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남자의 인도차이나 표류기

홈 > 여행기/사진 > 여행기
여행기

수상한 남자의 인도차이나 표류기 <그리고 그녀들>

다동 6 4064
 
 
 
1991033460_nFuBtOSl_CNV000033_EBB3B5EC82AC.jpg
 
 
카오산이 왜 좋아?”
카오산은 뜨겁잖아. 카오산이 설령 상업성으로 인해 라스베이거스처럼 변해간다 할지라도 이 뜨거움이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카오산을 미워할 수 없을 거야.”
 

다시 생각해보아도 제법 근사한 정취가 있는 대답이었으나 영어로 묻는 통에 영어로 답했던지라 뜻이 제대로 전달됐다는 보장은 없어 살짝 찝찝한 구석이 있다.
방콕 시내 프라나콘 구, 방람푸 지역을 무대로 메인 거리라 할 수 있는 카오산을 위시하여 랏차담넘 끄랑, 짜끄라풍, 람부뜨리 등등 발음하기도 어렵고 얘기해봐야 알아먹기도 어려운 몇몇 거리와 그 일대를 통칭하여 카오산 로드, 약칭으로 카오산이라 한다.
세기 말, 단지 언어의 어감에서 풍기는 모호하고 복잡한 느낌에 국한되는 게 아닌 그 이상을 뛰어넘는 불안과 설렘이 좌충우돌, 불꽃 튀던 시기를 즈음으로 하여 그 불안과 설렘에 상관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나둘 여행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하나둘 몰려든 여행자들을 따라 하나둘 상인이 따라붙기 시작했으며 뒤이어 자본이 몰아치더니 여행사와 호텔과 밥집을 비롯하여 클럽과 안마소, 거기에 사기꾼과 창녀에 이르기까지 여행자를 위한 모든 것들, 또는 여행자를 위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구축되는 가운데,
세기 초, 그저 단어가 의미하는 바에 제한되는 게 아닌 그 이상을 넘어서는 정체 모를 기대감이 난분분하며 뭔가 새로운 세상 열릴지도 모른다는 근본 없는 희망이 요동치는 와중, 마침내 도래한 21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 정체 모를 기대감과 근본 없는 희망에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우후죽순, 마구잡이로 몰려든 여행자들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빵! 떠버린 명실상부, 동남아 여행의 베이스캠프.
태반의 젊은 여행자, 근사한 황혼의 여행자, 젊은 것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닌 어중된 나이의 여행자, 속전속결 단기 여행자, 무사태평 장기 여행자, 단기도 아니고 장기도 아닌 어정쩡한 기간의 여행자, 여행 생활자, 생활 여행자, 여행도 생활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여행자를 넘어 백인 여행자, 흑인 여행자, 황인 여행자, 혼혈 여행자, 빨간 여행자, 파란 여행자, 찢어진 여행자……
낮술 먹는 인간, 낮술 먹고 행패 부리는 사내, 쇼핑하는 여자, 타투 하는 소녀, 드레드 락을 하는 아가씨, FBI 신분증을 만드는 아저씨를 포함, 구걸하는 거지 떼들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맥주에 치킨을 뜯는 이들, 개떼들이 침 흘리듯 팟타이(태국식 볶음 국수)를 질질 흘리며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치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얽혀 나이와 출신과 성별과 계급은 물론 성적 취향과 선호 체위에 관계없이 에브리바디 프, 위 아 더 챔피언, 늴리리 맘보 해대는 무국적 공간.
 

그게 바로 카오산이다.
 
<카오산이 왜 좋아> 중에서.
 
 
 
 
1991033460_SjdPDznm_EBACB4ECA09C-19_EBB3B5EC82AC.jpg
 
 
다시 둘러보는 앙코르 와트는 역시 대단히 대단했다. 왕조의 멸망 이후, 수백 년 동안 정글에 둘러싸여 있던 앙코르 와트를 최초로 발견한 인물은 표본채집을 위해 숲으로 뛰어든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학자인데 왠지 축구를 잘할 것 같은 이름을 지닌 그가 실제로 축구를 잘했던 잘하지 못했던, 어떤 연구를 했고 어떤 성과를 올렸으며 어떤 삶을 살다가 어떻게 갔 간에 그가 세상에 나와 제일 잘한 일은 앙코르 와트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스스로 신과 합일한다 믿었던 군주의 광기, 그 광포한 소용돌이 아래 수많은 노예의 피와 땀, 목숨이 쌓여 축조되었을 앙코르 와트엔 통속적 신파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극단의 카타르시스와 극한의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예술적 광휘가 섬뜩할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 상상해 보기를, 앙리 무오가 미지와 조우했던 첫 순간이란 온전한 두려움이었으리라.
스러지는 하루를 향해 내달리는 태양의 정면을 마주 보며 천 년을 불타올랐을 석양의 사원은 그야말로 압권. 무망한 인간의 역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위대한 자연과 시간 속에 형형히 제 존재를 밝히고 있는 앙코르 와트는 다시금 넋을 놓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몸이 전율했다. 불경스럽게 담배 하나 태워 물어 깊게 내뿜었다. 나는 여기에 다시 오길 백번 잘했다.
 
<앙코르> 중에서.
 
 
 
1991033460_UhmTxZzc_EBACB4ECA09C-117_EBB3B5EC82AC.jpg
 
 
 
1991033460_CbhTNz4Y_EBACB4ECA09C-119_EBB3B5EC82AC.jpg
 
 
 
헤이~, 여기서 뭐 해?”
잔뜩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듯 균형감각을 잃은 눈동자와 연체동물을 카피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는 어떤 녀석이 다가와 물었다. “보면 모르냐?” 되물을까 했으나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유의 실존적인 질문을 던질 기세였는지라 그냥 저스트 드링킹이라고 답했다.
 

킴벌리 넌 디퍼런트 클래스 같아.”
취기는 주접을 부르는 법, 녀석은 그 취중의 수순을 철저히 밟았다. 취중이라면 나도 못지않았기에 서슴없이 말했다.
헤이, 킴벌리는 나와 세임 클래스지.”
그리고 이어진 킴벌리의 마지막 대답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오래도록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 노바디 이즈 인 유어 클래스.”
누구도 너와 같은 클래스일 수 없어. 혹여 왜 내가 너와 같이 묶여야 하는데?’ 같은 불만을 표시한 거라던가 너야말로 독보적 또라이지라는 숨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의 상황과 그 상황에 따른 인물구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자면 절대적 호의에 가까운 단언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아아! 사나이 심금을 울리는 주옥 같은 명대사.
 

그녀와의 키스는 응당 내 것이어야 했다.
 
<그녀와의 키스는 응당> 중에서.
 
 
 
 
 
1991033460_X4lujDGq_CNV000028_EBB3B5EC82AC.jpg
 
 
 
1991033460_2gYFvmLu_EBACB4ECA09C-71_EBB3B5EC82AC.jpg
 
 
 
저는 상품을 하는 사람이지 작품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느 노 선배에게 건넸던 대답처럼 내가 빠이에서 본 것은 작품이 아닌 상품이었고 예술이 아닌 문화였다. 그런 의미에서 빠이는 내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령과는 적잖이 차이가 있는 마을이었다. 하여 나는 감출 수 없는 실망감에 젖어 에이, 제기랄. 그러면 그렇지낙담했을까? 까놓고 얘기하자면 정반대, 외려 그래서 좋았다.
갖은 인상을 쓰고 인고의 노력을 토해내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내리는, 흡사 정신착란에 가까운 고난의 과정을 통해 창조되는 (심지어 스탕달 신드롬을 부른다는) 묵직한 아우라가 아니라 발랄한 아이디어로 넘쳐나는 그 가벼움이 좋았다. 그 산뜻하고 화목한 풍경이 사람을 고조시켰고 고민 없이 동조하게 만들었다. 오래 머물고 싶다는 열망은 거기에 기초하고 있었다. 나이 든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타협인지, 애당초 예술에 뒤따르는 재능이나 열정이 부재한 자의 자기 위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가벼움이 더없이 좋았다. 거기 그 마을에 한자리 펴고 싶었다. 좌판 하나 깔아놓고 물건을 팔거나, 사진을 찍거나, 퍼포먼스를 하거나, 나무를 깎거나 (늘 해왔던 방식대로)사기를 치거나 뭐든 간에 하나는 하고 싶었다. 빠이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빠이에 살어리랏다> 중에서.
 
 
 
세 권의 쓰리즈를 기획, 서 푼 어치 재주로 휘갈겨 쓴 잡소리가
좋은 파트너를 만나 첫 번째 선을 보입니다.
 
현제 태국 빠이에 머물며 글을 쓴다, 사기를 치는 와중,
이런저런 아가씨들과 두런두런 마시는 일로 청춘을 소진하고 있습니다.
 
 
 
 
1991033460_cMrwKQT0_jin_1_copy.jpg
 
 
 
 
▶ 작가 소개
 
서영진
 
 
 
  술을 즐겨 하고 여자를 사랑하는 일을 천명으로 아는 명문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술과 여자를 즐겨 하고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났으며 술과 여자에 환장하는 한량으로 성장했다.
 
공예와 사진, 행위예술을 한답시고 각종 사기를 치고 다니다
현재, 꽃무늬 캐리어에 블랙 슈트와 화이트 코트 그리고 대금으로 무장, 주색잡기의 달인이자
퇴폐와 낭만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 존재를 담보로 예정할 수 없는 길에 올라
화양연화, 생애 가장 아름다운 한 시절을 살고 있다.
세계 각국의 그녀들과 함께, 만국의 술을 마시며.
 
 
▶ 추천평
 
 
 
 
 
 
 
못 말리는 휴머니스트의 로맨틱 열대야
 
서영진,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근사한 또라이. 그는 아름다움을 탐하는 일에 온 생을 건 사람 같다.
6 Comments
낯설움 2014.01.01 22:39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여행기.
리얼이지만 환타지 같은.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다동 2014.01.02 21:06  
기다림에 실망이 없기를 바라봅니다.
웰리 2014.01.04 11:22  
다동님 글 읽으며 글 되게 잘쓰신다고 생각했는데 책 내셨네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대박나시길 기원합니다~
다동 2014.01.04 14:13  
태국 빠이에 머물며 두어 권의 책을 더 쓰고 있는데,
잘 될 지는 모르겠네요. 기원, 감사하게 받습니다.
상아씨 2015.03.23 23:15  
아 이 분 글 섹시하시네.
다동 2015.03.24 00:11  
낯짝은 더 섹시합니다. 하하.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