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민도로 사방비치
1.
먹구름은 저 멀리 뭉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친구와 함께 민도로 섬으로 향하면서 우리가 만난 시간을 더듬어본다. 파주에서, 전곡에서 1년을 사이에 두고 태어나 각자의 공간에서 생활한 우리...한 사람이 독일을 2년간 더듬는 사이에, 또 한 사람은 베트남에서 지내다가 우연히, 운명적으로 같은 학교에 발령이 났다.
새롭게 발 디딘 한국은 폭풍처럼 일이 몰아쳤다. 행정은 낯설고, 아이들은 거칠어져 있었다. 동병상련을 나누며 서로를 살뜰히 챙겨주다가 시절인연이 다하여 또 헤어졌다. 한 사람은 대전으로, 또 한 사람은 마닐라로. 그렇게 떨어져 생활하면서도 늘 그리움에 젖어 만나기만 하면 남몰래 아이대학 축하금을 쥐어주기도 하고, 비싼 화장품을 안기기도 했다.
사십여 년의 물살로 각자 흐르다가 합해지고 또 나눠지는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서 다시 만난 우리. ‘겁’의 시간이 선녀의 옷자락으로 너럭바위를 쓸어서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라면 ‘찰나’의 시간은 손가락으로 튕길 때의 시간을 10억분의 1로 나눠야 가능하다는 짧은 시간이다.
유전자를 나르는 이 몸을 받아 이곳에서 잠시 이런 모습으로 있을 뿐, ‘겁’의 시간을 거쳐 지금 ‘찰나’로 4박 5일간 다시 만났으니 저 먹구름이 곱게 보일 리 없다. 우리의 짧은 여행을 훼방하려는 것만 같아 눈이 흘겨진다. 맘속으로 날씨부조를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는데, 빗방울이 오락가락하고 하늘은 잔뜩 흐렸다.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운다지만 날씨 앞에서는 속절없고 무력하다. 새벽 5시 반부터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도 항구에서 배는 1시간 째 떠날 기미가 없다.
배안에는 필리핀 아가씨를 대동한 외국인도 있고, 가족단위 여행객도 보인다. 여행자의 배낭만큼 거주자의 짐 보따리도 눈에 띈다. 국적도 다양하다. 떠나기 직전 헐레벌떡 들어온 중국인 청년 둘도 이 배의 일원이다.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는 나란히 앉아 서로만 쳐다본다. 남자는 코로 여자의 어깨를 부비며 사랑스런 눈길을 보낸다. 그들에게 날씨는 아무 장애도 되지 않고, 배가 늦게 떠나도 상관없다. 그저 같이 있으니 행복한 눈치다. 국적도 다르고 목적도 다른 승객들이 한배에 모여 섬으로 향한다. 엔진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 저 뒤에 파도가 배를 문지르며 내는 소리, 프로펠러가 바닷물을 휘돌며 그 바람에 물이 엉겨 붙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려 애썼다.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 곤히 잠든 아이가 숨을 높게 쉬며 내는 소리, 내 맘 속, 저 깊은 근원을 흔들어 깨우길 빌면서 1시간을 타고 사방비치에 도착했다.
지난번 인연을 맺은 사장님은 정겹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처럼. 이젠 날씨마저 해가 쨍쨍하다. 작은 배로 갈아타고 할리기 비치에 당도했다. 섬이라하기엔 대륙처럼 큰 루손 섬에서 그보다 작은 민도로 섬으로 들어가 또 그보다 더 작은 할리기 비치에 당도하니 우리 여행은 끝없이 더 작은 섬들로 옮겨지다가 바다와 하나가 된 여행이나 다름없다. 초록별로 불리는 지구. 그 바다는 한번 봤다고 두 번째 권태롭지 않다. 광활한 바다에 바늘처럼 떨어져 봐놓고서는 감히 한번 본 바다라고 만만하게 여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경을 쓰고 머리만 밀어 넣었을 뿐인데, 이곳은 별세계다. 친구도 이 그림 같은 바다를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흐뭇한 마음이 피어난다. 옥색과 코발트색, 하늘색, 바다 속은 밝고 환했다. 용마루 산호, 사슴 뿔 산호를 유영하는 엔젤 피시, 라이언 피시, 니모들..이방인을 두려워 않고 무심하게 바라봐준다. 손으로 만져보고 싶어 손가락을 길게 뻗어보았다. 사이사이 빠져나간다. 그때 파바박..뭔가 쏜다고 여겼는데 해파리다. 자신의 거처를 침입했으니 날 쏘는 건 당연하다. 다이버 서너 명이 검은 물체로 있는 걸 보고, 흠칫 놀랐다. 바다 속 생명체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지만, 거기서 본 사람은 무섬증이 솟았다. 제 자리에 놓일 것이 있는 곳은 아름다우나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있는 것은 이물스럽다. 고기들과 한 때를 보내고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노릇하게 익은 삼겹살과 뭉툭하고 단단하면서 달콤한 바나나, 그리고 살살 녹는 망고를 먹으며 시야를 가리는 일 없는 망망대해를 보았다. 그림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면, 이곳에 그냥 남고 싶었다. 무릉도원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는 선비처럼.
친구는 모래의 특별함을 알아챈다. 산호가 파도에 부스러져 닳고 닳아 둥글어진 알갱이들. 아무리 모래장난을 해도 몸에 들러붙지 않고 털면 사라락사라락 다 떨어진다. 물은 투명함 그 자체다. 맑으면 깨끗하지나 말던지, 깨끗하면 말지나 말던지..맑고도 깨끗한 저 기운이라고 감탄한 정철의 표현이 떠오른다. 나도 털썩 모래 위에 앉았다. 파도는 저 멀리서 내 몸을 부순다. 억 만 번 저 파도로 날 물결치면 이 모래처럼 둥글어지고 작아지고 가벼워질까...타고난 무거움으로 단단하게 뭉쳐 부서지지 않으려 했던 나의 오만이 돌아봐진다.
시간은 우리를 거스른다. 이제 겨우 밥 먹고 바다에 몸을 담갔을 뿐인데, 섬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사 생각에 마지막 배를 타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를 위해 네 명의 필리핀 사람들이 곁에서 시중을 든다. 선장, 요리사, 스노쿨링 쪽배를 운영하는 선원들...라면을 너무 많이 끓이고 삼겹살도 남아서 아깝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들도 우릴 따라 포식한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보시가 아닐까..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의 식사를 바라보았다. 뒷정리가 끝나자 우린 못내 헤어지기 싫어 뒤를 돌아보는 연인들처럼 할리기 비치를 떠났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평생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를 본 적이 있는가? 두 다리가 있어 이곳까지 오고, 두 눈이 있어 이 경치를 보는 것만도 무한한 감사가 솟았다. 우린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여정을 위해 숨을 골랐다.
돌아가는 배에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유모차에 아기를 태운 새댁도 보인다. 긴 머리를 염색한 필리핀 아가씨가 목에 문신을 했다. 오늘 섬에서 외국인 곁에 시중을 들던 그런 아가씨 중 하나리라. 또 한편에서는 선원들이 막간을 이용해 카드놀이를 한다. 그들이 닻을 내리고 거둔 횟수는 얼마나 될까...내가 교실에서 수업한 그 시간과 맞먹을까? 그들이 옮겨준 승객들은 얼마나 자기 시간들을 누리며 살았을까? 마찬가지로 내가 가르친 아이들은 교실이란 배를 지나 자기 인생을 얼마나 누리고 살고 있을까?
이 눈에 담은 이 풍경들을 교실의 우리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그들도 이 교실이란 배에서 내린 뒤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길 소망해본다. 큰 배, 큰 차로는 힘들다. 작은 배, 자전거, 두발이 이 바다, 그리고 이 대지를 밀착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낮은 자세로, 땀 흘리며, 따듯한 눈으로 스스로의 삶에 주인이 되길..그렇게 나의 아이들도 자라나길..바다가 날 흔들어 깨운 소리를 들으며 바탕가스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