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박 5일 북유럽 크루즈
북유럽이라하면 한국에서 비행기로 날아가는 값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물가도 어마무시합니다.
게다가 크루즈. 갑부들이 느긋하게 배타고 이나라 저나라 돌아다니면서 선상파티도 하고, 바다 한가운데서 썬텐도 하고 조깅도 한다는, 돈 많이 모아서 한번쯤 해보고 싶은, 고급진 여행의 진수죠.
그런데, 만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오게 된다면, 이 북유럽 크루즈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용한 창문 없는 침대 2개방은 4박 5일(4/30~5/4)에 305유로입니다. 2인실이니까 2명 가격이에요. 식사나 수영장, 사우나 등등은 요금을 따로 지불합니다.
흠.. 고급진 크루즈라는 말은 빼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크루즈. 고급진 크루즈는 비싸겠죠.
우리 배도 엄청 큰 배지만, 이 배가 아기배처럼 느껴지는, 말도 안되는 산만한 배도 있습니다. 그런 배가 진정한 고급진 크루즈일 듯 합니다. 대서양도 건너고, 배위에서 조깅도 하고… 아마도.
크루즈 회사도 여럿 있고, 루트도 다르고, 셔틀도 많은데, 우리가 이용한 크루즈는 아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하는 가장 싼 크루즈배일겁니다.
https://stpeterline.com/ 여기서 예약할 수 있습니다.
4박5일동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발- 에스토니아 탈린- 스웨덴 스톡홀름- 핀란드 헬싱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렇게 하루 한곳씩 찍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 도착해있고, 육지에서 놀다가 배에 돌아와 또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나라 다른 도시.
무거운 짐 짊어지고 날마다 버스 타고, 기차 타고 숙소 구하고, 짐싸고 짐풀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옮겨 다니는게 아니라 호텔이 이나라 저나라 옮겨 다니니까 아주 편합니다.
<백야로 달려가는 시기라서 일출은 새벽 5시도 되기 전이라 포기하고, 일몰만…>
사실 저는 북유럽 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습니다…
스웨덴- 오래 전 여행에서 만났던 스웨덴 친구가 엄마가 만들어준 요리가 먹고 싶다고 침을 흘리길래 그 요리를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그냥 삶은 감자였어요. 그래서 저는 스웨덴에는 먹을만한 음식이 없다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핀란드- 산타 할아버지가 산다는데, 별로 친분이 있는 분도 아니고, 무민의 고향이라는데 잘 모르는 생명체라 관심없습니다.
에스토니아- 별로 익숙하지도 않은 나라인데다 소비에트시절 러시아랑 같은 나라였다니까 내가 살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랑 비슷할거 같아서 별 기대가 안됩니다.
결정적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겨울 6개월을 지냈더니 해 없고 추운 곳이 지긋지긋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북유럽 크루즈는 꽤나 메리트가 있어 가기로 했습니다. 큰돈 들여서 별로 땡기지도 않는 곳을 갈 생각은 없지만, 싼 가격에, 꽤 편리하게 맛배기로 북유럽이라는 잘 모르는 곳을 잠깐씩 둘러볼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5월인데.. 5월에도 겨울이면 너무한 거 아닌가요? 겨울나라에도 봄이 왔습니다. 패딩이랑 목도리도 다 챙겼지만, 봄이라고 믿고 떠났습니다.
저는 여기 살고 있기 때문에 상관없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어떻게 가느냐고 물으신다면..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국에 싸게 가보려고 기차, 렌트카, 도보여행까지….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결론은 비행기가 제일 쌉니다.
비행기타고 오세요~
<<프린세스 아나스타샤 호>>
우리가 예약하려던 방은 원래 창문이 있는 침대2개방(452유로)이나, 창문이 없다면 가장 싼 2층 침대방(274유로)이었는데, 노동절 연휴 몇 주전에 예약하러 들어갔더니 선택의 여지도 없이 창문 없는 침대2개방(305유로)밖에 안남았습니다. 피크시즌에는 부지런해야 하는데…
기차 2인용 침대칸이랑 비슷합니다. 작은욕실 딸려있으니 비싼 침대칸으로 생각하면 되겠네요. 좁고 창도 없는 방인데도 나쁜 냄새가 나거나 하지 않고 쾌적했습니다. 4박5일 지내다보니 2층침대방이 다 팔린 게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일부러 커튼을 치고는 커튼뒤에 창문이 있다는 상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물론 비싼방들(611유로~1470유로)도 있습니다. 싼방들이 기차침대칸이라면 비싼방들은 호텔방입니다.
배 안에서 식사는
방을 예매할 때 같이 결제하면 아침, 저녁 부페를 2유로정도 싸게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조식만 13유로, 18유로짜리부페를 예약해서 먹어봤는데. 구색은 갖춰져 있는데, 아침이라 많이 먹지도 못하고, 그다지 음식이 훌륭한 것도 아니구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독점식당이라는걸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수준은 아닙니다.
배안에 식당은 여럿 있는데, 아침에는 부페와 카페만 열고, 저녁에는 모두 엽니다.
저녁때는 각종 공연이나 아이들을 위한 게임같은 것도 하구요. 아침 13유로짜리 부페식당은 저녁에 35유로짜리 부페가 됩니다. 음식이 바뀌긴 하겠지만, 둘이 한끼에 10만원주고 밥먹기에는 덜덜덜… 안먹어봤습니다.
다른 식당에서 17유로에 햄버거 세트도 팔고, 이태리식당에서 피자먹는 사람들도 많이 봤어요.
저녁에는 드레스입고 우아하게 식당에서 만찬을 즐기는 사람도 있고, 곳곳에 바닥을 차지하고 둘러앉아서 사온 술과 과자안주로 신나게 떠들며 노는 젊은 친구들도 있고, 로비 소파에 앉아 스도쿠를 풀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상 빠도 있는데, 추워서 장사가 잘 안되네요. 여름에는 인기폭발일 듯 합니다.
우리는 저녁때 컵라면이랑 육지에서 사온 빵을 먹거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먹었습니다. 아직 쌀쌀한 날씨라서 그런지, 컵라면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6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배는 왠만큼 큰 덩치의 호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객실, 식당, 스포츠바, 노래방, 영화관, 수영장, 짐, 사우나, 면세점, 미용실, 카지노, 아이 놀이방 등등 다 있습니다. 헬리콥터 착륙장도 있고, 주차장도 있습니다. 차를 싣고 가니까요.
야외 수영장과 조깅코스는 없네요.
< 배 진행방향은 왼쪽. 이렇게 맑은 하늘이었는데, 갑자기 안개속으로 들어갔습니다>
< 헬리콥터 착륙장. >
6층에 로비가 있는데, 영화나 투어를 예매할수 있습니다. 이 곳에는 날마다 그 다음날 도착할 도시의 지도와 안내서가 비치되어 있고, 도착 당일 아침에는 날씨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배 놓치지 않고 안전하게 잘 타고 다니려면 이 안내서는 날마다 꼭 챙겨야 합니다.
배에서 와이파이를 판매하는데, 우리는 구매하지 않았습니다. 방에서 잘 안잡히더라구요. 좋은 방은 되는지 모르겠어요.
여행 준비라고는 구글지도에 가고 싶은 곳 한두군데 찍어 놓은거 밖에 없었는데 배에서 하루 전날 얻은 지도들고 가끔 만나는 와이파이에 환호하기도 하면서, 인터넷 없이 잘 다녔습니다.
예전에는 다들 이렇게 여행 다녔죠.
<<안전>>
우리는 세월호를 겪었으니까, 안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배가 육지에서 출발할때마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비상시 행동요령을 알려줍니다. 방문에도 적혀있으니 잘 읽어보라고 합니다.
말귀를 잘 못알아들으니 방문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열심히 연구합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른 구명보트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비상 벨 소리는 어떤건지 직접 들려줍니다. 비상 벨 소리가 들리면 즉시 따뜻한 옷을 챙겨입고, 집합장소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탈출을 하든 뭘 하든 선원의 지시에 따르면 됩니다.
우리방의 집합장소는 D네요. D로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D장소로 가봤습니다. 사람들이 안다니는 비상계단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통로나 계단에는 어떤 방해물도 없고, 계단 벽면과 곳곳에 구명조끼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습니다. 밖으로 나갔더니 구명보트도 매달려 있고, D라는 간판도 있습니다.
문에 비상시에만 사용하라고 써있는걸 들어가면서 봤습니다. 어쩐지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니.. 평소에 쓰지 않는 장소인데도 문은 잠겨있지 않고, 가는 길이 말끔하게 정돈 되어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집합장소 D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 보며 든 생각은..
요즘 날씨는 구명조끼 입고 바다에 뛰어들기에 너무 춥다.. 왠만하면 구명보트타고 바다에 빠지지 말자..
그리고 방에서 전열기구 사용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커피포트의 코드 뺏기는거 봤구요. 다리미 압수되어 있는거 봤습니다.
<<팁>>
이 크루즈가 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탈린, 스톡홀름, 헬싱키 중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물가가 가장 쌉니다. 배 안의 면세점에서 파는 술이나 담배조차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트에서 사는게 더 쌉니다. 20~30%정도 차이가 난다면 귀찮으니 그냥 사먹겠는데, 도시에 따라 몇배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물이나 맥주, 빵, 컵라면, 간식…. 뭐가 되었든 다 짊어지고 배에 타는게 좋습니다.
우리는 와인 1병이랑 물만 2리터짜리 두개 들고 탔는데, 남더라도 잔뜩 사올걸 후회했습니다.
멀티탭이 필요합니다. 방에
콘센트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선전쟁>>
이번 크루즈여행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걸 꼽자면 ‘하선’입니다. 나쁜쪽의 기억이죠.
‘승선’은 타는 시간대가 다 달라서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5월 연휴때라 만선이긴 했지만, 정박할때마다 천명정도가 한꺼번에 배에서 내려야 하니까 시간이 걸립니다.
배에서 내리는 순서는
1. Priority 비싼방 손님들
2. 6세 이하 아기와 장애인
3. 투어 신청한 손님들
4. 그 외 일반인
나이 80 넘어보이는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 패키지도 있었는데, 그 중 지팡이 양손에 짚은 할머니 한분만 2번으로 먼저 나가고, 할머니와 커플인듯 보였던 할아버지와 나머지 분들은 다 4번에 나갔습니다.
4번에 나가면 무조건 1시간 이상 줄을 섭니다. 배에서도 하선 1시간 전부터 줄을 섭니다. 배에서 줄 안서고 사람들 다 빠진 다음에 나가면 이미그레이션에서 어차피 줄 1시간 넘게 또 서야합니다.
스톡홀름에서는 우연히 우리방 가장 가까운곳 출구로 하선을 하게 되어서 4번 중에서 1등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신나서 뛰어갔는데, 소용 없습니다. 1등으로 나가도 이미 몇백명이 이미그레이션에 줄 서 있습니다.
게다가 한줄서기라던가, 줄 서는 가이드라인이라던가, 질서유지요원이라던가 그런거 없습니다. 뭉터기로 넒은 공간에 들어가서 줄 비스므리한게 만들어지고, 빨리 빠지는 쪽으로 친구, 가족들이 끼어들고, 새치기하고, 없던 줄이 생기고… 엉망진창입니다.
저는 줄 서는거 아주 싫어해서 맛있는 밥집에 찾아갔다가도 줄서 있으며 그냥 옆집에 들어가서 먹기도 하고, 보고싶은 전시회 찾아 갔다가도 줄 서 있으면 돌아오곤 합니다. 그런데 이 줄은 피할수가 없습니다.
맘 편히 먹고 한두시간 정도 서서 읽을 책같은거 준비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만약 EU시민이라면 러시아만 뺀 모든 이민국에서 줄 별로 안서고 금방 나갈수 있습니다.
러시아 입국할 때, 앞에 서있던 스웨덴 아저씨가 러시아 너무 오래 걸린다고 투덜거려서,
‘스웨덴도 똑같애! 다른 나라도 다 이랬거든!’ 이라고 쏘아줬습니다. 사실 러시아가 제일 오래 걸리긴 합니다만. 러시아 사람이라고 일찍 통과 할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러시아사람과 한국사람, 그 외 기타등등 나라 사람들은 1번, 2번이 아니라면 하선 전쟁을 피할수 없습니다.
워낙 줄서는걸 싫어해서인지 하선전쟁이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주었지만, 이 외에는 다 좋았습니다.
가성비 최강의
특별한 여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