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날, 같은 도시. 다른 상황
1.
그때 우리는 북경역 앞을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 이날은 관광지를 둘러볼 일정은 생략하고 한국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우따오커우 어언문화대학 근처 가서 인터넷이나 할 생각으로 버스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게 보인다.
무슨 구경거리인걸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꽤 격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깡마르고 성깔 있게 생긴 중국 남자가 한 여성 여행자의 가방끈을 꼭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광경이었다. 여자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용을 쓰고 있고 남자는 앞으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앙 다문 표정으로 보아하니 여간해서는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여행자는 두 명의 백인 여성들이었는데, 한명은 약간 나이가 있고 가방을 움켜잡힌 여성은 좀 더 젊은 쪽이다.
구경 중에 제일 재밌는 구경이 불구경과 쌈구경이라지만, 이 상황은 내게 그저 강 건너 불구경 같은 게 아니었다.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점만으로도 그녀들과 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아닌가.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빠져 나가려는 두 여성과 절대 호락호락 놓아 줄 것 같지 않은 인상의 남자, 그리고 중국인 특유의 그 뚱한 눈빛을 한 체 꾸역꾸역 모여드는 인파들 사이를 비집고 나는 ‘don't do that' 이라고 소심하게 외치며 남자를 보고 팔을 휘저으며 말리는 시늉을 했다. 그 와중에서 don't do that 이라니... 어차피 그는 내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말이다.
하지만 내 행동이 여행자의 관심을 끈 것은 분명했다. 나이든 여성이 나를 향해 영어로 뭔가 빠르게 이야기 했는데 말은 이해가 안됐지만 눈빛이 너무 절박해서 난 잠시 얼어붙어버렸다.
상황은 이러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실랑이 하는 와중에 그리된 건지, 아니면 우연히 부딪혀서 그런 건지...) 그 남자는 알이 하나 빠져 버린 검은 선글라스를 그녀들에게 들이대며 보상을 하라는 것이었고, 그녀들은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단지 이 당황스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기만을 원하는 것이다. 어쩌다가 안경이 깨진걸까....
그 와중에 경찰이 왔다. 적어도 경찰이 오면 이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 될 거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경찰의 등장은 더 많은 구경꾼을 끌어 모았고, 남자는 남자대로 그녀들은 그녀들대로 경찰을 향해 뭔가 주장을 해댔지만 경찰은 어느 쪽의 이야기에도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원하는 남자, 자유를 원하는 여자들의 악다구니는 점점 거세져서 경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후려갈기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쥐고 흔들고 무릎을 구부려서 차는 시늉을 해댔다. 나이든 여자의 please 소리만 애처롭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그저 안타깝기만 할뿐이다.
현지인과의 싸움은 어떻게든 피해야할 상황이지만, 그게 나만 조심한다고 되는 문제도 아닌지라 그녀들의 상황이 참으로 난감해 보일뿐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지만 별 소용없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녀들에게 이곳 베이징은 과연 어떤 곳으로 기억될까....
2.
따짜란지에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는 원동호텔이 위치하고 있는 골목으로 크고 작은 빈관들과 식당들, 상점으로 꽉 차 있는 곳이다. 우리 맘에 쏙 드는 티엔하이(천해天海) 식당도 이 길에 위치하고 있어서 외국인 여행자들이 심심찮게 들리는 곳이다.
이날 식당에는 우리 말고도 두 세 팀의 여행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중국인 손님들이 주문한 요리가 나오자 호기심을 참지 못한 대머리 서양애가 그쪽으로 가서 ‘한 젓가락만 먹어봐도 되겠냐’ 며 양해를 청한다. 중국인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뿐만 아니라 아예 작은 접시를 얻어 거기에 덜어주기 까지 했다. 그리고는 장난스럽게도 자기가 쓰고 있는 중국식 빵모자를 그 대머리 에게 씌워 주었다. 한동안 그 모자를 쓰고 있던 대머리 서양 남자는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일어나더니 모자를 벗어들고 동냥하는 액션을 취하며 각 테이블 마다 돌아다닌다. 물론 돈은 한 푼도 얻어내질 못했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서 웃음을 자아냈다.
자연스럽게 모자를 돌려주는 과정에서, 식당에 있는 우리들은 국적도 인종도 모두 다 달랐지만 잠시나마 즐거움이라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흥겹고 세련된 분위기가 작은 식당 안을 메우고 주인도 몇 마디 농담을 하며 (물론 이 말엔 중국인들만 반응했지만...) 더 큰 웃음을 자아냈다.
이 흥겨운 상황 속에서 불현듯 북경역의 그녀들이 생각났다. 아마도 인생이 전부에게 공평하지 않듯이, 같은 공간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얻는 것과 치러야 하는 것은 모두 다 다른듯하다.
앞으로 남은 석 달 남짓한 중국 여행 동안,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경찰을 부르거나 대로변에서 낯선 눈동자들에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는 처지에 처하지는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