나의 허벅지를 때렸다.
차에서 내릴 무렵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있었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우리말로 "떨린다."고 혼잣말하였는데, Y는 그 말 뜻을 알고있었다.
"헐, do you know what it means?"
"응, 알지. 왜 떨려?"
"그냥."
풋풋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와 나는 서로의 눈빛을 확인했고, 갓길에 세워둔 차 안에서 우리 둘은 격정적으로..................
라는 전개는 없었고 거기서 손 흔들리며 빠이 ^^
"오늘 정말 고마웠어. 한국 가기전에 한번 연락할게!"
여행 14일째
저녁 무렵 휘양찬란한 디자인의 분홍색 2층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향했다.
다행히 여행사에서 같은 차를 타고 가는 한국인 말동무를 한명 만날 수 있었다.
정시출발따위 없는 여행자버스라, 차가 출발하기 까지 1시간 가량을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 마신 창 캔맥주 500ml는 어찌나 시원하고 달던지.
이날의 말동무는 30대 초반의, 고향이 나와 같은 부산인 I형.
이직을 준비하면서 생애 처음 1달 자유여행을 왔다는 형은, 너무 평범하게만 살아온 인생이 좀 후회가 된다는 이야기를 나지막히 털어놓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치앙마이 행 도로는 깜깜하기 그지없었지만 도착할때까지 잠이 오지않았기에 군대 야간경계근무 설때마냥, 별에별 이야기가 다 오고 갔다.
방콕을 떠난지 1시간 반 남짓 후 한번 휴게소를 들른 후엔 쭈욱 휴게소도 없이 6시간 이상을 달렸기에 이윽고는
삼겹살 먹고싶다.
탕수육 먹고싶다.
순대국밥 먹고싶다.
똠양꿍 먹고싶다.
이거도, 저거도, 그거도 다 먹고싶다..........
먹고싶은 음식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휴게소에서, 전자렌지에 데우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전투식량 비슷한 볶음밥을 사서 요기를 했다.
조리하지 않은 스팸같은 비쥬얼이었는데 꽤 맛이 있었다.
이른 아침 여행자 버스는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위 주유소에 여행자들을 내려다주고 돌아가버렸다.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호객행위하는 유일한 2대의 썽태우를 타고 15분 정도를 달리자 타페 게이트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인상깊었던 것은 기후가 다른 탓에, 방콕에선 볼 수 없었던 색색깔의 예쁜 꽃들이 피어있었던 것과
교육열이 뜨거운지 자주 볼 수 있었던 학원 광고 현수막.
우리 둘다 숙소가 님만헤민쪽에 있었기에, 다시 썽태우를 잡아탔다.
I형은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의 싱글룸으로 간다기에 작별인사를 하고,
나는 한인 게스트하우스인 "우유네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도에 표시된 soi 19가 보이질 않았다.
사실 soi 19는 잘못된 지명이었다. 하지만 지도는 얼추 맞았음에도, 지도를 너무 맹신하여 soi 19 팻말만을 찾다가 가까이에 있던 게스트 하우스를 찾지못했다.
현지인들에게 길도 몇번 물어보고, 30분 넘게 비슷한 자리를 빙빙 돌고있으니까 좀전에 길을 물었던 태국인 아저씨가 차키를 꺼내들고 다가와 자기 차를 타란다.
에어컨이 빵빵한 차안에서 겨우 숨을 돌리며 컵쿤캅을 연발했지만 님만헤민에 거주하는 그 아저씨조차 soi 19을 찾지못했다.
당연하지, soi 18이 끝이니까.
자동차를 타고 몇바퀴 근처를 빙빙 돌며 헤매다 "괜찮다. 곧 내가 우유네에 데려다주겠다."는 아저씨에게
"무척 고맙지만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은 싫다."고, 차선책인 미소네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가자 부탁을 드렸다.
치앙마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라는 아저씨는, 그날 중국에서 대학생 아들내미가 돌아온다고 무척 들떠있으셨다.
미소네 게스트하우스에 데려다 주는 걸로 그치지않고, 같이 안으로 들어가 "치앙마이에서 혹시 안좋은 일이 생기면 이쪽으로 전화하세요.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겁니다."라며 메모지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기까지 하였다.
역시, 태국인들은 친절하다.
미소네에 짐을 풀고 북부 오지마을에서 NGO 활동을 하는 도미토리의 룸메이트와 식사를 마친 후,
나는 해질녘까지 곤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