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라왁-파굿풋-비간> 일로코스 노르테
1.
한국인 납치 사고가 잇따르는 요즈음, 필리핀은 가진 게 많은 것이 도리어 장애가 되는 나라다. 택시를 탈 때도 의심의 눈초리를 멈출 수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목걸이나 반지를 빼놓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한국인을 표적 삼아 일어나는 범죄를 뉴스에서 연일 보도하니,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모르쇠로 일관하긴 어렵다. 아이의 하굣길도 항상 신경 쓰이고 나 역시도 밖에 나갈 때마다 단속을 해야 하는 통에 안전이란 공기 같은 거였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안전한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것이 몹시 괴롭다.
일로코스 배낭여행은 여러모로 강행군이다. 마닐라에서 비간을 거쳐 라왁, 파굿풋까지 열네 시간 거리니 녹록치 않다. 비간의 숙소 하나만 예약해놓고 파사이 파르타스 버스터미널로 가서 라왁행 버스를 탔다. 모든 것이 전산처리 되는 한국과 달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펀치로 전표의 날짜와 요금을 뚫는 매표원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정겹다. 커다란 배낭은 선반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넣고 무릎담요 한 장을 꺼내 아이도 덮어주고 나도 덮었다.
마닐라의 야경을 제대로 본 적이 언제던가? 트레픽이 걱정되어 마닐라 베이의 석양을 음미하다가도 6시면 뛰어 들어왔던 날들이지 않은가? 마치 야간투어로 도시를 보듯 시내를 조망했다. 크리스마스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도시는 온통 선물상자를 포장한 듯 반짝반짝 빛난다. 어둠은 마닐라의 가난을 모두 숨겨준다. 어둠이 감춰버린 도시의 뒷골목,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작은 배낭에서 꺼내 불빛에 비춰보았다. 그가 열하에 무박4일로 도착하고서 잠의 유혹을 묘사한 부분이다.
‘ 포근포근 잠이 엉기고 아롱아롱 꿈이 깊어갈 제는 천상의 즐거움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 달콤하기 그지없다. 바야흐로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처럼 울려 퍼지고, 공중에선 꽃들이 어지럽게 떨어진다. 이런 때엔, 비록 추녀가 높은 고대광실에 한 자나 되는 큰상을 받고 아리따운 시녀 수백 명이 시중을 든다 해도,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돌방에서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장주의 호접도 아닌 그 사이에서 노니는 재미와는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고미숙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야간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단다 하면 다들 몸 생각하라고 만류한다. 하지만 박지원과 비교해보면 이건 고행 축에도 못 낀다. 열하에 가고 싶은 열망으로 견마꾼 창대가 부상을 입자 손수 말의 고삐를 쥐고 안장에 올라타, 나흘간 잠 한 숨 못 잔다. 오죽하면 나중에 연암산중에 들어가면 천일에서 하루 더 잠을 취하겠다고 다짐을 했겠는가?
이제 버스는 도시를 완전히 벗어나 울퉁불퉁 국도를 달린다. 운전사 아저씨는 속도내기에 여념이 없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내 목숨을 의지하고 있구나...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어 아저씨의 안전운행을 기원했다. 그가 우릴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동안 우린 밤하늘의 별을 보든지 까무룩 잠이 들든지 그것이면 족하니 야간버스가 힘들단 말은 차마 나오지 않는다. 10시간 걸린단 여행정보지와는 달리 비간까지 6시간 걸렸다. 새벽 1시. 휴대폰 액정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라왁이다. 시간은 다시 새벽 3시. 바로 옆의 버스가 파굿풋으로 간다 해 서둘러 갈아타자마자 버스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출발한다. 드디어 새벽 5시. 파굿풋이다.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게 어디를 갈 거냐며 트라이시클 운전사들이 달려든다. 잠에서 덜 깬 아들아이는 어리둥절해하고 눈치 빠른 운전사가 투어사진을 갖다 주면서 하루 전세 내는데 600페소(만오천원)라고 한다. 그가 제시한 가격이나 사진보다 더 내 맘을 끈 것은 먼지 하나 없는 트라이시클이다.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마치 여염집 안방 같다. 배낭을 싣고 일출 포인트로 데려다 달라했다. 내리면서 여준이 휴대폰이 빠졌나보다. 그는 즉시 휴대폰을 건네준다. 마닐라에서는 사진을 찍다가도 빼앗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그의 정직함에 감사가 일었다.
일출포인트에서는 새벽 5시임에도 바닷가에 어부가 나와 있다. 그림처럼 낚시에 여념이 없다. 사진작가가 왔다면 저 숭고한 고기잡이에 경배라도 했을 것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던 간에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경건했다. 어둠이 걷히면서 이내 산은 해를 토해놓는다. 산골짝에서 왈칵왈칵 빛을 쏟아놓는다. 댄서의 입에서 뿜는 불쇼가 이러할까? 한국에서 날아와 9개월의 팍팍한 마닐라살이 끝에 루손섬 북단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감격스러웠다. 관북유람일기나 동명일기를 쓴 조선의 아녀자들은 나처럼 극성스런 피가 흘렀으리라. 그녀들의 속삭임과 탄성이 내 안에서 다투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남은 필리핀 살이..부디 마무리 잘 짓고 돌아가게 해 주세요.”
가만히 기도를 올리고 트라이시클에 몸을 실으니 그는 블루라군의 레스토랑으로 안내한다. 리틀 보라카이로 불린다는 찬사와는 달리 큰 감흥은 받지 못했다. 그곳에서 아침을 간단히 먹고, 트렉킹 코스로 발을 옮겼다. 이른 아침인데도 태양은 따가웠다. 땀으로 셔츠가 젖어드는 느낌을 받는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이 보랏빛이다. 마치 아바타가 출몰하는 공간에 들어온 듯 황홀했다. 나비가 날고 그늘이 진 오솔길, 그리고 웅장한 폭포소리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닌 듯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물속에 손을 담고 폭포가 떨어지는 하늘을 보았다. 명산이라도 물이 없으면 삭막하다. 우리가 진정한 여행가라면 이곳에 여장을 풀고 등산도 했을 텐데..관광에 족하는 여행자이니 이쯤에서 멈추고 돌아갈밖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우드비치에 당도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바다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여행지에서 눈물이 솟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번은 파리 오르세에서 모네 그림을 마주하고, 코끝이 맵싸한 듯 하다가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오늘, 이 아름다운 바다를 마주하니 또다시 눈물이 솟는다. 아이는 모래성을 쌓고 나도 신발을 벗고 바다로 향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내 양산을 휙 낚아챈다. 달려가 잡아, 겨우 바다를 빠져나왔다. 수로부인은 아니지만, 소를 끌고 가는 노인이라도 있어야 양산을 건져내달라고 할 텐데..그렇지 못하니 내가 뛰어드는 수밖에. 현지 아가씨 몇 명이 천연진주를 줍는다. 울퉁불퉁한 진주지만 영롱하다.
풍력발전소가 멀리서 바람개비를 돌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으로 달려가 최대한 가까이 풍차를 보았다. 간이 기념품점에선 모래바람을 맞으며 모형 풍차를 판다. 한산하기 그지없다. 하얀 풍차를 사들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돌아 나왔다. 비간에 숙소를 잡은 터라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라왁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몰라 눈치껏 200페소를 내고 기다리는데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한참을 잔돈만 세는 그를 보면서 나는 매표원의 갈등을 손끝에서 보았다. 내적 갈등은 머릿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손끝에서도 이뤄지는 거구나...깨달음이 왔다. 결국, 보다 못한 옆자리 아가씨가 내 대신 항의하여 50페소를 거슬러주게 한다. 고마워서 쵸콜렛을 권했더니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순식간에 나의 빠오이 일정을 조직해준다. 맛집부터 교통수단까지 심지어는 데이터를 내 폰에서 터지게 해주어 페이스북으로 연결도 한다. 도대체 이런 요술을 5분만에 부리다니..그 엽렵함에 감탄이 절로 일었다. 빠오이행 지프니에 올라타 1시간 반 정도 달려가니 웅장한 성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에 들어가 휴대폰을 충전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셀카봉을 찾는다고 가방을 뒤적거리니 친절한 종업원눈에도 진상처럼 보였는지 보는 눈이 곱지 않다. 미안하다는 눈인사를 하고 피낫벳피자를 시켜 그 맛을 음미했다. 비간에 가면 비빙카와 롱가니사를 빠오이에서는 엠빠나다와 피낫벳을 먹어보라는 제이미의 권유대로 했더니 메뉴는 성공이다. 성당의 고색창연함은 보도부르도 사원이나 아유타야에 견줘도 손색이 없었다. 정원에 앉아 가계부도 쓰고 책도 읽으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문득 행복했다. 배는 적당히 부르고, 그늘은 알맞게 시원하다. 성당의 고요가 우리를 감싼다. 모래언덕에서의 일몰을 구경해야 했으나, 마닐라에서 어제 오후 5시에 떠나 이제 또다시 4시를 가리키니 23시간 동안 길 위에서 떠다닌 꼴이다. 라왁까지 가는데 1시간 30분, 거기서 비간까지 2시간이라 하니 어서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지프니를 탄 필리핀 소녀들이 아들아이가 맘에 드는지 자리를 바꿔가며 얼굴을 흘끔거린다. 여행을 흥겹게 해주는 건 사람들의 움직임과 표정이다.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낙, 콤팩트로 얼굴을 두드리는 아주머니, 개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주인..그들의 생각, 그들의 삶, 그들의 가족 친구까지 상상하다보면 시간은 훌쩍 가버린다.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존재들은 기적과 같은 존재들이다. 숨을 쉬고 움직이고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서로 조화를 이룬다. 어떻게 그렇게 조물주는 만들어냈을까?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존재들..그들에게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그들은 자신들을 발견하리라. 내일이면 또 어떤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 기대하며 비간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2.
스페인이 점령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은 비간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도시다. 따각따각 말발굽이 돌길을 밟으며 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칼레샤 안으로 살포시 안기는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맡기며 비간 시내를 돌았다. 택시 대신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만든 트라이시클이 도로를 점령한 곳에 마차가 무리 없이 합류하는 독특한 도시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벨타워다! 성당을 곁에 두고 고색창연한 종탑에 올라 시내를 조망하면 누워있는 미녀의 형상을 한 산세가 보인다. 벽돌 이음새는 흰 달걀 껍질을 반죽해 넣어서인지 자연스럽다. 한 할아버지가 공식 가이드도 아닌데 우리 곁에 와서 이 얘기 저 얘기를 구수하게 잘해주신다. 낯 선 사람의 접근이 한편으론 긴장이 되어서 마음 푹 놓고 그의 설명을 듣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쉽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종들을 한 곳에 모아 묶어놓은 옛탑에 앉아 있자니 어릴 적 예배당 종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종소리...그에 맞춰 예배당으로 향하던 신도들의 비밀스런 두런거림...이젠 휴대폰이나 손목시계로 시간을 시시때때로 확인하기에 , 더 이상 종은 그 역할을 못하고 밧줄에 꼭 매여서 자신이 ‘종’이었단 사실만 관광객의 사진기에 기록될 뿐이다. 성당 옆으로 난 정원에 들어가니 아들아이에게 시선을 던지는 필리핀 소녀들이 눈에 띈다. 이름을 묻고 대담하게 연락처도 묻는다. 함께 사진을 찍고 두 번째 향한 곳은 파드레 부르고스 국립박물관이다. 커다란 박물관에 들어서자 우리가 처음 오는 방문객인지 에어콘도 켜고 선풍기도 틀어준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데 가이드까지 해주는 친절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화장실로 개조한 감옥도 보여주고 스페인 점령과정을 그림으로 그려낸 갤러리와 전통주를 빚는 모습, 옷감을 잦는 것까지 자상하게 알려준다. 굵은 주름이 패인 할머니가 14살 때부터 베틀에 올라 옷감 짠 이야기를 구술하는 영상을 보면서 그녀가 오른 베틀이란 인생과 시골 파주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허리 구부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의 땅이 떠올랐다. 한 가족이 누려야 할 여행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늙으신 부모님 몫까지 내가 다 차지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아닌지....오늘은 김장을 하신다고 하는데...혼자 있는 남편에게 김치통을 가져오라고 성화시겠지...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다음 행선지 히든 가든으로 가는 길은 비간의 골목길을 가로질러야 했다. 발가숭이가 되어 꼬마들은 여행객들을 바라본다. 철조망으로 담장을 만든 곳도 있고 선인장으로 담장을 마감한 곳도 보인다. 어릴 적 시내에 사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날카롭게 병을 깨트려 시멘트 반죽으로 마감했던 무시무시한 담장을 보고 놀랐던 일이 떠오른다. 외부인을 경계하던 담장들은 오늘 여기에도 존재했다. 필리핀 담배공장을 지나 도착한 히든 가든에서 엠빠나다를 먹어보았다. 보기엔 그럴 듯 했는데 내입에는 조금 짰다. 중절모와 흰 셔츠, 검은 바지를 단체로 입고 시중을 드는 종업원들은 흥겨워보였다. 공사장 인부들이 철근과 자재를 하루 종일 나르고 받는 일당이 200페소(5000원)이라고 한다. 그나마 나이 제한이 있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니, 종업원들의 월급도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늘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저러한 긍정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네 번째 행선지는 발루떼 동물원이다. 방목해놓은 소, 염소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어린 염소들은 나름대로 그늘을 찾아 시멘트벽아래서 쉬고 있다. 사파리 갤러리란 이름이 묘해, 땡볕을 뚫고 올라가봤더니 사냥한 동물을 박제해서 걸어놓았는데, 처음엔 엄홍길 대장 박물관처럼 열정이 느껴져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사냥한 동물 앞에서 계속 인증샷을 찍은 걸 보니, 가짜의 냄새가 물씬 났다. 나중엔 호랑이와 자신을 합성한 것에서 더 나아가 캔타로우스처럼 말 몸통에 자신의 얼굴을 붙여놓은 걸 보고 실소가 나왔다. 적어도 진정한 사냥꾼이라면 이런 식으로 사진을 찍고, 이런 식으로 자신을 우상화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나도 그 앞에서 조롱하듯 사진을 찍고 나왔다.
마부는 식당으로 개조한 레오나 식당에 우릴 내려준다. 그러나 아들아이는 어제부터 눈독들인 한국식당이 끌리나보다. 어림짐작으로 찾아 헤매면서 반신반의하며 다리를 건넜는데 한국식당 간판이 보인다. 아이가 좋아하는 보쌈을 사주고 밥을 추가해서 먹고 나자, 여종업원이 배시시 웃으며 맥심커피를 흔들어 보인다. 내가 인스턴트 커피를 좋아하는지 어찌 알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