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빠이(Life Of Pai) 프롤로그. 그리고 그녀
버들잎 지는 앞개울에서 소쩍새 울기만을 한없이 기다려봤음직한 그녀, 사랑에 속고 돈에 울어 말 못할 상처 하나쯤은 깊이 감춰뒀음직한 그녀, 엇갈린 인연과 비정한 운명에 휩쓸려 오랜 세월 먼 곳을 바라봤음직한 그녀, 어느 때엔가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며 무작정 마음을 내려놨음직한 그녀. 매정한 세파에 찌들어 눈물깨나 쏟았을 듯 허공을 닮은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그녀. 손목에 깊게 패인 흉터, 그 쓰라린 기록을 지닌 적나라한 손길로 내려준 한 잔의 커피는 물색없이 달았다. 무람없이 따뜻했다.
Three Dogs Night. 너무도 추운 날이면 한 마리의 개를 끌어안고, 그래도 추우면 두 마리의 개를 끌어안고, 심각하게 추우면 세 마리의 개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는 에스키모 인들에게서 온 이야기.
평소 됨됨이가 부실하고 생각이 짧은 데다 성정이 난폭하여 주변 지인들을 포함, 가족 친지들로부터 유독 개에 자주 비유되곤 했던 존재론적 캐릭터를 살려 그녀의 애완견인 동시에 반려견으로 활약하고자 환희의 절정, 37.2도를 훌쩍 넘겨 고열에 괴로워하던 그녀를 안고 있던 벌건 대낮. 배꼽에 마주 닿은 채 낭창하게 휘어진 허리, 움푹 꺾여 내린 굴곡을 지나 매끄럽게 솟은 둔부, 휘날리듯 흘러내리는 몸체에 비해 사뭇 불끈한 기운이 배어있는 젖가슴, 무엇 하나 툭 털어내려는 듯 선명하게 잘린 짧은 머리카락을 가슴에 얹고 뜨거운 숨 토해내던 그녀를 휘감고 있자니 여백 없이 굳어지는 마음 하나.
나는 이곳, 빠이에 오래도록 머물겠다.
옛 이름은 시암(Siam), 언제 겪어도 기분 좋은 나라 태국. 태국 북부, 방콕에 이어 제 2의 대도시 치앙마이(Chiang Mai)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매홍손(Mae Hong Son)으로 가는 산길의 딱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소읍, 빠이(Pai).
누군가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하여 유토빠이(UtoPai), 빠이라다이스(Pairadise)라 했고 다른 누군가는 영혼도 쉬어간다, 하여 세계 배낭여행자들의 안식처라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들어갈 땐 마음대로 들어가도 나올 땐 마음대로 못 나온다, 하여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고 했던 가운데 또 다른 어떤 누군가, 그 문제적 또 다른 어떤 누군가!
아름다움을 탐하는 일에 전 생애를 걸어버린 전위적 한량, 술을 즐겨하고 여자를 사랑하는 일을 천명으로 아는 명문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허리춤에 닿는 기다란 머리카락에 블랙 슈트와 화이트 코트로 무장한 채, 꽃무늬 캐리어에 대금을 꽂아 넣고 주색잡기의 달인이자 퇴폐와 낭만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 존재를 담보로 예정할 수 없는 길에 올라 화양연화, 각색의 그녀들과 각국의 술을 마시며 삶의 가장 빛나는 한 시절을 살고 있는 남한의 어느 날건달, 시뻘건 색 명함에 새겨진 이름 Suspicious Jin, 그 수상한 작자에 의하자면 나머지 생을 투신하고 싶다던 바로 거기, 그 빠이.
꽃피고 새 우는 풍경, 바람은 맞춤하게 달려가고 햇살은 따끈하게 녹아내리며 시선의 바깥으론 바나나와 파파야, 망고와 망고스틴이 익어가는 일견 안락한 그림을 지닌 열대의 평화로운 시골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을 시작으로 멀지 않게 폭포가 쏟아지고 계곡이 흐르고 협곡이 드리워져 그야말로 흠 잡기 어려운 진경산수를 구현하는 가운데,
일단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예쁘며 오밀조밀하게 예쁜 갖가지 상점들과 술집들과 식당들이 마치 총칼에 맞서 꽃으로 싸웠던 사람들처럼 획일성이라는 시대의 폭압에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저항하려는 듯 저마다 색다른 치장과 또 다른 개성으로 나름의 모양을 자랑하는 와중, 화려하되 부담스럽지 않고 소소하되 조잡하지 않으며 현란하되 따뜻한 데다 재기발랄하되 조화로운 흐름을 유지하는 도시가 지척에서 손짓하고 있으니,
자고이래로 결핍은 동경을 낳는 법이라고 일생을 촌놈으로 살아왔기에 무척이나 도시를 염원했던 수상한 작자가, 허나 막상 도시로 나서게 되면 촌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해 이물스런 거부감을 휩싸여 별 게 다 짜증난다며 시, 때 없이 꼬장과 깽판을 일삼아 저 새끼, 저거 언제 사람 되나? 주변의 의문을 맹렬히 자아내게 했던 그 수상한 작자가 만난 가장 이상적인 읍내. 지나치게 세련되지도, 지나치게 커다랗지도, 지나치게 복잡하지도 않은 그 적정의 밀도와 농도에 마음이 훌쩍 휘청거렸다.
오래 두어 깊이 묻혀있던 열망을, 어쩌면 생래적 부재에 가까워 더욱 뜨겁던 선망을 더없이 멋스러운 형태로 재현하는 동시에 골수까지 촌놈이 되어버린 자에게 숨을 불어넣고 눈을 붙여주기에 한없이 좋은 시골이 인근에서 안아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상과 이상의 앙상블, 극단과 극단이 어우러진 화해와 공존의 장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
가장 익숙한 것에서 오는 향수와 가장 낯선 것이 주는 설레임. 여행자들은 생활인이 되고 생활인은 어느 때고 여행자로 변신할 수 있는 쌍방향 입체 서라운드 시스템. 여타 여행지의 왁자한 혼돈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소란으로 사람을 홀리는 곳. 내가 살아왔던 ‘거기’와 같으면서도 또한 전혀 다른 ‘여기’는 엑소더스(Exodus)라는 매혹적인 모험을 부추겼다. 머리에 꽃을 꽂고서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 자들로 인해 자유와 방랑, 응전과 해방을 젖줄로 하여 자라온 유기체적인 마을, 빠이에 오래도록 살고 싶어졌다. 언제나 낭만적으로, 때로는 퇴폐적으로 나머지 생을 잘라 술과 장미의 나날을 보내며.
그리고 그녀.
순간을 비집고 들어선 저물녘, 색색의 활기로 메워진 빠이의 타운에서 함께 나누는 저녁식사. 끼이익, 울리는 브레이크 소음과 함께 우리를 향해 멈춰선 어떤 스쿠터 아가씨를 그녀는 설명했으니 여기에서 빵집을 하고 있으며 그 아가씨의 남자친구는 미국에서 왔고 식당을 하고 있다고. 이에 물었다.
“너는 여기에서 카페를 하고 있고 네 남자친구는 한국에서 왔으며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맞아?”
“응, 맞아!”
빠이 이야기, 나의 <Life Of Pai>는 이로서 시작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