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고립된 낙원 Balar>써핑에 도전하다
모두가 잠을 자는 시간에 움직이는 일은 비밀스럽고, 뭇 환경이 낯설게 다가들며 가슴에 서늘함을 안긴다. 직장에 매인 몸이라 시간을 아끼려는 요량으로 금요일 밤 잠깐 눈 부치고 새벽 1시에 BALER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과일 행상이 들락날락거린다. 도시는 불을 끄고 잠을 자는지 고즈넉하다. 마닐라에서 벗어나 몇 시간 잠을 청하고 휴게소를 들렀는데, 옆자리 승객이 미처 타지 않았음에도 버스는 무정하게 출발한다. 어찌할지 망설이는 동안 버스는 벌써 동네를 벗어나고 말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차장에게 짐 가방을 보여주며 승객이 안탔다고 하자, 차장은 난색을 표하더니, 큰 버스를 요리조리 돌려 다시 휴게소로 돌아간다.
휴게소에서 기다리던 그 사람은 당황하지도 않고 편의점에서 잔뜩 장을 본 바구니를 들고 유유히 탄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곳은, 그러니까 필리핀이구나..’ 빙그레 웃고는 또 다시 잠에 빠졌다. 꼬불꼬불 고갯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이번엔 하늘이 잔뜩 흐리다. 비에 갇혀버리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텐데...짧은 일정에 무리해서 온 곳이 잠깐 후회가 되어 하늘만 쳐다보았다.
정류장의 트라이시클 기사는 다른 동네와 달리 호객을 하지 않는다. 마치 공항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것처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가 승객 하나하나를 맞는다. 도시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미리 검색해 온 코스타 퍼시픽카나를 찾아갔더니 리조트 가격이 만만치 않다. 하룻밤에 20만원이라니, 뉴질랜드 4성급 호텔도 7,8만원에 묵었는데...우리 학교 도우미들 한 달 월급이 20만원인데 싶어서, 배낭을 들고 돌아 나왔다. 며칠 전 우리 학교에서는 필리핀 도우미들의 스트라이크가 있었다. 결근하면 월급에서 공제해버리는 행정실 처사에 모두들 불만을 품은 것이다. 일 년에 5일이나 쉬는 날을 주는데 그 이상 결근하면 당연히 월급에서 제하는 것이 당연하지 하면서 대다수의 한국인 근무자들은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아예 무관심하다. 우리는 과연 1년에 5일만 쉬는지 묻고 싶다. 방학도 있고 연가도 있지 않은가? 나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가혹한 잣대가 마뜩찮다.
적당한 가격의 호텔에 짐을 풀고 무슨 바람이 부는지 서핑을 배웠다. 아들아이와 여행을 다니면 으레 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이번엔 아이도 원하지 않는 활동을 혼자서 호기롭게 배우다니...몇 번을 넘어지고 파도에 휩쓸리길 반복하다가 보드위에 서서 파도를 타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남편이 잘 포착해서 사진으로 찍어줬다. 얼굴도 검어지고 어깨 죽지도 아프지만 그렇게 하고나니 뭔가에 푹 빠져 해본 일이라 뿌듯했다.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낫고, 보는 것보다는 직접 해보는 것이 더 낫다. 보는 것에만 족한 건 관음증과 유사하다.
삼미구엘 맥주에 곁들여 칠리 크랩과 스팀 크랩을 세 접시나 비우고,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에서 아이와 고함을 지르며 잡기 놀이를 하고 나니, 먼 곳까지 왔던 후회도 사라지고 기쁨이 넘실거렸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비는 밤새 쏟아졌다. 오늘밤에 한국으로 가는 남편 비행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까 전전긍긍하며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부처님께 좋은 날씨를 달라고 기도하다가 맘을 바꿨다. 그건 부처님 소관이 아니란 생각에. 대신, 날씨에 구애받지 말고 이곳에서 추억을 남긴 뒤 무사히 마닐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여기서 행복한 여행으로 마무리 짓는다면 비가 오든 말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바다가 아련히 펼쳐진 식당에 앉아 광활하게 펼쳐진 해변을 무작정 바라보고 있자니 집에서 쉬고 싶었던 마음을 이기고 이곳에 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짧은 일정에 날씨까지 좋지 않았지만 길 위에서 유동하는 설렘은 늘 그 이상의 행복을 선사한다.
커피를 마시며 오늘 일정을 짰다. 어제는 서핑을 했으니 오늘은 도시를 투어하기로 했다. 이 소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최초의 시장이었는지, 박물관과 미술관엔 과연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하며 도시를 돌았다. 그러다가 외곽의 명소도 들렀다. 제주도 주상절리 저리가게 아찔한 절벽, 흔들다리, 도시가 한눈에 조망이 되는 전망대...부처님께서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기로 하셨는지 5시간 걸리는 직행버스도 무사히 예매하고 뜸해진 빗줄기를 틈타 명소에서 사진도 찍으니 저절로 충만해지면서 흔들리던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느닷없이 이 도시가 사랑스러워진 것은.
언젠가 꼭 한 번 다시 와서, 그때는 구석구석 샅샅이 이 도시를 훑어가며 서핑 속에 빠져봐야지...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얼기설기 엮은 대나무 집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엔 하룻밤에 몇 십 만원 하는 휘황찬란한 리조트도 있지만 후미지고 열악한 나무집들도 있다. 빨랫줄엔 빨래가 널려있고 아낙들은 까르르 웃는다. 저마다 크기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불빛을 내비치며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 앞에 가슴이 뭉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