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1. 인천 -> 방콕

홈 > 여행기/사진 > 여행기
여행기

[느리게 여행하는 법] 1. 인천 -> 방콕

피비 7 5294
한달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귀국한 지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네요.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는 여행기를 마무리할 때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 저는 사진기를 챙기지 않습니다.
여행기도 쓰지 않습니다.
다만... 매일 수십 밧씩 비는 가계부만 열심히 쓸 뿐.



풍경은 내 눈의 수정체에, 감상은 우심실 좌심방 한 켠에,
담아 온다는 언제나의 계획은...
여행 중엔 더없이 환상적이지만 귀국 후엔 타인에게 증명할 길이 없어 늘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여행 땐 마음먹고 던킨도너츠 판촉용 다이어리 수첩을 들고 갔습니다.
절대 짐이 되지 않도록, 나중엔 여권보다 더 귀중해지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한달 여행 일정은 나름 빡빡했습니다.
방콕 - 치앙마이 - 빠이 - 꼬싸멧 - 칸짜나부리. 무려 다섯 군데를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빠이에서 끝났어야 하는데 중간에 친구들이 와서 일정이 급해졌습니다.


한달이면 방콕, 앙코르왓, 치앙마이, 라오스, 푸켓까지 섭렵하는 대단한 여행자들도 계시지만
저도 저만의 여행 스탈~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벽히 올림픽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 사실 내세울 만한 것은 못되지만 소개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요. 



“더 느리게, 더 낮게, 더 가까이...”



한달 배낭여행은 느리게 여행하기엔 너무 짧은 일정입니다만
저는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느리게'를 노력합니다.



치앙마이에선 고산족 트랙킹 대신 치앙마이대학 호수를 찾았고,
빠이에선 온천 대신 비밥BAR에 몸을 담갔고,
꼬싸멧에선 숙소만 옮겨 다녔고,
칸짜나부리에선 매일 야시장만 돌아다녔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모두가 열심히 때를 미는 그 치열한 현장에서도, 게으름을 피우는 게 저입니다.
세면도구를 챙겨 동네 목욕탕을 가는 기분으로 여행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건만 그래도 한결 깨끗해져서 돌아왔는걸요... 



자, 이제 알록달록 분홍색 줄무늬 다이어리 첫 하드커버를 넘깁니다.
여동생-_- 아니, 옆집누나-_-의 일기장을 엿보듯 읽어주시길요...




------------




2002 한국 월드컵부터 2006 독일 월드컵까지.
나는 매년 태국에 온다.
첫 번째는 처음이니까 두 번째는 그 담이니까. 세 번째부턴 구실이 필요하다. 태국에 꼭 가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의 위태로운 연애는 내겐 좋은 구실이었다.
태국에 있는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 중인 그녀는 최근 불화설을 보이며
급기야 짜오프라야 강에 자살하러 가겠다는 말까지 내뱉었다.
나는 기꺼이 동행하기로 했다.
자살방조자의 배역이 주어졌으니 무대가 있는 태국으로 가면 된다. 



그러나 여대를 십년째 다니고 있는 그녀는 기말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1학점’짜리 실험 수업을 빠질 수가 없어 짜오프라야 일을 연기해야만 했다.
대학생들의 정식 방학 이후로.



나는 그녀를 기다릴 수 없었다.
사전 답사를 위해 먼저 떠나기로 하고 6월 6일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나의 돌발행동에 ‘그’는 평소 성격답지 않게 적극적으로 나의 여행을 반대했다.
그의 논리는 분명했다.
둘보다 혼자가 좋아 한달씩이나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무심한 여자친구를 그대로 방치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난 인천공항 50번 게이트 의자에 앉아 있다.



공항까지 마중 나와선 버림 받은 아이 얼굴을 하며 끝내 토라진 채 굿바이를 하던 ‘그’가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좋진 않았지만
양 옆으로 면세점이 쭉 늘어서 있는 게이트 안에서 나는 슬며시 웃음을 쪼개고 만다. 그리고 이내 반성한다.



그는 단순히 내가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가는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다.
마치 '원더랜드'를 찾아 떠나는 '앨리스' 같은 꼴을 한 내 모습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래. 최소한 인천을 뜨기 전까진 덜 즐겁게 굴자.
한껏 부푸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새벽 돈무앙 공항에서 함께 택시를 타기로 한 일행을 찾기 시작했다.



전직 호텔리어 26세, 띠 동갑 남친 24세, 팔레스타인 남친 24세.
타이페이 경유 방콕행 에바항공 탑승 게이트에서 세 명의 그녀들을 만났다.



호텔리어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공항에서 그의 전화로 그녀에게 연락을 취했으므로.



“남자친구가 되게 활달한 거 같애요. 목소리가 아주 밝으시더라구요.”



탑승 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심란해하던 그 역시 내가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웃음을 쪼갤 때
인천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아주 간단히 일상으로 복귀해버린 걸까.



왠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는 느낌이다.



Bye Bye~ 모든 것들아~




.......





정말 모든 것과 Bye~ 할 뻔 했다.
기상악화로 기체가 마구 흔들렸고 복도에 있던 몇 명 스튜어디스가 크게 휘청거렸다. 종이백에 멀미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 불길하다...


7 Comments
삼천포 2006.07.21 09:03  
  불, 불길하다... 로 시작된 여행기..
길, 길하다...로 끝날 것 같습니다...
님의 섬세한 표현력에 아침 댓바람부터 신선한 충격
받습니다.~^^
JLo 2006.07.21 10:16  
  오웃. 이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삐질이 2006.07.21 12:15  
  ^^ 저랑 여행스타~일이 비슷하시네요.  저도 느려터지게 여행하는 스타~일 입니다TT 한곳에 오래 머물먼서 서두르는 일이 거의 없고, 매번 갔던 곳 또 가고(한나라를 10번이상 다닌 곳도 있습다 ㅡㅡ)...  이번에 태국이 첨인데 과연 몇번이나 가게 될란지 ㅎㅎ  후기 기대할께요~~  빨랑 올려주삼
신디홍 2006.07.22 13:29  
  우아..빠이 야그가 기대되네여?ㅋㅋ나는 빠이  비밥전도사...ㅋㅋㅋ 아주... 기대되여....
액자 2006.07.22 22:06  
  재미있게 천천히 감상하겠습니다.^^
피비 2006.07.24 02:19  
  삐질이님~
쪽지로 질문 하나 드려도 될지? 열번 이상 다닌 곳이 어디인가요? 너무 궁금해염.
삐질이 2006.07.24 13:01  
  쪽지 보냈어여 ㅎㅎ
포토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