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1. 급작스레 맞이한 미국여행. 여행지 선택의 조건은?
아무 생각 없이 떠드는 내입이 방정이었다.
여느날 처럼 인터넷에서 가벼운 이야기들이나 신문 칼럼 같은 것 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매우 생소한 단어, 그러니까 ‘소확행’이라는 신조어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신조어의 뜻을 상세히 풀어주면서 이것을 실천하면서 살아야만하는 이유를 어쩌고저쩌고~ 설명한 칼럼글을 읽으니 왠지 수긍이 된다.
요왕에게 소확행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니 “그게 뭔데?”그런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건데 말이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인생에 알알이 찍어줘야 삶에 허덕거리지않고 덜 지치면서 살 수 있대. 나불나불~”
그러고 얼마후에 요왕이 느닷없이,
“내 버킷리스트이자 소확행의 실현이다!! 퍼스트클래스를 타봐야겠어. 유럽행은 편도 8만마일인데 우리한테 지금 딱 16만 마일이 있거든. 우리 둘이 퍼스트 타고 유럽으로 가는거지. 우리 결혼 20주년이기도 하고 말야!” 라고 하는거다.
그랬다. 우리가 1998년 10월에 결혼을 했으니 이제 딱 20년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 둘 다 ‘나이는 숫자이고 기념일은 날짜일 뿐 평소에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결혼기념일이나 생일은 그냥 ‘밥 한 끼 잘 먹는 날’로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아시아나, 타이항공 탄 거 그리고 마일리지 많이 주는 신용카드로 알뜰하게 10년 넘게 모은 16만 마일인데, 아니... 인천–방콕 왕복 4만마일 한방에 두 명 동남아 왕복 2회권을 편도 한번으로 순삭 시키자는 말인가?
16만 마일로 4번의 동남아 왕복권을 얻고 유럽은 그냥 저렴한 항공권을 사서 가는 게 훨씬 합리적일거라고 살살 구슬려봤지만,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나중으로 킵 해놓지말고 현재에 누려야 되는게 소확행이라며?” 라는 요왕의 의문에 딱히 마땅한 답을 내놓게끔 내 머리도 작동이 안되고...-_-;; ‘小’확행이라기엔 너무 거대한거 아닌가??
요왕 왈~ “이거 원래 정가대로 사면 거의 편도에 500만원에 육박하는 건데 둘이 가는 거니까 천만원의 가치인거라고... 그럼 동남아 이코노미 왕복권 4장보다 더 좋은거지” 라고 설득하는데 묘하게 그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랬다. (근데 이렇게 비싼 걸 생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나....)
그래 요왕 평생 소원 중 하나라는데 까짓것 편도 8만 따위가 뭐라고~~ 싶어서(나는 평소에 엄청난 팔랑귀여서 설득당하는게 거의 엘티이 급이다.) 나란히 책상에 앉아서는 아시아나 홈페이지에 접속을 하고 마일리지 항공권 잔여석을 체크해보기 시작했다. 이왕 쓰는 퍼스트니까 제일 오래 탈 수도 있고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맘이 있던 유럽행 표를 찾아보았는데...엥? 이게 뭐지? 우리가 가고자하는 기간에는 퍼스트 클래스 자리가 없는거다.
아뿔싸, 퍼스트클래스는 한 비행기 안에 몇 자리 없어서 다 미리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두세달 임박해서는 원하는 날짜에 예약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물론 기간을 멀리 두면 있긴 한데 우리는 올해 가을에 가고 싶은 것... 여행의 방식을 결정하니 맘이 들떠서 들썩들썩 거리고있는데 정작 표가 없다니!! 하면서 아주 안달이 나서 불안의 클릭질을 하다가 불현듯 떠오른 여행지가 뉴욕이다.
그래 뉴욕도 비행시간이 유럽만큼이나 기니까 아주 8만마일 본전을 뽑는거야.
그래서 방금전까지만 해도 뭉게뭉게 부풀리던 유럽여행에 대한 상상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갑자기 행선지를 뉴욕으로 정하게 되었다. 오로지 고급진걸 더 멀리 타고 가야겠다는 그 집념 하나로 말이다.
그럼 뉴욕으로 일단 시작은 해놨는데 그다음 일정은 어떻게 한다지?
모든게 후다닥 급속도로 이루어진 계획은 대략 이랬다.
우리의 전체여정은 대략 4주일. 세계의 수도라는 뉴욕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을 합쳐서 1주일 가량 둘러보고 난 후 비행기를 타고 서부로 날아가 LA에서 차를 받자마자 사막 속의 오아이스 휴양지 팜스프링스 거쳐서 애리조나와 콜로라도 남서쪽 끄트머리, 그리고 뉴멕시코를 돌아보고 다시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 남부를 거쳐 LA에서 빠져나오는 일정이다.
미국동부만으로 일정을 짜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고 요왕이 지난번에 맛본 미국 서부를 너무 마음에 들어해서이다.
일단 뉴욕 숙소를 알아보자니 허걱... 이게 뭐야. 9월달 뉴욕숙소 가격이 그야말로 어마무시한거다. 9월이면 방학도 끝나고 뭔가 여행분위기가 좀 진정되는 시즌이 아니었나? 대충 그럴거라고 짐작했는데 우리 모니터앞에 비춰진 숙소 가격은 이게 뭐꼬.
뉴욕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여행자는 우짜든동 숙소를 맨하탄 쪽으로 하는 게 좋다고해서 맨하탄 중남부지역의 호텔을 찾아보는데 9월의 뉴욕 숙소 요금은 우리 얼굴을 찌그러트리기에 충분했다.
결국 우리는 무척 내키지 않았지만 한인민박에서 묵을 수밖에 없었는데, 손바닥 만한 아파트에 콧구멍같이 작은방 그리고 화장실을 다른 방과 공동으로 쓰는데도 일박에 140불이 넘어간다. 이게 제일 싼 수준의 숙소다.
물론 좀 더 미리 알아봤더라면 그나마 좀 더 좋은 조건의 민박집을 선점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남은 것 중에서 고르다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여튼 세계의 수도라는 뉴욕을 가게 되니, 꿈에서나 그려보던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보고, 마천루 전망대도 도장깨기 하듯이 다 올라 가 볼테고, 자유의 여신상도 보고 브루클린 다리도 건너보고 그리고 영화에서 늘 상 봐왔던 2층 투어버스도 타보고 등등등...
그렇게 하여 우리의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은 시작 됐다.
우리가 가진 일등석 항공권은 인천공항에서 수속을 할 때부터도 꽤 다르긴 달랐다.
카펫이 깔린 별도의 수속카운터도 어색했지만 체크인 카운터에서 직원이 입국장 입구까지 에스코트 해주고 여행 잘 다녀오라고 인사말도 건네주고... ‘뭘 이렇게까지나...’라고 생각 됐다.
사실 처음에 우리가 퍼스트 클래스로 써 붙어 있는 카운터에 어색한 모습으로 다가가니 처음에는 “비즈니스 창구는 저쪽...”까지 얘기하던 직원은 요왕이 내민 예약용지를 보더니 이내 친절하게 응대해 줬다.
‘그래요 우리는 우리돈 내고 비즈니스도 타본적 없어요 흑흑 ㅠㅠ’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단지 어색할 뿐...
따로 마련된 퍼스트클래스 라운지에 가서 아침밥도 먹고 인터넷 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시아나 비즈니스 라운지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복잡스러웠는데 여기는 조용하고 더 안락했다. 화장실 등에도 신경을 써서 비품을 구비 해 놨다.
나는 원래 장거리 이동 전이나 기내에서는 화장실 이용이 불편함 때문에 음식이나 수분을 거의 먹지 않는 편인데 퍼스트 클래스 탄 덕분에 라운지에서도 뭔가를 집어먹고 기내에서도 2번의 정찬과 1번의 간식이 배정된 탓에 평소에 비해 엄청 무겁게 먹은 편이였다.
이건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관찰해본 바 1인당 평균 기내 화장실 이용시간이 일반석보다 훨씬 길었다. 하긴 많이 먹으니 많이 나올 수밖에...
세상 신기하게 의자도 침대처럼 완전히 평평하게 펴지고 좌석마다 칸막이가 다 되어 있어서 비행기를 탄 게 아니라 마치 캡슐호텔에서 극진한 대접 받으면서 딩굴딩굴하고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생소한 분위기 한껏 느끼면서 자다 먹다 커다란 화면으로 영화도 몇 편 골라 보고하니... 마침내 14시간의 긴 비행이 끝나고 기장이 승객들에게 일일이 해주는 굿바이 인사를 받으며 뉴욕 공항에 발을 디뎠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자정이 지나면서 호박마차가 사라진 신데렐라처럼 무척 꾀죄죄해진 기분으로 입국장을 향해 걸었다.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계속)
아시아나 퍼스트클래스 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