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레가스피 주>마욘의 사랑
비콜-레가스피- 마욘을 가다!!
여행을 계획했다가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다른 변수를 찾아 제2, 제3의 방법을 찾았지 그대로 주저앉는 일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마욘은 달랐다. 큰맘 먹고 아이를 영어캠프에 넣어 놓고 혼자서 배낭을 지고 떠나는 여행은 가방끈을 바투 쥐게 되고, 비상금을 넣은 주머니를 재확인하게 하는 등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을 동반해야 했다. 레가스피로 가는 마지막 밤 버스가 쿠바오에서 11시 30분에 있다는 말만 믿고 필트랜코 버스터미널에 갔더니 9시가 막차였다는 말에 차라리 잘 됐단 마음으로 돌아섰다. 직원은 내일 아침 9시까지 터미널에서 기다려야 한다며 다른 승객들을 가리켰지만 내겐 오늘 내 몸을 뉘일 방이 마닐라에 있다는 생각에 그 말이 위협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처럼 아무도 서두는 법 없이 터미널에서 얼굴을 묻고 잠들어 있다. 쿠바오까지 택시비를 만만치 않게 치렀지만 낯선 호텔이 아닌 집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택시를 겨우 잡아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니 레이몬드 버스회사가 보인다. 아!! 그렇구나!! 그제서야 흐릿했던 기억이 또렷해진다. 11시 반 차는 필트랜토가 아니라 레이몬드였다. 그러나 이미 택시는 버스터미널을 지나치고 있고, 나 역시도 다시 기운을 내기가 어려워 그대로 돌아왔다.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아 밤이고 낮이고 상관없이 날 받아주는 마닐라의 자그마한 콘도가 새삼 고맙고 정겨워 감사가 일었다.
다시 내게 확보된 24시간의 여유다. 아이가 없으니 작은 집이 텅 빈 것처럼 스산하다. 잠을 이루려 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자다 말다 반복하다 아침에 누룽지를 끓여 파김치와 함께 먹으며 속을 달래고, 다시 컴퓨터를 켰다. 마욘이란 이름 하나로 검색창을 두드리며 어떻게 갈 수 있는지, 가서 무얼 하면 좋은지, 어디가 맛집인지, 먼저 그 땅을 밟은 사람들의 흔적을 찾다보면 시간이 소리 없이 부스러져 버린다. 여행준비도 여행의 하나이며, 준비 없이 갔다가는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기분을 맛보아야 하지만, 고된 과정은 건너뛰고 그저 가서 잘 차려진 밥상만 받아보고 싶은 마나님 심보는 어디서 오는 건지...
마욘화산을 오르기만 하면 다른 것은 크게 못하고 와도 되겠단 마음을 먹자 초조함이 사라졌다. 오늘 잃은 시간을 아침 일찍 비행기로 가면 되찾을 수 있지만, 비행기 삯이 만만치 않아 세부퍼시픽과 필리핀항공을 계속 드나들다 그냥 버스로 가자고 맘먹었다. 영어 튜터도 두 시간 공부하고, 코엔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을 반복해서 보며 영화후기도 적고, 플락산 등정기도 쓰고 나니 어둑어둑하다.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 배낭을 재확인하고 파사이 버스터미널(DLTB, 필트랜코 등등 많은 버스가 있어 시간선택이 용이하다)
로 갔다. 어제 놓친 버스는 맨 뒷자리밖에 없다고 한다. 맨 뒷자리는 속도 불편하고 쿵쾅거림도 심하지만 그냥 타기로 결심하고 앞으로 마주할 10시간 뒤를 기대했다. 별은 영롱하다.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마을까지 내려온 별들을 보며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불현 듯 잠이 깨어 밖을 보니 눈앞에 떡 하니 마욘산이 보인다. 아무 산세도 없고 깎아지르듯 올라간 산길도 없었는데 평지에 우뚝 솟아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마치 파리의 에펠탑을 연상하게 했다.
산에 오르지 않아도 산세를 모두 가늠할 수 있고, 가까이서건 멀리서건 상관없이 차별하지 않고 전부 보여주는 넉넉함에 그대로 매료되었다.
로운리 플래넷에 소개된 투어리스트 인에 짐을 풀려 했더니 혼자 머물기엔 너무 방이 크고 또 낡았다. 다시 배낭을 지고 몇 골목 내려와 보니 새로 지은 아담한 호텔이 보인다. 마욘이 보이는 전망을 갖춘 트윈 침대는 3만원이고 싱글침대에 뒤쪽은 2만원이다. 만원 더 내고 마욘을 택했다. 와이파이도 잘 터지고, 전망도 좋고, 새로 지어 실내 인테리어며 청결상태가 부티크 호텔(052-742-3354, 090548-7400:HOTEL. lIATRIS: lAPU-LAPU ST. lEGAZPI CITY) 못지않다. 게다가 이른 시간에 체크인을 허락하니 금상첨화다.
혼자 떠난 여행을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서둘러 카톡 하나를 보내고 트라이시클을 잡아탔다. 반나절 투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주란다. 보통 반나절에 500페소를 준 기억이 있어서 그 정도 주면 되겠거니 맘먹고 깍사와 루인부터 들렀다. 종탑은 ‘루인’이란 말에 걸맞게 풀들이 종탑 위까지 웃자라 있고 화산폭발을 피해 모였던 사람들이 희생당한 이야기가 안내문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뒤쪽을 가보니 트라이시클 안에 고양이 한 마리가 얼마나 피곤한지 네 발을 다 뻗고 자고 있다. 어미 닭을 아장아장 뒤따르는 병아리와 이제 막 모를 내놓은 논과 화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까지...이 도시의 평화로움을 웅변하고 있다. 날씨는 쨍할 정도로 화창하고 마욘은 아름다운 자태를 맘껏 뽐내고 있다. 비구름이 자주 껴서 마욘산을 보려면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한다는데 아무래도 이번엔 날씨복권을 제대로 맞았나보다고 혼자서 슬며시 웃었다. 히논힐을 지나 세 번째 찾아간 곳은 동굴이다. 하롱베이 동굴, 사가다 동굴, 라오스의 수많은 동굴들을 이미 보았던 터라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따로 계획한 것도 없기에 기사가 이끄는 대로 가보았다.
코끼리, 매달린 남자, 날개가 하나뿐인 천사, 뱀 머리, 돔 모양의 천장, 손을 내밀고 축복을 빌어주는 모습까지, 가이드는 이름만 갖다 붙이면 다 그럴 듯하게 보이는 석주, 석순 들을 설명해준다. 투어 가이드비가 300페소라고 해서 6명이 50페소(1250원)을 내고 함께 들었더니 동굴 밖을 나왔을 때는 초면이었던 사람들끼리 서로 친해졌다. 그린힐즈에 가봤냐고 하면서 보홀의 쵸콜렛힐보다 더 멋지다고 소개해준다. 동굴엔 끌리지 않았으나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그린 힐즈도 몰랐을 테니, 여행은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이끈다.
가는 길은 험했다. 포장이 벗겨지고 길이 무너져 공사중인 곳이 많았다. 그 길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남들은 사륜구동의 짚차로 오는 길을 스쿠터로 개조해 만든 오토바이택시로 오려니 엉덩이가 다 얼얼하다. 하지만 그린 힐즈에 오른 순간 그간의 아픔이 일시에 날아간다. 마욘과는 또 다른 아늑함과 고즈넉함을 갖춘 산세에 저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제주도의 성산봉 오르는 길과 비슷하지만 인적도 드물 뿐 아니라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의 바다가 사방에 가득하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오늘은 이정도로 투어를 마치고 내일은 본격적으로 등산을 하자는 마음으로 트라이시클에 몸을 실었다. 호텔에 돌아와 600페소를 내미니 맘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부족한지 800페소를 달라고 한다. 조금 비싸 보이기도 하고, 워낙 험한 길이기도 하고, 흥정도 재미라 700페소를 드렸는데 어쩐지 흡족해보이지는 않는 눈치다.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윤직원 영감’이 생각났다. 부자로 보여서 정해진 값이 없고 인정대로 달라고 했다가 구두쇠인 영감이 한 푼도 안 주던 첫 장면이. 아무래도 내가 그 꼴은 아니었나 싶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호텔에 들어와 한숨 자고 카톡을 확인하고 페북에 사진을 올렸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진다. 바로 옆에 오빠손 불고기 한국 식당이 있어서 김치볶음밥과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어제부터 누룽지 하나 끓여먹은 게 다였었던 게 이제야 정신이 든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계산서를 보니 130페소다. 3000원 정도. 착한 가격이다. 재즈 바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홑몸으로 여행하면서 저런 곳에 앉아보기도 해야 하는데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 할로할로(필리핀식 팥빙수)를 잘한다는 곳을 찾아가 후식을 먹고 내일 산행에서 먹을 과자와 쵸콜렛을 샀는데도 여전히 7시다. 호텔 직원에게 투어상품을 물어서 브로셔 하나(0936-938-7586)를 얻었다. 혼자 하는 산행은 무려 15만원으로 나와 있다. 직접 말을 해보면 다를 것이란 생각으로 두 군데 문자를 넣고 기다렸는데 다행스럽게도 6 만원 정도에 해준다고 한다. 대신 차가 아니고 오토바이로 움직여야 하며 식사도 없고 물과 간식도 모두 내가 준비해야 한단다. 내일 새벽 6시에 만나자고 약속하고 잠을 청했다. 그렇게 화창하던 날씨가 밤이 되니 빗방울을 흩뿌리기 시작한다. 마욘산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나 친근하게 그 자리에서 우뚝 서서 지켜줄 것만 같았던 산이 감쪽같이 사라지자 마욘산이 보이는 호텔이 무의미해졌다. 바깥에서는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비는 점점 굵어지고 여섯시를 놓칠까 싶어 잠이 들락 말락 한다. 자꾸만 낮의 트라이시클 기사에게 야박하게 했던 투어비가 후회가 된다. 굳이 100페소를 덜 줄 필요가 뭐 있었나 싶고, 죄 없는 사람만 마욘산을 볼 수 있다는데 내 죄로 오늘 마욘등산은 어렵겠구나 하는 자격지심이 들어 우울해졌다. 그리고 죄 많은 내가 어제 하루만이라도 마욘산을 본 것이 감지덕지해졌다. 가이드는 정확히 여섯시에 연락이 왔다. 비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서. 워낙 변화무쌍해서 나중에 날씨가 갤 수도 있다고 설득한다. 반신반의하며 트라이시클에 올라타고 후미진 골목골목을 두 남자와 가자니 갑자기 저들이 도둑으로 변하면 어쩌나 두려운 맘도 생긴다. 한참 꼬불거리는 농가를 들어가, 가이드가 자신의 집이라고 소개하는데 그곳엔 갓 태어난 염소 두 마리, 강아지, 병아리, 고양이, 심지어 10살, 8살 필리핀 꼬마까지 도란도란 살고 있는 집이다. 아내를 소개해준데 화장기 하나 없이 수수하니 어여쁘다. 갑자기 나의 느닷없는 의심이 부끄러웠다. 가이드는 내가 모두 준비해야한다는 애초의 말과 달리 우산, 재킷, 또 다른 도우미까지 찬찬히 준비해서 산행을 떠난다.
캔들 플랜트, 샤이 플라워, 비콜지방에만 난다는 커다란 피넛, 식용이 불가한 바나나, 파인 트리, 야자수, 돗자리로 쓰는 풀들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주느라 여념이 없다. 어시스턴트는 우산 대신 야자수를 잘라 가방에 꽂는다. 그럴 듯한 천연 우산이다. 우리에겐 일행 하나가 더 있었는데, ‘로니’라는 누렁이다. 얼마나 길을 잘 아는지 그 산행이 자연스럽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딱 맞다. 입산금지 전까지 무려 다섯 번도 넘게 정상에 올랐단다. 첫 번째 만난 계곡은 올드 라바라는 곳인데 암석이 폭포에 닳고 닳아 거칠었던 현무암이 검은 대리석처럼 매끈하다. 어제도 등산객이 있었는데 네 번이나 쉬었다고 하면서 한 번도 쉬지 않는 나를 칭찬한다. 빗줄기가 굵어지자 어시스턴트는 천막을 꺼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버너에 불을 붙인다. 빈 가방처럼 가볍게 보이는데 요술주머니처럼 이것저것 잘도 나온다. 그는 심지어 신발도 슬리퍼다. 등산화에 불룩한 가방을 맨 나는 도대체 날 위한 것 말고는 이 가방에 남을 위한 것이 뭐가 있나 싶어 부끄러워졌다. 커피 하나로 셋이 나눠마시게 해서인지 커피는 보리차처럼 닝닝하다. 하지만 산에서 마시는 따근한 커피라니...그것만도 황송하다. 천막을 걷고 두 번째 도착한 곳은 뉴 라바다. 얼기설기 돌들이 쌓여서 더 올라가지 말란다. 이미 3시간도 넘게 올라왔는데, 성이 안 차 다리는 근질근질하다. 더 올라가고 싶어서. 마욘도 나를 용서하기로 했는지 다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전설에 따르면 마욘공주는 차도르를 항상 걸치고 다니며 부끄러움이 많아서 자기 얼굴을 잘 안 보여줬다고 한다. 마욘을 강제로 취하려는 이웃 왕자를 피해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공주. 마욘. 그 둘을 묻자 저렇게 큰 무덤이 솟아났다고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 돌이 따듯해서 외국인들이 스파를 하기 위해 누웠었다고 한다. 폭발로 식구들이 모두 대피했을 때에도 화산을 보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을 위해 이곳을 떠나지 못했었던 이야기도 담담하게 해준다. 마욘은 왈칵왈칵 불을 뿜어내고 그 용암은 흘러넘쳐 사람들을 해치기도 하고 또 사람들을 먹여살려주기도 한다. 화산재는 시간이 흘러 비옥한 농토를 만들지만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앗아간다. 마욘의 사랑은 온유한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수줍음 타다가도 불같이 성내고 홱 토라져 돌아 앉아선 얼굴도 안 보여준다. 그러다 제 풀에 꺾여 다시 든든하게 자기 존재를 보여주고 다 나눠준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어쩌면 나는 마욘과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토라지고 어른스럽지 못했다. 그러다가도 금방 후회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려고 애썼다. 내가 마욘산에 끌렸던 것처럼 부디 나의 아이들도 내게 끌렸으면 좋겠다.
튼실한 두 다리를 갖고 있는 덕에 남들보다 일찍 내려왔더니 가이드 아내가 참치요리를 해놨다고 같이 들잔다. 자기들은 한 그릇에 밥, 반찬 모두 담아 손으로 먹으면서 내 것은 반찬 따로 밥 따로, 덜어먹는 그릇 따로 해서 가지런하게 포크와 숟가락을 가져다준다.
간간한 참치와 필리핀 미나리 깡콩을 넣어 만든 조림인데 조금만 먹으려던 애초 마음과 달리 자꾸만 숟가락이 갔다. 아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음식 솜씨도 빼어났다. 무려 20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십대 처자다. 가이드는 명색이 산악인이면서 줄담배를 피운다. 내가 보기엔 병색이 완연하다. 흡연은 해롭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도리어 지금은 담배를 끊으면 목숨이 준다며 모르쇠로 일관한다.
배낭여행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지인들을 가까이 관찰하다보면 그들에게 마음이 가고 자꾸만 정이 든다.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로 날아와 5성급 호텔에서 머물면서 허가 난 투어회사에 돈을 주는 여행은 레가스피 사람들에게 혜택이 거의 가지 않는다. 대중교통도 이용하고 현지 식당도 찾고 조그마한 호텔에 머물러야 그 혜택이 현지인들에게 바로 돌아간다. 비록 반나절 가이드비가 나에게 적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살림을 꾸리는데 직접 영향을 준다니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