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이야기 #005 - 만달레이의 밤, 그리고 새로운 여정.
rewi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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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투혼으로 만달레이 힐을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나니 그제서야 살 것 같다.
만약 동행인이 함께였다면, 나의 이 바보같은 모습에 일주일은 비웃었으리라.
왠지 함께 하지 않으니 마음껏 실수를 해도 상관없잖아? 싶어졌다. 훗.
시내까지는 다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종점에서 내렸으니까, 내린 곳에 가서
다시타면 되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아까 내렸던 자리로 돌아간다.
만달레이 힐 입구에서 "택시 타, 택시" 하는 아저씨들과 "모또 어때, 모또-"
하는 아저씨들이 자꾸 부른다.
"나 버스!"
하며 아까 내린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와, 나 쫌 보련해 보인거야? 그런거야? 괜히 막 뿌득하다.
종점에 서있는 버스에 올라타니 한참있다 기장(?)아저씨와 차장(?)아저씨가 나타났다.
"어디가니?"
"기차역!"
"200짯이야."
낡은 일본버스가 미얀마의 길 위에서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헤에, 왕복 500짯에 만달레이 힐을 정복하다니. 일기에 써두자!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숙소까지의 거리가 꽤 되긴 하지만
지도를 보고 찾아갈 수 있는 위치인 만달레이 기차역에 내렸다.
기회가 된다면 미얀마에서 기차여행을 해보고 싶기도 한데...
버스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기차는 왠지 이번에는 좀 아닌 것 같아 기차역 위로
나있는 길을 걸으며 플랫폼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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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에 도착한 세번째 날, 나는 만달레이에 와있다.
태국에서 늘어져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끝없이 걸으며 하나라도 더 눈에,
마음에 담고 싶어하는 내가 있다. 기차역에서 내려 숙소까지 걷는 30분 동안,
이 곳의 길 위를 걷고, 이 곳의 소리를 듣고, 후덥지근한 공기의 감각을 느낀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얼마만인지.
기차역에서 집까지 거리가 생각보다 꽤 되서 거의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목이 너무 마른 상태였다.
그래서 눈에 띄는 노점에서 500짯을 내고 라임주스를 하나 사마셨다.
눈 앞에서 바로 짜서 얼음 동동 띄워주는 라임주스.
테이크아웃 개념이 아니라서 노점 옆에 테이블도 없이 간이의자에 앉아 유리컵에 담아주는 주스를 마신다.
만달레이에 도착한지 반나절.
문득, 이 곳은 왠지 적당히 아쉬움을 남겨놓고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운 풍경들,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다.
숙소로 돌아와 내일 바간으로 떠날 버스티켓을 예약해달라고 이야기했다.
아침 일찍 떠나야하니 대충 짐을 싸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티비를 켜놓는다.
땅거미가 지고나서 씨클로(?)를 타고 만달레이 시계탑 근처에 있는 나이트마켓을 찾았다.
나이트마켓이라는 이름이 주는 화려함을 기대했던 나를 한방 먹였던-
소박하고 소박했던 만달레이의 나이트마켓에서, 약간은 입맛에 맞지 않는 저녁을 먹게 되었다.
만달레이의 나이트마켓. 난 뭘 기대한거야.
그리고 흔하고 흔한 "밥"노점. 절임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날것으로 나오는 채소류는 먹을만 했다.
왠만해선 다 잘먹는 내가 동남아를 여행하며 음식 때문에 고생할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이 날은 정말 힘든 기억.
시장구경을 마치고 나서는,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왔던 길을 되짚어 갈 요량으로 출발했는데,
한참을 걸어온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계속 같은 길을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둠이 깔려 인적이 드문 거리. 변변한 가로등 조차도 없어 방향잡기가 더 힘들다.
무조건 큰길을 찾아야 하는데, 이 길이 그 길 같고 그 거리가 이 거리 같다.
거리의 이름을 표시해주는 이정표를 보고 겨우 낯익은 이름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몇 없는 가로등 밑에서 가이드북을 펼쳐보며 서있었다.
그 때, 내 앞을 지나가던 자전거 한대가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섰고,
자전거에 타고 있던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께서 묻는다.
"어디가니?"
"ET HOTEL 가는 길을 찾고 있었어요."
"여기서 꽤 먼데. 이쪽 길로 쭉- 가면 있어."
"아, 고맙습니다."
"어두운데 조심해서 다녀."
하며, 다시 자전거에 올라타 가던 길을 향해 가는 할아버지.
하하. 미얀마에 도착하고 난 이후부터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
조금이라도 헤매고 있을 때면 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 어쩜 이렇게 다정할까.
혼자 여행하면서도 계속해서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그들의 다정함 덕분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쭉 걸어가다보니, 드디어 반나절만에 내 눈에 익숙해진 그 풍경이 나타났다.
아, 내가 정말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구나...
한번이라도 봤던 풍경을 다시 눈에 담는 순간의 안도감이란...
잔뜩 헤맨 탓에, 먹는둥 마는둥 했던 저녁식사는 이미 잊혀지고, 긴장감이 풀리니 공복감이 밀려온다.
이놈의 배꼽시계는 정직하기도 하지. 만달레이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은 나일론 아이스크림과 함께.
세븐이 지천에 널린 태국에서도 그렇게 더운데도 희한하게 아이스크림을 한번 안사먹게 되던데.
오랜만에 입안을 채우는 차갑고 달콥한 감각에, 술도 안마셨는데 기분이 잔뜩 좋아져 버렸다.
나, 천상 여자구나. 우후후훗.
만달레이의 랜드마크라고 하면 오바인가? 유명하고 유명하다는 그 나일론 아이스크림. 나일론 호텔 근처에 있다.
뭔가 묘한 느낌인데 빈티지틱한게 엽서로 만들면 귀엽겠단 생각을 했네.
요거이 팥들어간 아이스크림. 맛난다. :)
집으로 돌아와 바간행 버스티켓을 받아들고, 그렇게 만달레이에서 보낸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짧았지만 진한 여운. 그리고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무언의 약속을 하게 된 만달레이.
잘자요, sweet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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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더위보다는 도착했던 날의 새벽이 더 기억에 남는,
거리의 풍경보다는 예쁜 색의 하늘을 더 많이 담게 되었던 만달레이.
내가 기억하는 그 곳의 색은 아마도 해뜰 무렵의...어스름한 푸른빛.
이제, 바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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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숙제처럼 남아있던 미얀마 여행기를 이제 슬슬 마무리 지어볼까 합니다. :)
작년 10월에 여기까지 써놓았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반년이 훌쩍 지나갔네요...
바간에서의 여정은 당시에 받았던 느낌과 많이 달라져 있겠지만,
제 안에 있는 미얀마는 크게 변할 일이 없었으니, 잊기전에 기억을 나눌게요. 조금 천천히.
그럼 앞으로의 여정도 잘 부탁드려요 :) 혹시나 기다리신 분들 계심... 으헝 이제와서 죄송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