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시간 여행기] 나홀로 31일 동남아 여행 - Day 17 (Hsipaw)
어쩌다 보니 연참이 되어버렸네요. 내일 올릴까 하다가 항상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지라 올릴 수 있을때 올리자 싶어서 올립니다.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네요.
http://lkfar.tistory.com/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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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댁꼬"
"꾸륵꾸륵"
여기까지는 견딘다.
"이히히힝"
말 울음 소리에 더 이상 못 견디고 일어난다. 말 소리까지 들을지는 몰랐다. 여기 닭은 뭐 이리 부지런할까? 새벽 3시부터 울어대더니 쉬지 않고 끊이 없이 운다.
어제 조조의 확언대로 신기하게 이곳에 모기는 없었다. 엄청난 모기의 공격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건 의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잔 것은 아니다.
그 힘든 여정을 하고 목욕을 못한 탓에 온 몸에 마른 땀과 찝찝함, 그리고 그것을 떠나서 뭔가 이상하게 졸리지가 않았다. 잠자리가 바껴서 그런걸까?
새벽 5시,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잠도 안오는데 있으면 뭐하나,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나와보니 아직 달님이 해님한테 자리를 비키지도 않았는데 이곳의 하루는 진작에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말의 먹이를 주고 있고, 한쪽에서는 잎을 말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녹차 엄청 유명하다고 해서 조금 사갈 수 있냐고 물었었다. 조조가 자꾸 이해를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기에 현지인한테 물었더니 500키얏, 그리고 1000키얏짜리가 있단다. 여기가 녹차로 유명하다니 이거나 좀 기념품 및 선물로 사갈까 생각중이다.
동네 한바퀴를 걷고 어제도 왔었던 이곳의 유일한 사원 계단에 앉는다. 앞집에서는 엄마와 딸의 대화가 이어진다. 애들은 왜 잠이 없을까? 우리 조카도 가끔 우리 집에 놀러오면 새벽부터 날 깨워서 놀자고 난리다.
동자승 두명이 멀리서 걸어온다. 어제 봤던 그 영어를 꽤하는 동자승도 있다.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를 한다. 손에 뭔가를 들고 오는데 보아하니 아침인가보다. 물어보니 아침이 맞단다. 시내에서는 아침마다 적선을 하러 돌아다니더니 여기서는 아예 저렇게 도시락 식으로 준비해주나보다.
계단에 앉아서 키보드를 열고 핸드폰을 얹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블루투스로 연결된다. 에버노트를 키고 새로운 글을 누르고 Day 17이라 제목을 타이핑한다. 잠깐, 아까 근데 Day 16이 없었던 것 같다. 잘못 본거겠지? 다시 나가보니 없다.
허, 너 왜 이러니. 이건 절대 다시 못 친다. 에버노트는 이러면 안되잖아. 순간 화들짝 놀라서 에버노트만 껐다 다시 켜보고, 전체 리부팅도 해본다. 없다. 맨 밑으로 리스트를 내리니 나온다. 진짜 순간 식겁했다. 보아하니 여기는 인터넷이 안터져서 동기화를 못하니 맨 밑으로 내려가있나보다. 그래, 에버노트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아침부터 깜짝 놀랬네.
종소리가 울린다. 6시 정각에 울리는 것을 보니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보다. 흠, 그나저나 배에 신호가 살짝 오는데 어쩌지? 여기 화장실 생각보다 깨끗하긴 하던데 내 채취를 남기고 갈까? 조금 더 두고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까 말들이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다. 말이 3마리이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손바닥을 내밀고 가만히 다가서본다. 고개를 훽 재끼며 피한다. 다시 천천히 다가선다. 가만히 있는다. 머리를 살짝 어루만져준다. 말을 만진 첫 경험이다. 말도 꽤나 귀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까 그 동자승이 도시락을 들고 이곳에도 와 있다. 아직 적선이 안 끝났나보다. 오늘 몇번째 마주치다 보니 "밍글라바"를 외치기도 애매해서 살짝 눈인사를 해준다.
차를 한잔 따라서 자리를 잡는다. 미얀마의 여인들은 한국인의 눈에는, 아니 최소한 내 눈에는 미인들이 상당히 많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산골 지방에서도 그렇고, 그다지 꾸미지 않았음에도 참 아름답다. 미소가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마도 몇년만 지나면 미얀마의 여인들이 세상에 미녀들로 알려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근데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나서 이 사람들이 불편한건 아니겠지? 어제 봐도 그다지 신경 안쓰는듯 하더니 오늘도 차 주전자만 하나 주고 자기들끼리 할일을 한다. 괜한 챙김 보다 이런 자연스러운게 더 좋다. 여기 유일하게 있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한글, 수학, 과학 등을 가르치며 한 일년간 머물 수도 있겠다. 나쁘지는 않지만 과욕이겠지.
말 목에서 나는 종소리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도마 소리를 들으며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다. 정말 아무도 날 신경 안써서 좋다. 근심과 고민이 없어보이지만 이들도 분명 고민이 많겠지. 이번 차밭 농사가 잘 안됐다던가, 물이 부족하게 받아졌던가, 아니면 애들 교육 문제라든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너무 과하게 포장해서 생각하지는 말자. 안타까워 할 필요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뿐.
시간이 아직 좀 일러서 좀 더 누워있을까 싶어 올라가본다. 근데 배에 신호가 살살 온다. 그래, 반항하지 말자. 자연에는 순응해야 하는 법이야. 난 할 수 있다.
일어나서 내려온다. 조조와 해태가 있길래, 배를 살살 만지면서 제스쳐를 하고 화장실로 간다. 그래, 군대에서 훨씬 더 안좋은 곳에서도 해결했는데 뭐. 사실 여기는 꽤나 깨끗하다. 이정도 쯤이야.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온다. 뭐 별거 아니네. 손을 씻고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역시 근심이 해결되야 하루가 편해진다. 아, 아름다운 세상이구먼.
앉아있는데 해태가 한글에 관심을 갖는다. 한글 가르쳐줄까, 라고 물으니 좋단다. 오케이, 팬과 종이를 가져오렴. 일단 한글의 알파벳을 다 적어주고 조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가르치다보니 우리나라 말은 발음 한음절마다 한글자로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는게 어려운듯 하다. 특히 영어를 먼저 배운 애들은 발음을 영어로 적어주니 발음기호로 인식 못하고 영어 알파벳으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역시 30분 정도 가르치니 대충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가르치면서 느끼지만 발음 단위로 생각하는 개념만 파악하면 한글은 배우기 쉽다. 세종대왕님 만세. 근데 해태, 머리가 좋지는 않은거 같다... 다른 것 보다 못 알아들은게 뻔한데 왜 자꾸 알겠다고 하니. 공부하는데 매우 안좋은 버릇이란다.
그나저나 한국인 잘 오지도 않는데 배워서 뭐할려나. 그냥 차라리 중국어나 불어를 배우는게 도움이 될듯 한데. 여기에 한류가 전파되면서 사람들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하지만 한국인은 없으니 날 붙들고 자꾸 얘기를 할려고 한다.
그러고 있는데 드디어 아침이 준비 됐다고 먹으란다. 아, 오늘은 얼마나 걸을려나. 어제보다는 쉽다고 했으니 그래도 할만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밥을 또 언제 먹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한다.
프랑스놈들 어제부터 조금 이상해졌다. 이제 그냥 대놓고 불어로만 얘기한다. 뭔가 마음에 안들었나? 내가 술을 덜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가이드들이 나랑 놀아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트래킹할때 현지인들과 어울리는게 얘네의 가장 큰 목표이기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건 왕따 아니여. 대놓고 영어는 한마디도 안한다.
"그래서 그거 맛있어?"라고 한국말로 물어본다. "hmm, sorry?" 그래, 못 알아듣는게 당연하지. 영어로 얘기해준다. "아 한국말 하는 줄 알고. 너희도 나 불어 하는 줄 알고 이러는거지?"
라고 머리 속에서만 실컷 상상을 한다... 이런 말할 정도의 배짱은 없지만 상상할 배짱은 충분하다. 됐어, 내가 너희를 왕따 시키면 되지. 조조와 해태랑 같이 어울려서 논다. 그러면 4:3, 아직 숫자는 너희가 앞서지만 이정도면 할만하지. 치사한 놈들.
이래서 오래 같이 여행 다닌 사람들과 같이 끼면 안된다. 거기에 커플이 있으면 설상가상이다. 굳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친하게 지낼 이유를 못 느끼기에, 어제는 그럭저럭 잘 어울릴려고 노력했지만 자기들 스타일이 아닌듯 하니 그냥 무시해버린다. 다수의 횡포다. 흠, 그러고보니 인도 여행 다닐때 홀로 꼈던 중국 여자애가 우리를 이렇게 여겼을까? 거기다가 나는 커플...? 아냐, 난 잘 챙겨줬던것 같다. 진짜다.
밥을 먹고 현지 대장에게 녹차를 사도 되냐고 묻는다. 어제 500키얏, 1000키얏으로 판매한다고 한걸 기억해서 기념품으로 좀 줄까 싶어서 500키얏짜리 4개를 달라고 한다. 알겠다더니 조금 기다리란다.
무슨 쌀 한자루를 가지고 왔다. 하, 이걸 어떻게 가져가라고. 많이 줬다고 생색을 내니 고맙다고 하긴 하는데, 이걸 들고 가는게 걱정이다. 일단 비닐 봉지를 달라고 하고 거기다가 담는다. 물도 하나 사서 담고, 카메라도 넣는다. 가는 길은 그래도 쉽다고 했으니 비닐 봉지 하나는 들고 갈 수 있을거라 믿는다.
어제 먹은 맥주와 기타 등등을 정산할 시간이다. 물어보니 녹차를 사서인지 5000키얏 정도 나왔다. 그런데 환전을 못해서 키얏이 부족하다. 달라도 될까? 물어보니 난색을 표한다. 하긴 여기서 달라를 어디다 쓰겠나. 조조한테 내려가서 준다고 대신 내주면 안되냐니까 그냥 환전을 해겠다고 한다. 10달라에 5000키얏 두장을 받는다. 어제 소액권은 970을 해줬으니 어찌 보면 나한테도 이득이다. 그냥 조용히 주는걸 받는다.
자, 이제 진짜 출발이다. 뭔가 조용히 정리를 하고 싶은데 프랑스놈들 때문도 그렇고 뭔가 정신 없이 출발을 하게 된다. 급하게 현지 분들하고 인사를 나눈다. 어제 하룻밤 재워준거에 대해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마음에 안든다. 이래서 혼자 다니는게 좋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하는게 싫다.
다들 출발을 해서 인사를 후딱 끝내고 따라간다. 오늘은 그냥 쪼리를 신고 가기로 했다. 어제 운동화를 신어서 더 힘들었었던 것 같다. 운동화가 작은건지, 진짜 이대로 계속 걸으면 새끼 발톱이 빠질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신 반창고를 단단히 붙이고 쪼리를 발가락으로 움켜지고 길을 나선다.
조금 걸어가고 뒤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오면서 보니 다른 여행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곳은 나한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솔직히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달라서 어찌 보면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이 사람들이 문제였다기 보다 내 행동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관광지라면 이들이 나에게 다가오겠지만 이런 그냥 마을이라면 내가 먼저 다가가야했다. 기억에도 그다지 남지 않을 프랑스놈들과 어울리는게 아니라 차라리 무리를 멋어나더라도 홀로 밖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용기가 부족했던거지 뭐. 그래도 이곳, 따라다니며 계속 "헬로", "바이바이"를 외치던 꼬마들은 기억에 꽤나 오래 남을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나름 편안한 길로 시작한다. 약간의 내리막이며 숲이라서 그늘도 중간 중간 많이 있다. 봉투를 들고 가는게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이긴 한다. 중간에 쉬는 곳에서 얘를 어떻게든 가방에 묶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조금 가다가 맨 앞에서 길을 리드하는 조조가 갑자기 멈추고 돌맹이를 줏어서 앞으로 던진다. 뭐지?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앞 그룹에 있어서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에 자세히 보니 작은 뱀이 하나 있다. 근데 혼자 있는게 아니라 쥐를 몸으로 감싸서 죽인듯 싶다. 오, 목격하기 힘든 자연의 모습이다. 근데 이 동네에는 쥐가 많나? 어제는 고양이가 한마리 물고 오더니 여기서는 뱀이 먹이로 삼는다. 그냥 동네북이 아닌 동네쥐구먼.
우리가 다가가니 뱀이 쥐를 버리고 줄행랑을 친다. 이런 깡다구 없는 놈, 그래서 먹고 살겠냐. 사실 뭔가 미안하다. 개도 먹을때는 안건드린다는데, 얘는 지가 사냥한 애도 못 먹게 했으니 어찌 안 미안할 수가 있나. 우리 지나가면 다시 와서 먹을려나?
쉬는 타임. 가방 위에 녹차 덩어리를 넣고 그 위에 물통을 끼워본다. 어디서 이러고 다니는 사람들 꽤 본 것 같은데, 이러면 버티겠지?
조금 쉬다 다시 출발한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훌륭하다. 쫄이도 은근 괜찮고, 발바닥도 아직까지는 괜찮다. 왠지 이번 귀가 트래킹은 수월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해본다.
조금 걸어가는데 물통이 빠져서 떨어진다. 조금 약하게 묶었나? 어서 줏어서 다시 넣고 꽉 조인다. 이게 혼자 가는게 아니다보니 조금만 주춤거려도 뒤로 쳐진다. 정비를 후딱 하고 어서 뒤따라간다. 어쩌다보니 또 다시 맨 뒤에서 가게 되었다.
얼마 안 걸어 갔는데 또 떨어진다. 줏어서 넣지만 곧 다시 떨어진다. 아 이거 안될듯 싶다. 앞팀하고 거리도 좀 늦어지길래 그냥 손에 들고 걸어간다. 왼손에 물,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고 갈려니 영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왼쪽 발가락에 반창고도 떨어진다. 아 거기 떨어지면 안되는데. 항상 상처가 나는 곳이라 불안하다. 하지만 다행히 첫번째 목적지인 작은 폭포에 도착한다.
조조야, 이게 무슨 폭포냐, 그냥 개울이지. 그래도 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할게 많다. 자리를 잡고 어서 정비를 시작한다. 안에서 반창고를 찾을 자신은 너무 없어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붙여놓은 반창고를 떼서 왼쪽에 떨어진 곳에 붙여본다. 바보야, 이게 붙을리가 있냐. 어쩌지 싶다고 또 금방 출발할듯 해서 그냥 내비둔다. 찢어지라고 그래. 어차피 오늘 그리 안 힘들다고 했으니 괜찮을듯 싶다. 게다가 지금은 이상하게 그다지 아프지 않다.
이번에는 물을 처리해야 한다. 다들 물을 첨벙 거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나만 가방 정리를 한다. 아 무식하게 이거 뭐 이리 가져온걸까. 패딩 잠바야 이해라도 되는데, 우비, 여벌 옷, 수영복, 방수팩까지 그냥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거기에 녹차까지 사서 끼얹으니 무슨 가방이 산더미만하다. 대략 4키로는 될듯 하다. 항상 인생의 무게 드립 치더니 결국 이리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 저 중에 이번 트래킹에서 꺼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까 물이 떨어진게 밑에 넣어서 그런듯 해서 이번에는 위쪽으로 넣는다. 가방 입구가 조금 더 넓게 펼쳐져 있으니 좀 더 버티겠지. 그러고 있으니 또 출발이다. 그래, 일어나서 또 한번 걸어보자.
폭포로 코스프레하고 있는 개울을 지나서 2분 걸어가자마자 또 물은 떨어진다. 에혀, 그냥 손에 들자. 포기하고 손에 들고 간다. 피로가 두배, 짜증이 두배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갑자기 언덕이 나타난다. 조조, 이건 말과 다르잖아. 언덕이 장난아니다. 엊그제 보트투어, 어제 여기까지 오는 길까지 해서 더 이상 올라갈 힘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냥 고민도 안하고 뒤로 쳐진다. 그래도 해태가 자기 한글 스승이라 그런지 나를 챙겨주며 뒤에서 같이 올라와준다. 아 이거 근데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못 올라가! 라고 소리를 지를 즈음에 조조가 휴식을 선언한다. 아 다행이다. 진짜 한발짝도 더 못 올라갈거라고 생각했었다. 언덕에 다행히 그늘이 있어서 앉을 수가 있다. 가방이고 뭐고 그냥 집어 던지고 바닥에 쓰러지듯이 주저앉는다.
이제 언덕은 3분만 올라가면 된단다. 진짜지? 아 나는 이 와중에도 가방정리를 다시 하고 있다. 물을 손에 들고 가니 뭔가 더 힘들다. 이 녹차, 내가 아무한테 주나 봐라.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리스트 쭉 뽑아서 탑텐한테만 작은 병에 담아서 줄거다. 이거 그냥 녹차 아니다. 미얀마 오지에서 내가 정말 피와 땀을 흘리며 가져온거다. 이번에는 물통을 가방 안에 쑤셔넣어본다. 꾸역꾸역 넣으니 들어간다. 그 위에 녹차를 올린다. 혹시 안에 내용물이 안떨어질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안정적이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버텨줘. 나도 좀 살자. 가장 체력이 약한데 가방까지 이러면 어쩌라는거야.
역시 가방을 정리하고 있으니 다시 출발. 이래서 처음에 준비를 잘해야 하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난 군대 헛갔다왔다. 행군할때 항상 처음에 짐을 잘 싸는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던것 같은데 10년 이상 지난 지금 그 깨달음을 여기서 다시 얻어간다.
언덕은 마지막 남은 숨을 털어넣고 나니 그래도 다행히 끝이 난다. 이제 좀 쉬워질려나? 쉬워지기는 개뿔. 아니 도데체 왜 오늘 일정은 쉽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걸까.
네버앤딩 땡볕행군이 시작된다. 이건 뭐 쉴 곳도 없다. 미얀마에 지금 추수기가 지나서인지 모든 밭을 다 태워버렸다. 그런 나무 하나 없는 밭을 내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의 짐을 메고 지나간다. 태양은 하늘 위에, 그리고 가끔 불이 안꺼져서 남은 불도 땅에. 아래 위로 그냥 뜨거움이 쌍으로 나를 괴롭힌다.
이거 얼마나 갈까? 여기서는 무슨 철학적인 사고 이딴거 절대 못하겠다. 그냥 한발 한발 앞으로 갈 뿐이다. 그래도 걷는 방식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걸을때 바깥쪽을 먼저 땅에 대다보니 바깥쪽 발가락들이 짓물리는 경향이 있었나보다. 갑자기 쌩뚱맞은 깨달음이 와서 안쪽으로 의식하고 발을 디디니,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왼쪽 3번째 발가락과, 오른쪽 새끼 발가락의 통증이 훨씬 완환된다. 이거,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내 팔자걸음이 문제였나?
한발 한발 집중하며 걸어가니 그래도 시간은 빨리 간다. 여긴 주변을 즐기는게 아니라 무슨 견디는 체험이다. 극기훈련이냐. 도데체 내가 이걸 왜 내 피 같은 돈을 주고 하고 있는걸까. 도데체 왜.
처음에는 내가 중간쯤 가고 있었다. 나름 쳐질걸 내가 알기에 미리 행동하는 영특함이었다. 지금은 맨 뒤다. 충실한 제자인 해태만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충실한 제자에게 물어본다.
"제자야, 지금 우리가 이 땡볕에 1시간 넘게 걸은거 같다. 도데체 얼마나 더 가야 우리에게 휴식이 있는거냐."
"스승님, 1시반 반은 더 가야 하옵니다."
후... 해태 말로는 앞으로 1시간반은 최소한 더 가야 그늘이 나온단다. 여기는 쉴 곳도 없다. 그늘이 있어야 쉬지. 너 햇볕, 나 이거 돈 내고 걷는 호구야. 그냥 내리 걷는거다. 역시 비수기는 비수기인 이유가 있는거다.
제자야, 그래도 정신을 좀 돌려보자구나. 해태가 뒤에서 묵묵하게 따라오길래 나를 따라해보라고 한다. "가나다라마바사". 좀 쌩뚱맞지만 잘 따라한다. 역시 앞부분은 쉽다. 10번 정도 반복한다.
자, 다음 구절로 넘어가자. "아자차카타파하." 역시 못 따라한다. 괜찮아 어려운거야. 나도 아침에 한번 해보고 깨달았어. 다시 참을성을 가지고 한다. "아자차카타파하."
5번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난다. 어려운건 알겠는데, 그래도 내가 천천히 해주고 있지 않니. 내 짜증을 느낀걸까? 드디어 성공한다.
둘이 내가 만든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하" 노래를 부르며 간다. 즉흥적으로 만든거라 이건 분명히 기억 못할거다. 물어보지 말아라.
진짜 1시간반 이상을 간다. 땡볕에서 3시간 이상을 간거 같다. 저 멀리서 쉬고 있는 인원들이 보인다. 나랑 해태가 너무 쳐졌기에 이들은 거의 20분 이상을 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걷는 방식에서 획기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해도 일시적이다. 안쪽을 집중적으로 짚으니 이제는 안쪽에 물집이 잡히는듯 하다. 군대 이후 잡혀 본적 없는데.
도착하니, 자 이제 가자, 란다. 그래그래, 농담인건 아는데, 지금은 재미 없거든. 5분만 쉬자고 그래도 대꾸를 해주고 쓰러진다. 그래도 코코와 니코 이 두 친구는 나름 챙겨주려는 노력이 보인다. 유은과 그 모델 여친이 문제다. 이놈들은 나를 무슨 투명인간 취급한다.
또 다시 출발한다. 그래도 여기서는 이제 얼마 안남았단다. 30분 정도? 그래 힘을 내자. 이게 행군할때와 마찬가지로 한번 쉴때마다 다시 일어나면 더 힘들다. 오히려 아픈 곳을 지긋이 꿈 참고 계속 밟아줘야 덜 아프다.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진짜 30분이겠지? 일단 마을 하나에 도착한다. 이 마을이 마지막 마을이란다. 물이라도 채워야 할듯 해서 그 곳에 들린다. 여기 물이라도 수급이 안되면 진짜 걷기 힘들겠다. 다행히 중간 중간에 물 채우는 곳이 있다.
근데 항상 궁금했던건데, 연료를 짐으로 싣고 걸어가는게 과연 효율적인건가? 연료를 넣은 만큼 연료를 더 먹을텐데, 이게 그 실은 연료보다는 덜한거겠지? 물을 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든다. 이 물을 힘들게 들고 오느라 더 힘들었던거를 생각하면 그냥 안 들고 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뭐 자세히 생각은 안해봤지만 상식적으로 아닐거라는 생각은 든다.
어느 곳에서든 멈추면 차를 준다. 그냥 뭔가 대접을 하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사람들이 담배를 피니까 슈퍼 아주머니가 물 담배를 준다.
유은이 마리화나를 물어본다. 아 그놈의 마약, 그만 좀 하지. 그래, 장기 여행자로서 이해는 하는데, 그냥 내가 꼴보기 싫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걸까.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조조가 거짓말을 안했다. 최종 목적지인 폭포에 드디어 도착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름 제대로 된 폭포다. 지금 시각이 2시반, 8시에 출발했으니 6시간 반을 걸은 셈이다. 어제도 그 정도 걸었다. 무슨 오늘이 쉽긴 뭐가 더 쉬워. 이마를 만져보니 따갑다. 목 뒤도 따끔따끔하다. 그 뜨거운 햇볕을 그늘 없이 서너시간을 직접 받아들였으니 당연하다. 이건 약간 화상의 정도이다.
폭포를 보고 다들 뛰어 올라간다. 나도 올라가본다. 확실히 물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앉아만 있어도 바람이 시원하다. 니코가 먼저 폭포에 옷을 다 입은채로 뛰어든다. 유은과 코코는 옷을 벗고 뛰어든다. 이놈들은 그냥 언제나 훌러덩이구나. 걸어오면서 얘네와 벽이 더 커져서인지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모델 언니는 밑에서 그냥 발만 씻고 있다. 나도 그 근처에서 얼굴을 씻고, 그래도 머리를 갖다대고 감아준다. 짧은 머리의 장점이지.
그래도 가장 착한 니코가 같이 들어오라고 권유한다. 그냥 뭔가 싫다. 바람이 시원해서 충분하고, 옷이 젖으면 마지막 걸을때 몸이 무거워서 불편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만약 지난번 보트투어 일행이었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들어갔을거다. 그냥 지금은 어여 이 트래킹을 끝내고 싶다.
폭포에서 한 30분을 보낸다. 이제 시간도 3시라 배도 고프다. 다른 곳은 관광객을 배려해서 이런 스케쥴이면 중간에 점심도 주고 할법한데 미얀마는 그런거 없다. 확실히 관광지로서 발전은 아직 더디다. 그게 매력이지만.
다들 내려오고 마지막 길을 나선다. 물어보니 여기서 15분 정도 걸어가고 그곳에서부터는 뚝뚝을 타고 간단다. 오 좋은데? 마지막 힘을 내서 가본다.
언제나 마지막 한 걸음이 힘들다. 15분이 맞긴 한데, 발바닥도 불이 나고, 얼굴도 화끈화끈거리니 영 힘들다. 진짜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도착한다.
최종 목적지에는 또 슈퍼가 하나 있다. 이곳들 은근히 수익이 꽤 될거 같다. 어찌 보면 미얀마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게 물인거 같기도 하다. 근데 여기 슈퍼는 참치냉장고 같이 생긴 애가 있다. 미얀마에서 단 한번도 진짜 차가운 음료를 먹어본적이 없기에 혹한다. 원래는 식사를 하면서 물을 마실려고 했는데 결국 유혹을 몇견디고 400키얏짜리 오렌즈 탄산음료를 구매한다.
야, 살얼음이 있다. 이런게 미얀마에도 있긴 있구나. 목이 아파서 한번에 못 먹을 정도다. 두세번에 나눠서 먹고 있으니 뚝뚝이 온다. 앞에는 그 여사장님의 남편이 타고 있다.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그 무뚝뚝한 사람도 여러번 마주치면 어쩔 수 없는게 사람의 인연인가보다.
오면서 해태한테 들었는데 그 곳의 이름은 '보보네' 사장님 이름은 '마보사'이며, 해태의 큰 이모라고 한다. 조조는 가족은 아니란다. 어찌 보면 내 시포에서의 경험에 가장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제 이름을 처음 알았다.
뚝뚝을 타고 한 15분 가니 보보네 식당에 도착한다. 다들 내려서 식당으로 들어간다. 아 너무 배고프다. 나는 밥을 먹어야겠다. 근데 얘네랑 굳이 같이 먹고 싶지는 않다.
나야 이곳에 애정이 많지만 얘네가 여기서 먹을까? 다른 곳에 먹어라, 다른 곳에 가서 먹어라, 주문을 건다. 눈치 없는 종업원, 5명 테이블을 만든다. 눈치 없는게 아니라 영업이겠지? 그 짦은 순간에 유은과 여자친구는 이미 내가 앉을 수 없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 뭔가 짜증난다. 나도 너 싫거든. 그래도 니코와 코코는 당연하게 내 옆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유은을 보면서 불어로 뭐라 하는데, 내 짧은 불어로 이쪽으로 와서 앉으라는 얘기로 들린다. 아 이 시츄에이션은 뭐지?
유은과 여친이 결국 합석해서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뭐하냐, 지네끼리 불어로 계속 얘기하는데. 나도 그냥 신경 끄고 여기 여사장님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해태와 조조와 인사를 나눈다. 걔네 이제 떠난다길래 페이스북 추가도 한다. 나한테만 물어본다.
나는 마보사한테 저번에 먹었던 샨누들을 시킨다. 니코와 코코는 배가 그다지 안고프다고 안시키고(어떻게 안 고플수가 있지?) 유은과 여친은 치킨 하나를 시키고 밥을 두개 시킨다. 그래 장기여행자면 돈이 없지. 이건 이해한다.
코코와 니코는 밥을 안시켰으니 음료만 마시고 자리를 떠난다. 어차피 같은 숙소라 봐서 아침 먹으면서 보자고 인사하길래 받아준다. 얘네한테도 사실 좋은 감정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느낌이다.
둘이 떠나니, 진짜 이 커플은 나를 또 다시 투명인간 취급한다. 나도 뭐, 음식이 나왔길래 혼자 맛있게 먹는다. 아 진짜 같이 어울리기도 싫은 종자들하고 이렇게 있는거 자체가 짜증난다.
아 근데 밥은 너무 맛있다. 그냥 국물까지 후루룩 흡입한다.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나, 그렇게 운동을 하고, 점심을 오후 3시반에 먹는데. 오늘은 환전을 해야만 한다. 저번에 5시반에 가서 문을 닫았었기에 조금 의식해서 빨리 먹는다.
밥을 싹 다 비우고, 마보사한테 여기 가방을 맡기고 은행 좀 갔다오겠다고 한다. 이 가방 워낙 무거워서 어깨가 아려온다. 마보사야 당연히 그러라고 봐주겠다고 하고 자기 옆에 놔둔다. 그래도 나는 예의를 지켜야겠기에 유은과 여친한테 대충 인사하고 나온다.
3시 50분, 혹시나 싶어서 서둘러서 걸어간다. 아 원래 이리 멀었나. 발바닥이 불타오르고 얼굴이 따가워서 그늘로 피하며 도착한다. 온 몸에 먼지가 자욱한데도 은행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게 맞이해준다.
근데, 문을 닫았단다. 하, 도데체 언제 닫는거야. 물어보니 2시반이란다. 어쩌지? 이제 돈이 거의 없는데. 그래도 오늘 조조가 환전해준 덕에 6000키얏 정도는 남아있다. 뭐 어쩔 수 없지.
가방을 찾으러 보보네로 돌아가니 유은 커플이 나오는게 보인다. 아직 있엇으면 숙소로 다시 돌아가야 했는데 다행이다. 보보네에서 가방을 찾고 나도 이제 레드드래곤으로 향한다.
천천히 걸어갔는데도 둘이서 아직 수속 중이다. 잠시 무시하고 리셉션에 앉아서 에어컨으로 땀을 식힌다. 이 둘도 팬방에 있더니 오늘은 에어컨 방으로 가나보다. 하긴 오늘은 어쩔 수 없겠지. 팬, 에어컨이 문제가 아니라 빨래를 할려면 방에 화장실이 있어야만 할거다.
둘이 올라가고 프론트의 매니저한테 간다. 오늘은 3일째, 더 할인 받아야겠다. 원래 비시즌 가격이 10달라에 에어컨 3달라인데, 지난번에 1달라 할인을 받았다. 나 오늘 3일째야, 라며 그래도 할인을 좀 더 해줘야 하지 않겠어? 강요하는 눈빛이 아니라 웃으며 눈을 마주본다. "모레"라고 외치니 빵 터진다. '모레'는 이번에 배운 피곤하다는 미얀마어이다. 네고에서 웃으면 분위기는 넘어온거다. 결국 1달라를 더 깍아주면서 절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난 얘기한게 아니라 쓴거니까 괜찮겠지. 갑자기 유은 커플이 얼마에 묵었을지 궁금해진다.
가방을 찾으러 간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라데'를 외친다. 역시 이번에 배운 '이쁘다'는 뜻이다. 그냥 이런 간단한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은 경계가 풀린다. 작업도 아니고 그냥 친근함을 표시하는 나의 방법이다.
숙소에 올라가니 에어컨이 켜져있다. 잠시 의자에 앉는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아 이번 트래킹 꽤나, 아니 많이 힘들었다. 내가 몸이 안좋은건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다시는 못하겠다. 원래 Kalaw에서 인레호수로의 트래킹도 고려했었는데 무조건 걔는 아웃이다.
너무 몸이 더러워서 침대에 누울 수도 없다. 바로 옷을 다 화장실로 쳐박는다. 티셔츠는 이틀을 씻지도 않고 입었더니 땀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프린팅이 되어 있다. 가방 안에 있던 쓰지도 않은 곳들도 모두 집어넣는다. 가방도 집어넣는다. 가방이 아마 가장 더러울거다. 일단 샤워기를 틀고 대충 먼지를 벗어내며 빨래를 할만한 통을 찾는다.
유일한 통이 변기 옆에 휴지를 버리는 통이다. 딱 1분 고민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법이다. 그 안에 있는 검을 봉지를 빼고, 그래도 양심상 물로 한번 행군다. 바간에서 사온 새제를 풀고 물을 채운다. 그리고 빨래를 모두 쳐박는다. 넣자마자 물이 갈색이 된다.
한번 행구고 다시 새제를 푼다. 그리고 목욕을 시작한다. 오늘은 날림으로 목욕하면 안되는 날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때수건을 가지고 와서 비누를 묻히고 온몸을 닦는다. 하도 더러워서 거품이 안난다. 이틀을 안씻고 이리 돌아다녔으니 당연하다.
하, 때수건이 까매진다. 내 생전 처음 보는 현상이다. 이거 때수건도 빨래에 같이 넣고 세제로 빨아야 할려나? 몸을 단한번 닦았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다냐. 내 생전 처음으로 비누로 때수건을 빤다. 그리고 비누를 묻혀서 다시 몸을 닦는다. 또 까매진다. 도데체 몸이 얼마나 더러운거야.
대충 그래도 인간다워졌다고 생각이 들을 즈음, 변기 쓰레기통에 쑤셔놓은 빨래감들을 무자비하게 밟는다. 사실 발이 엄청 더럽긴 한데, 얘네도 만만치 않아서 큰 상관은 없을듯 하다. 무슨 구정물이 나온다. 물을 바꿔 담고 다시 밟는다. 또 구정물이다. 이 구정물은 내 발에서 나오는걸까 빨래에서 나오는걸까?
그래도 지도 양심은 있는데 10번 정도 하니 물이 그나마 조금 맑아진다. 위에는 샤워를 틀어놓고, 밑에 수도에서 물을 받으며 발로 빨래를 밟고 있자니 내가 목욕을 하는건지 빨래를 하는건지 도통 알수가 없다. 하지만 몸도 아직 깨끗해질려면 멀었기에 물을 계속 틀어놓고 몸을 물에 맡긴 상태로 빨래는 꾸준히 발로 퍽퍽 밟아준다.
이제 이정도면 된듯 하다. 그래도 이 힘이 남아 있어서 천망다행이다. 물이 조금 그나마 회색을 띄길래 발로 그만 밟고 손으로 쳐댄다. 그리고 하나씩 꺼내서 행군다.
동남아에는 화장실 마다 변기 옆에 수압이 엄청 센 수도가 하나 있다. 이게 아마 큰일을 본 다음에 뒷처리를 하라고 있는거 같은데, 도통 이해가 안된다. 수압이 정말 어마어마해서 이걸 한번 틀면 엉덩이를 씻는게 아니라 화장실 사방에 뿌려지게 된다. 뒷처리 하다가 앞처리를 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게 빨래 행굴때는 딱이다. 어떻게 보면 더럽다 느낄지 모르지만 물은 물이다. 하수도 물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거다. 이걸 빨래에 대고 뿌리면 빨래 방망이로 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의도로 만들었건 그 물건의 가치는 소비자가 정하는 것, 나에게 변기 옆의 이것은 성능 좋은 빨래 방망이다.
하나하나 행구고 온힘을 다 해서 짠다. 물론 아직도 샤워기는 몸을 행구고 있다. 물이 안묻게 최대한 짠 후에 변기 뚜겅을 닫은 그 위에 올리려고 했더니... 아까 씻으면서 잠깐 앉은 곳이 구정물이 고여있다. 하, 정말 답이 없구나. 수압센 빨래 방망이로 거기를 한번 스윽 청소하고 짠 빨래를 얹는다. 이제 스펙타클한 빨래 및 목욕에 끝이 보인다.
몸은 한번 더 비누칠을 한다. 이정도로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어쩔 수 없다. 3번 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때수건도 따로 벅벅 씻어준다.
옷을 입고 빨래를 방에 널어놓는다.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가방 때문에 못 떠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겠다. 그래도 에어컨을 틀어놨으니 좀 빨리 마르지 않을까? 반대인가?
아 이마가 따끔따끔하다. 잠깐 거울을 보고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낸다. 저 시꺼머스는 누구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심하다. 특히 옷에 가려졌던 부분하고의 경계를 보니 오늘 얼마나 탄건지 느낌이 온다.
일단 외모적인걸 떠나서 이거 아파서 안되겠다. 내가 이마가 톡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이마에 모든 햇빛이 집중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서울에서 가져온 화상약이 있기에 이마 주변에 듬뿍 발라준다. 이 짧은 머리라도 두피쪽은 보호해줬는지 그쪽은 그래도 괜찮다. 목 뒤쪽도 통증이 있어서 골고루 발라준다.
그러고 나니 5시가 넘었다. 한시간 이상을 빨래, 목욕과 전쟁을 한 셈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괜찮다. 오늘은 방에서 좀 쉬면서 8시쯤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했기에 침대에 누워서 드디어 핸드폰을 손에 쥐어본다.
어제 글은 다 써놨기에 후딱 올리고 노여사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라오스로 가는 표를 아직 예약 못했단다. 뭐, 괜찮다. 노여사도 보고 싶고, 우리 냐옹이들도 보고 싶었기에 그냥 서울로 가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예매를 한단다. 뭐 이것도 괜찮다.
이리저리 하더니 라오스는 안되고 베트남으로 밖에 안된다고 한다. 뭐 역시나 그것도 괜찮다. 라오스를 가고 싶으면 버스 타고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결제하는데 회사라 그런지 안된단다. 흠 어쩔 수 없지. 그냥 내일 해주고 안되면 말라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는게 어디냐. 노트4에 카드 정보를 다 넣어놨기에 잃어버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모두 정지를 시켜놨다. 그래서 이런 결제가 필요한 부분은 노여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혹시 몰라서 하노이, 라오스 정보를 조금 보다 보니 8시다. 사실 내일 어딜 갈지도 안정했는데 지금 15일 후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키보드, 핸드폰, 카메라, 지갑을 들고 나선다. 가방을 빨았기에 이렇게 따로 들고 갈 수 밖에 없다.
오늘 저녁은 역시나 저번에 갔던 그 생맥주 집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도 이틀 고생했으니 이정도는 나에게 보상해줘야겠다. 오늘의 글을 중간 중간 썼지만 생맥주 한잔 시키고 한모금씩 마셔가며 글을 마무리 하는 것이 나에게 이번 여행에서의 즐거움이다. 가는 길에 보보네를 슬쩍 보니 조조가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 아는 척을 할까, 싶다가 그냥 내일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나간다.
꽤 멀지만 천천히 간다. 아직 발가락과 발바닥이 멀쩡하지 않기에 무리해서는 안된다. 멀리서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속도를 좀 낸다.
내 단골집, 내 시포에서의 하루를 정리하는 그 집, 바깥에 이번에 같이 트래킹을 했던 네명의 프랑스인이 앉아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이곳을 와야만 했었니. 아 진짜 꼴보고 싫은데. 일단 그래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슬쩍 인사를 한다. 코코가 날 보더니 잠시 합류하라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다가 내가 그냥 안으로 스윽 들어가니 넘어간다. 코코, 니코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오늘 저녁을 쟤네 때문에 망칠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지금부터 두세시간은 나만의 시간이다.
들어가자마자 웨이터가 날 보더니 매우 반가워한다. 하긴 그리 마셔됐으니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날 보더니 일단 생맥주 한잔부터 주문할거지, 라고 해서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냐고 한다.
지난번에 52잔을 먹었단다. 4명이니, 13잔씩이다. 하나가 350미리니까, 인당 4.5리터를 먹은거다. 아 미쳤지. 다음날 숙취가 그정도였던게 다행이다. 근데 내가 마지막까지 똑같이 마셨던가? 뭐 기억이 나야지.
저번에 고기가 꽤나 맛있었어서 그걸 주문한다. 4500키얏, 꽤나 비싼 가격인데 오늘은 그래도 좀 맛있는걸 먹고 싶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면서 키보드를 핀다.
음식이 나온다. 음식을 두고, 맥주를 두고, 키보드를 두고, 그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가지니 여기가 천국이로세. 혼자 여행을 다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또 즐거움과 피곤함이 온다. 이번 이틀은 피곤함이 강했기에 지금의 이 순간이 너무 좋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안주 하나 먹고, 글을 한 문단씩 쓴다. 밖에 프랑스인들이 있지만 신경도 안쓰인다. 같이 있을때는 어쩔 수 없지만, 내 소중한 여행을 남들로 인해 방해받지는 않을테다.
여기에는 슬픈 눈을 한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 밥을 먹고 있으면 바로 옆으로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야옹 야옹"을 한다. 밥달라 이거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옆에 와있다. 나한테 고양이 냄새가 나나? 유독 고양이들이 가까이 온다. 오늘은 나도 배고픈데... 그래도 살점 하나 뚝 떼서 준다. 저 눈을 보면 누구도 안 줄수가 없을거다.
맥주를 다 먹어서 두잔째를 시킨다. 오늘은 딱 3잔까지 먹을 생각이다. 그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면서 나보고 언제까지 있을거냐고 꽤 오래 있는다고 말을 건다. 그래서 아마 내일 하루 더 있지 싶다고 한다. 사실 아직 모른다. 웨이터가 갑자기 미얀마에서 여자친구는 없냐고 묻는다. 아 난 한국에 이쁜 여친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 말고 미얀마에는 여친이 없냐고 물어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말을 잘못 했나 싶어서 항상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하는 노여사 사진을 보여준다. 이쁘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나보고 "네 여자친구 맛은 봤어?"라고 물어본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한다. 뭐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으니 아예 대놓고 성적으로 얘기를 한다.
하, 네가 뭔데 내 소중한 여자친구한테 성적인 농담을 하는건데. 순간 이건 뭐야 싶어서 빤히 쳐다보니 내가 못 알아들은지 알고 다시 얘기할려고 한다. 얘기하기도 짜증나서 손으로 저리 가라고 손짓한다. 오늘 내 여행 방해하는 사람 엄청 많다. 그냥 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 뿐인데 뭔 이리 짜증나는 놈들이 많다냐.
내가 정색하니까 "아, 이런 얘기 싫어해"하면서 알겠다고 하고 떠난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자기 여자친구를 대상으로 그런 얘기를 좋아할까. 쟤도 이런 농담이 먹힌적이 있으니 얘기를 하는거겠지. 세상에는 참 미친놈들이 많다. 어쨌든 오늘로서 이곳은 끝이다. 여기에 대해 좋았던 기억이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진다.
그래도 역시 내 저녁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 맥주를 하나 더 시켜서 난 그냥 내 여행을 한다. 웨이터하고는 눈도 안마주친다.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
고양이는 계속 옆에 있는다. 야 너 많이 먹었잖아. 그래도 너 때문에 여기 자리가 기분 나쁘지는 않으니 고맙다. 생선을 다 먹고 남은 머리를 통채로 던져준다. 이놈, 머리 찔끔찔끔 먹더니 날 바라본다. 내가 다 먹은걸 알았는지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이놈 똑똑하네. 다 먹은줄 어찌 알았지.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하기에 계산하고 나온다. 6100키얏이 나왔는데 다행히 남은 키얏이 6200키얏이다. 다 주고 그냥 잔돈도 안받고 나와버린다. 나오니 프랑스인들은 다 떠났다. 아 그 좋았던 기억이 이리 한순간에 안좋아질 수가 있을까.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보보네 보니 여사장님이 분주히 일하고 계신다. 여행이든 기억이든, 그 좋고 나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물이 아닌 인간이다. 아무리 훌륭한 관광지를 가도 사람들이 자기와 안맞으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도, 사람들이 좋으면 그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여행지가 된다. 시포에서는 참 양쪽의 기억들이 공존한다. 보보네 식구들과 보트트립 맴버들이 줬던 좋은 기억을 트래킹과 오늘의 술자리에서 상쇄시킨다. 하지만, 난 좋은 기억만 가져갈련다. 그게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다.
방에 오니, 노여사한테 카톡이 와있다. 이시간에 또 베트남 비행기표 예매를 해보았는데 안됐단다. 아니 지금 시간이면 한국시간 12시일텐데, 아까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와서 그냥 자지 뭘 또 이런데. 보트트림의 맴버들도 메일이 와있다. 영국인 유안은 방콕에 조만간 가니 시간되면 보자고 하고 프랑스인 요한은 지금 인레에 와있는데 너무 좋다며, 혹시 프랑스인 만나면 대작하지 말라고 짧은 영어로 농담이 쓰여있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차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안맞는 사람들한테 연연하면서 우울하게 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짧은 인생, 자기와 맞는 사람을 찾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빠듯하다. 짧은 인연이든 오랫동안 함께하는 인연이든, 이러한 좋은 인연들이 행복을 전달해주는 묘약의 재료가 되는 것 아닐까.
오늘은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네요.
http://lkfar.tistory.com/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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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댁꼬"
"꾸륵꾸륵"
여기까지는 견딘다.
"이히히힝"
말 울음 소리에 더 이상 못 견디고 일어난다. 말 소리까지 들을지는 몰랐다. 여기 닭은 뭐 이리 부지런할까? 새벽 3시부터 울어대더니 쉬지 않고 끊이 없이 운다.
어제 조조의 확언대로 신기하게 이곳에 모기는 없었다. 엄청난 모기의 공격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건 의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을 잘 잔 것은 아니다.
그 힘든 여정을 하고 목욕을 못한 탓에 온 몸에 마른 땀과 찝찝함, 그리고 그것을 떠나서 뭔가 이상하게 졸리지가 않았다. 잠자리가 바껴서 그런걸까?
새벽 5시, 아직 이른 새벽이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잠도 안오는데 있으면 뭐하나, 산책이라도 해야겠다. 나와보니 아직 달님이 해님한테 자리를 비키지도 않았는데 이곳의 하루는 진작에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말의 먹이를 주고 있고, 한쪽에서는 잎을 말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여기 녹차 엄청 유명하다고 해서 조금 사갈 수 있냐고 물었었다. 조조가 자꾸 이해를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해대기에 현지인한테 물었더니 500키얏, 그리고 1000키얏짜리가 있단다. 여기가 녹차로 유명하다니 이거나 좀 기념품 및 선물로 사갈까 생각중이다.
동네 한바퀴를 걷고 어제도 왔었던 이곳의 유일한 사원 계단에 앉는다. 앞집에서는 엄마와 딸의 대화가 이어진다. 애들은 왜 잠이 없을까? 우리 조카도 가끔 우리 집에 놀러오면 새벽부터 날 깨워서 놀자고 난리다.
동자승 두명이 멀리서 걸어온다. 어제 봤던 그 영어를 꽤하는 동자승도 있다. "굿모닝"이라고 영어로 인사를 한다. 손에 뭔가를 들고 오는데 보아하니 아침인가보다. 물어보니 아침이 맞단다. 시내에서는 아침마다 적선을 하러 돌아다니더니 여기서는 아예 저렇게 도시락 식으로 준비해주나보다.
계단에 앉아서 키보드를 열고 핸드폰을 얹으니 언제나 그렇듯이 블루투스로 연결된다. 에버노트를 키고 새로운 글을 누르고 Day 17이라 제목을 타이핑한다. 잠깐, 아까 근데 Day 16이 없었던 것 같다. 잘못 본거겠지? 다시 나가보니 없다.
허, 너 왜 이러니. 이건 절대 다시 못 친다. 에버노트는 이러면 안되잖아. 순간 화들짝 놀라서 에버노트만 껐다 다시 켜보고, 전체 리부팅도 해본다. 없다. 맨 밑으로 리스트를 내리니 나온다. 진짜 순간 식겁했다. 보아하니 여기는 인터넷이 안터져서 동기화를 못하니 맨 밑으로 내려가있나보다. 그래, 에버노트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아침부터 깜짝 놀랬네.
종소리가 울린다. 6시 정각에 울리는 것을 보니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인가보다. 흠, 그나저나 배에 신호가 살짝 오는데 어쩌지? 여기 화장실 생각보다 깨끗하긴 하던데 내 채취를 남기고 갈까? 조금 더 두고봐야겠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까 말들이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다. 말이 3마리이다. 어디서 본건 있어가지고 손바닥을 내밀고 가만히 다가서본다. 고개를 훽 재끼며 피한다. 다시 천천히 다가선다. 가만히 있는다. 머리를 살짝 어루만져준다. 말을 만진 첫 경험이다. 말도 꽤나 귀엽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까 그 동자승이 도시락을 들고 이곳에도 와 있다. 아직 적선이 안 끝났나보다. 오늘 몇번째 마주치다 보니 "밍글라바"를 외치기도 애매해서 살짝 눈인사를 해준다.
차를 한잔 따라서 자리를 잡는다. 미얀마의 여인들은 한국인의 눈에는, 아니 최소한 내 눈에는 미인들이 상당히 많다. 도시에서도 그렇고 산골 지방에서도 그렇고, 그다지 꾸미지 않았음에도 참 아름답다. 미소가 아름답기 때문일까. 아마도 몇년만 지나면 미얀마의 여인들이 세상에 미녀들로 알려지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근데 내가 너무 일찍 일어나서 이 사람들이 불편한건 아니겠지? 어제 봐도 그다지 신경 안쓰는듯 하더니 오늘도 차 주전자만 하나 주고 자기들끼리 할일을 한다. 괜한 챙김 보다 이런 자연스러운게 더 좋다. 여기 유일하게 있는 초등학교에서 영어, 한글, 수학, 과학 등을 가르치며 한 일년간 머물 수도 있겠다. 나쁘지는 않지만 과욕이겠지.
말 목에서 나는 종소리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도마 소리를 들으며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다. 정말 아무도 날 신경 안써서 좋다. 근심과 고민이 없어보이지만 이들도 분명 고민이 많겠지. 이번 차밭 농사가 잘 안됐다던가, 물이 부족하게 받아졌던가, 아니면 애들 교육 문제라든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너무 과하게 포장해서 생각하지는 말자. 안타까워 할 필요도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각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갈뿐.
시간이 아직 좀 일러서 좀 더 누워있을까 싶어 올라가본다. 근데 배에 신호가 살살 온다. 그래, 반항하지 말자. 자연에는 순응해야 하는 법이야. 난 할 수 있다.
일어나서 내려온다. 조조와 해태가 있길래, 배를 살살 만지면서 제스쳐를 하고 화장실로 간다. 그래, 군대에서 훨씬 더 안좋은 곳에서도 해결했는데 뭐. 사실 여기는 꽤나 깨끗하다. 이정도 쯤이야.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결하고 나온다. 뭐 별거 아니네. 손을 씻고 해맑은 표정으로 돌아온다. 역시 근심이 해결되야 하루가 편해진다. 아, 아름다운 세상이구먼.
앉아있는데 해태가 한글에 관심을 갖는다. 한글 가르쳐줄까, 라고 물으니 좋단다. 오케이, 팬과 종이를 가져오렴. 일단 한글의 알파벳을 다 적어주고 조합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가르치다보니 우리나라 말은 발음 한음절마다 한글자로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는게 어려운듯 하다. 특히 영어를 먼저 배운 애들은 발음을 영어로 적어주니 발음기호로 인식 못하고 영어 알파벳으로 인식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역시 30분 정도 가르치니 대충 글씨를 쓰기 시작한다. 가르치면서 느끼지만 발음 단위로 생각하는 개념만 파악하면 한글은 배우기 쉽다. 세종대왕님 만세. 근데 해태, 머리가 좋지는 않은거 같다... 다른 것 보다 못 알아들은게 뻔한데 왜 자꾸 알겠다고 하니. 공부하는데 매우 안좋은 버릇이란다.
그나저나 한국인 잘 오지도 않는데 배워서 뭐할려나. 그냥 차라리 중국어나 불어를 배우는게 도움이 될듯 한데. 여기에 한류가 전파되면서 사람들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하지만 한국인은 없으니 날 붙들고 자꾸 얘기를 할려고 한다.
그러고 있는데 드디어 아침이 준비 됐다고 먹으란다. 아, 오늘은 얼마나 걸을려나. 어제보다는 쉽다고 했으니 그래도 할만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밥을 또 언제 먹을지 모르기에 최대한 많이 먹어야 한다.
프랑스놈들 어제부터 조금 이상해졌다. 이제 그냥 대놓고 불어로만 얘기한다. 뭔가 마음에 안들었나? 내가 술을 덜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가이드들이 나랑 놀아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트래킹할때 현지인들과 어울리는게 얘네의 가장 큰 목표이기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이건 왕따 아니여. 대놓고 영어는 한마디도 안한다.
"그래서 그거 맛있어?"라고 한국말로 물어본다. "hmm, sorry?" 그래, 못 알아듣는게 당연하지. 영어로 얘기해준다. "아 한국말 하는 줄 알고. 너희도 나 불어 하는 줄 알고 이러는거지?"
라고 머리 속에서만 실컷 상상을 한다... 이런 말할 정도의 배짱은 없지만 상상할 배짱은 충분하다. 됐어, 내가 너희를 왕따 시키면 되지. 조조와 해태랑 같이 어울려서 논다. 그러면 4:3, 아직 숫자는 너희가 앞서지만 이정도면 할만하지. 치사한 놈들.
이래서 오래 같이 여행 다닌 사람들과 같이 끼면 안된다. 거기에 커플이 있으면 설상가상이다. 굳이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친하게 지낼 이유를 못 느끼기에, 어제는 그럭저럭 잘 어울릴려고 노력했지만 자기들 스타일이 아닌듯 하니 그냥 무시해버린다. 다수의 횡포다. 흠, 그러고보니 인도 여행 다닐때 홀로 꼈던 중국 여자애가 우리를 이렇게 여겼을까? 거기다가 나는 커플...? 아냐, 난 잘 챙겨줬던것 같다. 진짜다.
밥을 먹고 현지 대장에게 녹차를 사도 되냐고 묻는다. 어제 500키얏, 1000키얏으로 판매한다고 한걸 기억해서 기념품으로 좀 줄까 싶어서 500키얏짜리 4개를 달라고 한다. 알겠다더니 조금 기다리란다.
무슨 쌀 한자루를 가지고 왔다. 하, 이걸 어떻게 가져가라고. 많이 줬다고 생색을 내니 고맙다고 하긴 하는데, 이걸 들고 가는게 걱정이다. 일단 비닐 봉지를 달라고 하고 거기다가 담는다. 물도 하나 사서 담고, 카메라도 넣는다. 가는 길은 그래도 쉽다고 했으니 비닐 봉지 하나는 들고 갈 수 있을거라 믿는다.
어제 먹은 맥주와 기타 등등을 정산할 시간이다. 물어보니 녹차를 사서인지 5000키얏 정도 나왔다. 그런데 환전을 못해서 키얏이 부족하다. 달라도 될까? 물어보니 난색을 표한다. 하긴 여기서 달라를 어디다 쓰겠나. 조조한테 내려가서 준다고 대신 내주면 안되냐니까 그냥 환전을 해겠다고 한다. 10달라에 5000키얏 두장을 받는다. 어제 소액권은 970을 해줬으니 어찌 보면 나한테도 이득이다. 그냥 조용히 주는걸 받는다.
자, 이제 진짜 출발이다. 뭔가 조용히 정리를 하고 싶은데 프랑스놈들 때문도 그렇고 뭔가 정신 없이 출발을 하게 된다. 급하게 현지 분들하고 인사를 나눈다. 어제 하룻밤 재워준거에 대해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마음에 안든다. 이래서 혼자 다니는게 좋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못하는게 싫다.
다들 출발을 해서 인사를 후딱 끝내고 따라간다. 오늘은 그냥 쪼리를 신고 가기로 했다. 어제 운동화를 신어서 더 힘들었었던 것 같다. 운동화가 작은건지, 진짜 이대로 계속 걸으면 새끼 발톱이 빠질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신 반창고를 단단히 붙이고 쪼리를 발가락으로 움켜지고 길을 나선다.
조금 걸어가고 뒤돌아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오면서 보니 다른 여행자들이 방문하고 있다. 이곳은 나한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솔직히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달라서 어찌 보면 실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이 사람들이 문제였다기 보다 내 행동의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관광지라면 이들이 나에게 다가오겠지만 이런 그냥 마을이라면 내가 먼저 다가가야했다. 기억에도 그다지 남지 않을 프랑스놈들과 어울리는게 아니라 차라리 무리를 멋어나더라도 홀로 밖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용기가 부족했던거지 뭐. 그래도 이곳, 따라다니며 계속 "헬로", "바이바이"를 외치던 꼬마들은 기억에 꽤나 오래 남을것 같다.
돌아가는 길은 나름 편안한 길로 시작한다. 약간의 내리막이며 숲이라서 그늘도 중간 중간 많이 있다. 봉투를 들고 가는게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이긴 한다. 중간에 쉬는 곳에서 얘를 어떻게든 가방에 묶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조금 가다가 맨 앞에서 길을 리드하는 조조가 갑자기 멈추고 돌맹이를 줏어서 앞으로 던진다. 뭐지?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앞 그룹에 있어서 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에 자세히 보니 작은 뱀이 하나 있다. 근데 혼자 있는게 아니라 쥐를 몸으로 감싸서 죽인듯 싶다. 오, 목격하기 힘든 자연의 모습이다. 근데 이 동네에는 쥐가 많나? 어제는 고양이가 한마리 물고 오더니 여기서는 뱀이 먹이로 삼는다. 그냥 동네북이 아닌 동네쥐구먼.
우리가 다가가니 뱀이 쥐를 버리고 줄행랑을 친다. 이런 깡다구 없는 놈, 그래서 먹고 살겠냐. 사실 뭔가 미안하다. 개도 먹을때는 안건드린다는데, 얘는 지가 사냥한 애도 못 먹게 했으니 어찌 안 미안할 수가 있나. 우리 지나가면 다시 와서 먹을려나?
쉬는 타임. 가방 위에 녹차 덩어리를 넣고 그 위에 물통을 끼워본다. 어디서 이러고 다니는 사람들 꽤 본 것 같은데, 이러면 버티겠지?
조금 쉬다 다시 출발한다. 아직까지는 상황이 훌륭하다. 쫄이도 은근 괜찮고, 발바닥도 아직까지는 괜찮다. 왠지 이번 귀가 트래킹은 수월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해본다.
조금 걸어가는데 물통이 빠져서 떨어진다. 조금 약하게 묶었나? 어서 줏어서 다시 넣고 꽉 조인다. 이게 혼자 가는게 아니다보니 조금만 주춤거려도 뒤로 쳐진다. 정비를 후딱 하고 어서 뒤따라간다. 어쩌다보니 또 다시 맨 뒤에서 가게 되었다.
얼마 안 걸어 갔는데 또 떨어진다. 줏어서 넣지만 곧 다시 떨어진다. 아 이거 안될듯 싶다. 앞팀하고 거리도 좀 늦어지길래 그냥 손에 들고 걸어간다. 왼손에 물, 오른손에 카메라를 들고 갈려니 영 힘들다.
설상가상으로 왼쪽 발가락에 반창고도 떨어진다. 아 거기 떨어지면 안되는데. 항상 상처가 나는 곳이라 불안하다. 하지만 다행히 첫번째 목적지인 작은 폭포에 도착한다.
조조야, 이게 무슨 폭포냐, 그냥 개울이지. 그래도 쉴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할게 많다. 자리를 잡고 어서 정비를 시작한다. 안에서 반창고를 찾을 자신은 너무 없어서 오른쪽 새끼발가락에 붙여놓은 반창고를 떼서 왼쪽에 떨어진 곳에 붙여본다. 바보야, 이게 붙을리가 있냐. 어쩌지 싶다고 또 금방 출발할듯 해서 그냥 내비둔다. 찢어지라고 그래. 어차피 오늘 그리 안 힘들다고 했으니 괜찮을듯 싶다. 게다가 지금은 이상하게 그다지 아프지 않다.
이번에는 물을 처리해야 한다. 다들 물을 첨벙 거리며 신나게 놀고 있는데 나만 가방 정리를 한다. 아 무식하게 이거 뭐 이리 가져온걸까. 패딩 잠바야 이해라도 되는데, 우비, 여벌 옷, 수영복, 방수팩까지 그냥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거기에 녹차까지 사서 끼얹으니 무슨 가방이 산더미만하다. 대략 4키로는 될듯 하다. 항상 인생의 무게 드립 치더니 결국 이리 바보 같은 행동을 했다. 저 중에 이번 트래킹에서 꺼낸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아까 물이 떨어진게 밑에 넣어서 그런듯 해서 이번에는 위쪽으로 넣는다. 가방 입구가 조금 더 넓게 펼쳐져 있으니 좀 더 버티겠지. 그러고 있으니 또 출발이다. 그래, 일어나서 또 한번 걸어보자.
폭포로 코스프레하고 있는 개울을 지나서 2분 걸어가자마자 또 물은 떨어진다. 에혀, 그냥 손에 들자. 포기하고 손에 들고 간다. 피로가 두배, 짜증이 두배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갑자기 언덕이 나타난다. 조조, 이건 말과 다르잖아. 언덕이 장난아니다. 엊그제 보트투어, 어제 여기까지 오는 길까지 해서 더 이상 올라갈 힘이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냥 고민도 안하고 뒤로 쳐진다. 그래도 해태가 자기 한글 스승이라 그런지 나를 챙겨주며 뒤에서 같이 올라와준다. 아 이거 근데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못 올라가! 라고 소리를 지를 즈음에 조조가 휴식을 선언한다. 아 다행이다. 진짜 한발짝도 더 못 올라갈거라고 생각했었다. 언덕에 다행히 그늘이 있어서 앉을 수가 있다. 가방이고 뭐고 그냥 집어 던지고 바닥에 쓰러지듯이 주저앉는다.
이제 언덕은 3분만 올라가면 된단다. 진짜지? 아 나는 이 와중에도 가방정리를 다시 하고 있다. 물을 손에 들고 가니 뭔가 더 힘들다. 이 녹차, 내가 아무한테 주나 봐라. 정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리스트 쭉 뽑아서 탑텐한테만 작은 병에 담아서 줄거다. 이거 그냥 녹차 아니다. 미얀마 오지에서 내가 정말 피와 땀을 흘리며 가져온거다. 이번에는 물통을 가방 안에 쑤셔넣어본다. 꾸역꾸역 넣으니 들어간다. 그 위에 녹차를 올린다. 혹시 안에 내용물이 안떨어질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안정적이다. 그래 이대로 조금만 버텨줘. 나도 좀 살자. 가장 체력이 약한데 가방까지 이러면 어쩌라는거야.
역시 가방을 정리하고 있으니 다시 출발. 이래서 처음에 준비를 잘해야 하는데,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난 군대 헛갔다왔다. 행군할때 항상 처음에 짐을 잘 싸는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던것 같은데 10년 이상 지난 지금 그 깨달음을 여기서 다시 얻어간다.
언덕은 마지막 남은 숨을 털어넣고 나니 그래도 다행히 끝이 난다. 이제 좀 쉬워질려나? 쉬워지기는 개뿔. 아니 도데체 왜 오늘 일정은 쉽다는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한걸까.
네버앤딩 땡볕행군이 시작된다. 이건 뭐 쉴 곳도 없다. 미얀마에 지금 추수기가 지나서인지 모든 밭을 다 태워버렸다. 그런 나무 하나 없는 밭을 내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의 짐을 메고 지나간다. 태양은 하늘 위에, 그리고 가끔 불이 안꺼져서 남은 불도 땅에. 아래 위로 그냥 뜨거움이 쌍으로 나를 괴롭힌다.
이거 얼마나 갈까? 여기서는 무슨 철학적인 사고 이딴거 절대 못하겠다. 그냥 한발 한발 앞으로 갈 뿐이다. 그래도 걷는 방식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내가 걸을때 바깥쪽을 먼저 땅에 대다보니 바깥쪽 발가락들이 짓물리는 경향이 있었나보다. 갑자기 쌩뚱맞은 깨달음이 와서 안쪽으로 의식하고 발을 디디니,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왼쪽 3번째 발가락과, 오른쪽 새끼 발가락의 통증이 훨씬 완환된다. 이거, 신발이 문제가 아니라 내 팔자걸음이 문제였나?
한발 한발 집중하며 걸어가니 그래도 시간은 빨리 간다. 여긴 주변을 즐기는게 아니라 무슨 견디는 체험이다. 극기훈련이냐. 도데체 내가 이걸 왜 내 피 같은 돈을 주고 하고 있는걸까. 도데체 왜.
처음에는 내가 중간쯤 가고 있었다. 나름 쳐질걸 내가 알기에 미리 행동하는 영특함이었다. 지금은 맨 뒤다. 충실한 제자인 해태만이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충실한 제자에게 물어본다.
"제자야, 지금 우리가 이 땡볕에 1시간 넘게 걸은거 같다. 도데체 얼마나 더 가야 우리에게 휴식이 있는거냐."
"스승님, 1시반 반은 더 가야 하옵니다."
후... 해태 말로는 앞으로 1시간반은 최소한 더 가야 그늘이 나온단다. 여기는 쉴 곳도 없다. 그늘이 있어야 쉬지. 너 햇볕, 나 이거 돈 내고 걷는 호구야. 그냥 내리 걷는거다. 역시 비수기는 비수기인 이유가 있는거다.
제자야, 그래도 정신을 좀 돌려보자구나. 해태가 뒤에서 묵묵하게 따라오길래 나를 따라해보라고 한다. "가나다라마바사". 좀 쌩뚱맞지만 잘 따라한다. 역시 앞부분은 쉽다. 10번 정도 반복한다.
자, 다음 구절로 넘어가자. "아자차카타파하." 역시 못 따라한다. 괜찮아 어려운거야. 나도 아침에 한번 해보고 깨달았어. 다시 참을성을 가지고 한다. "아자차카타파하."
5번이 넘어가니 슬슬 짜증이 난다. 어려운건 알겠는데, 그래도 내가 천천히 해주고 있지 않니. 내 짜증을 느낀걸까? 드디어 성공한다.
둘이 내가 만든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하" 노래를 부르며 간다. 즉흥적으로 만든거라 이건 분명히 기억 못할거다. 물어보지 말아라.
진짜 1시간반 이상을 간다. 땡볕에서 3시간 이상을 간거 같다. 저 멀리서 쉬고 있는 인원들이 보인다. 나랑 해태가 너무 쳐졌기에 이들은 거의 20분 이상을 쉬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걷는 방식에서 획기적인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해도 일시적이다. 안쪽을 집중적으로 짚으니 이제는 안쪽에 물집이 잡히는듯 하다. 군대 이후 잡혀 본적 없는데.
도착하니, 자 이제 가자, 란다. 그래그래, 농담인건 아는데, 지금은 재미 없거든. 5분만 쉬자고 그래도 대꾸를 해주고 쓰러진다. 그래도 코코와 니코 이 두 친구는 나름 챙겨주려는 노력이 보인다. 유은과 그 모델 여친이 문제다. 이놈들은 나를 무슨 투명인간 취급한다.
또 다시 출발한다. 그래도 여기서는 이제 얼마 안남았단다. 30분 정도? 그래 힘을 내자. 이게 행군할때와 마찬가지로 한번 쉴때마다 다시 일어나면 더 힘들다. 오히려 아픈 곳을 지긋이 꿈 참고 계속 밟아줘야 덜 아프다.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진짜 30분이겠지? 일단 마을 하나에 도착한다. 이 마을이 마지막 마을이란다. 물이라도 채워야 할듯 해서 그 곳에 들린다. 여기 물이라도 수급이 안되면 진짜 걷기 힘들겠다. 다행히 중간 중간에 물 채우는 곳이 있다.
근데 항상 궁금했던건데, 연료를 짐으로 싣고 걸어가는게 과연 효율적인건가? 연료를 넣은 만큼 연료를 더 먹을텐데, 이게 그 실은 연료보다는 덜한거겠지? 물을 마시면서도 그 생각이 든다. 이 물을 힘들게 들고 오느라 더 힘들었던거를 생각하면 그냥 안 들고 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뭐 자세히 생각은 안해봤지만 상식적으로 아닐거라는 생각은 든다.
어느 곳에서든 멈추면 차를 준다. 그냥 뭔가 대접을 하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의 마음이다. 차를 마시고 있는데, 사람들이 담배를 피니까 슈퍼 아주머니가 물 담배를 준다.
유은이 마리화나를 물어본다. 아 그놈의 마약, 그만 좀 하지. 그래, 장기 여행자로서 이해는 하는데, 그냥 내가 꼴보기 싫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걸까.
다시 출발한다. 이번에는 조조가 거짓말을 안했다. 최종 목적지인 폭포에 드디어 도착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름 제대로 된 폭포다. 지금 시각이 2시반, 8시에 출발했으니 6시간 반을 걸은 셈이다. 어제도 그 정도 걸었다. 무슨 오늘이 쉽긴 뭐가 더 쉬워. 이마를 만져보니 따갑다. 목 뒤도 따끔따끔하다. 그 뜨거운 햇볕을 그늘 없이 서너시간을 직접 받아들였으니 당연하다. 이건 약간 화상의 정도이다.
폭포를 보고 다들 뛰어 올라간다. 나도 올라가본다. 확실히 물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앉아만 있어도 바람이 시원하다. 니코가 먼저 폭포에 옷을 다 입은채로 뛰어든다. 유은과 코코는 옷을 벗고 뛰어든다. 이놈들은 그냥 언제나 훌러덩이구나. 걸어오면서 얘네와 벽이 더 커져서인지 그다지 어울리고 싶지는 않다. 모델 언니는 밑에서 그냥 발만 씻고 있다. 나도 그 근처에서 얼굴을 씻고, 그래도 머리를 갖다대고 감아준다. 짧은 머리의 장점이지.
그래도 가장 착한 니코가 같이 들어오라고 권유한다. 그냥 뭔가 싫다. 바람이 시원해서 충분하고, 옷이 젖으면 마지막 걸을때 몸이 무거워서 불편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만약 지난번 보트투어 일행이었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들어갔을거다. 그냥 지금은 어여 이 트래킹을 끝내고 싶다.
폭포에서 한 30분을 보낸다. 이제 시간도 3시라 배도 고프다. 다른 곳은 관광객을 배려해서 이런 스케쥴이면 중간에 점심도 주고 할법한데 미얀마는 그런거 없다. 확실히 관광지로서 발전은 아직 더디다. 그게 매력이지만.
다들 내려오고 마지막 길을 나선다. 물어보니 여기서 15분 정도 걸어가고 그곳에서부터는 뚝뚝을 타고 간단다. 오 좋은데? 마지막 힘을 내서 가본다.
언제나 마지막 한 걸음이 힘들다. 15분이 맞긴 한데, 발바닥도 불이 나고, 얼굴도 화끈화끈거리니 영 힘들다. 진짜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도착한다.
최종 목적지에는 또 슈퍼가 하나 있다. 이곳들 은근히 수익이 꽤 될거 같다. 어찌 보면 미얀마에서 가장 돈을 많이 쓰는게 물인거 같기도 하다. 근데 여기 슈퍼는 참치냉장고 같이 생긴 애가 있다. 미얀마에서 단 한번도 진짜 차가운 음료를 먹어본적이 없기에 혹한다. 원래는 식사를 하면서 물을 마실려고 했는데 결국 유혹을 몇견디고 400키얏짜리 오렌즈 탄산음료를 구매한다.
야, 살얼음이 있다. 이런게 미얀마에도 있긴 있구나. 목이 아파서 한번에 못 먹을 정도다. 두세번에 나눠서 먹고 있으니 뚝뚝이 온다. 앞에는 그 여사장님의 남편이 타고 있다.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그 무뚝뚝한 사람도 여러번 마주치면 어쩔 수 없는게 사람의 인연인가보다.
오면서 해태한테 들었는데 그 곳의 이름은 '보보네' 사장님 이름은 '마보사'이며, 해태의 큰 이모라고 한다. 조조는 가족은 아니란다. 어찌 보면 내 시포에서의 경험에 가장 중요한 곳이었는데 이제 이름을 처음 알았다.
뚝뚝을 타고 한 15분 가니 보보네 식당에 도착한다. 다들 내려서 식당으로 들어간다. 아 너무 배고프다. 나는 밥을 먹어야겠다. 근데 얘네랑 굳이 같이 먹고 싶지는 않다.
나야 이곳에 애정이 많지만 얘네가 여기서 먹을까? 다른 곳에 먹어라, 다른 곳에 가서 먹어라, 주문을 건다. 눈치 없는 종업원, 5명 테이블을 만든다. 눈치 없는게 아니라 영업이겠지? 그 짦은 순간에 유은과 여자친구는 이미 내가 앉을 수 없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 뭔가 짜증난다. 나도 너 싫거든. 그래도 니코와 코코는 당연하게 내 옆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유은을 보면서 불어로 뭐라 하는데, 내 짧은 불어로 이쪽으로 와서 앉으라는 얘기로 들린다. 아 이 시츄에이션은 뭐지?
유은과 여친이 결국 합석해서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 뭐하냐, 지네끼리 불어로 계속 얘기하는데. 나도 그냥 신경 끄고 여기 여사장님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해태와 조조와 인사를 나눈다. 걔네 이제 떠난다길래 페이스북 추가도 한다. 나한테만 물어본다.
나는 마보사한테 저번에 먹었던 샨누들을 시킨다. 니코와 코코는 배가 그다지 안고프다고 안시키고(어떻게 안 고플수가 있지?) 유은과 여친은 치킨 하나를 시키고 밥을 두개 시킨다. 그래 장기여행자면 돈이 없지. 이건 이해한다.
코코와 니코는 밥을 안시켰으니 음료만 마시고 자리를 떠난다. 어차피 같은 숙소라 봐서 아침 먹으면서 보자고 인사하길래 받아준다. 얘네한테도 사실 좋은 감정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고 그런 느낌이다.
둘이 떠나니, 진짜 이 커플은 나를 또 다시 투명인간 취급한다. 나도 뭐, 음식이 나왔길래 혼자 맛있게 먹는다. 아 진짜 같이 어울리기도 싫은 종자들하고 이렇게 있는거 자체가 짜증난다.
아 근데 밥은 너무 맛있다. 그냥 국물까지 후루룩 흡입한다. 어떻게 맛이 없을 수가 있나, 그렇게 운동을 하고, 점심을 오후 3시반에 먹는데. 오늘은 환전을 해야만 한다. 저번에 5시반에 가서 문을 닫았었기에 조금 의식해서 빨리 먹는다.
밥을 싹 다 비우고, 마보사한테 여기 가방을 맡기고 은행 좀 갔다오겠다고 한다. 이 가방 워낙 무거워서 어깨가 아려온다. 마보사야 당연히 그러라고 봐주겠다고 하고 자기 옆에 놔둔다. 그래도 나는 예의를 지켜야겠기에 유은과 여친한테 대충 인사하고 나온다.
3시 50분, 혹시나 싶어서 서둘러서 걸어간다. 아 원래 이리 멀었나. 발바닥이 불타오르고 얼굴이 따가워서 그늘로 피하며 도착한다. 온 몸에 먼지가 자욱한데도 은행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게 맞이해준다.
근데, 문을 닫았단다. 하, 도데체 언제 닫는거야. 물어보니 2시반이란다. 어쩌지? 이제 돈이 거의 없는데. 그래도 오늘 조조가 환전해준 덕에 6000키얏 정도는 남아있다. 뭐 어쩔 수 없지.
가방을 찾으러 보보네로 돌아가니 유은 커플이 나오는게 보인다. 아직 있엇으면 숙소로 다시 돌아가야 했는데 다행이다. 보보네에서 가방을 찾고 나도 이제 레드드래곤으로 향한다.
천천히 걸어갔는데도 둘이서 아직 수속 중이다. 잠시 무시하고 리셉션에 앉아서 에어컨으로 땀을 식힌다. 이 둘도 팬방에 있더니 오늘은 에어컨 방으로 가나보다. 하긴 오늘은 어쩔 수 없겠지. 팬, 에어컨이 문제가 아니라 빨래를 할려면 방에 화장실이 있어야만 할거다.
둘이 올라가고 프론트의 매니저한테 간다. 오늘은 3일째, 더 할인 받아야겠다. 원래 비시즌 가격이 10달라에 에어컨 3달라인데, 지난번에 1달라 할인을 받았다. 나 오늘 3일째야, 라며 그래도 할인을 좀 더 해줘야 하지 않겠어? 강요하는 눈빛이 아니라 웃으며 눈을 마주본다. "모레"라고 외치니 빵 터진다. '모레'는 이번에 배운 피곤하다는 미얀마어이다. 네고에서 웃으면 분위기는 넘어온거다. 결국 1달라를 더 깍아주면서 절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난 얘기한게 아니라 쓴거니까 괜찮겠지. 갑자기 유은 커플이 얼마에 묵었을지 궁금해진다.
가방을 찾으러 간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라데'를 외친다. 역시 이번에 배운 '이쁘다'는 뜻이다. 그냥 이런 간단한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은 경계가 풀린다. 작업도 아니고 그냥 친근함을 표시하는 나의 방법이다.
숙소에 올라가니 에어컨이 켜져있다. 잠시 의자에 앉는다. 온몸으로 전달되는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아 이번 트래킹 꽤나, 아니 많이 힘들었다. 내가 몸이 안좋은건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다시는 못하겠다. 원래 Kalaw에서 인레호수로의 트래킹도 고려했었는데 무조건 걔는 아웃이다.
너무 몸이 더러워서 침대에 누울 수도 없다. 바로 옷을 다 화장실로 쳐박는다. 티셔츠는 이틀을 씻지도 않고 입었더니 땀으로 인하여 자연스러운 프린팅이 되어 있다. 가방 안에 있던 쓰지도 않은 곳들도 모두 집어넣는다. 가방도 집어넣는다. 가방이 아마 가장 더러울거다. 일단 샤워기를 틀고 대충 먼지를 벗어내며 빨래를 할만한 통을 찾는다.
유일한 통이 변기 옆에 휴지를 버리는 통이다. 딱 1분 고민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법이다. 그 안에 있는 검을 봉지를 빼고, 그래도 양심상 물로 한번 행군다. 바간에서 사온 새제를 풀고 물을 채운다. 그리고 빨래를 모두 쳐박는다. 넣자마자 물이 갈색이 된다.
한번 행구고 다시 새제를 푼다. 그리고 목욕을 시작한다. 오늘은 날림으로 목욕하면 안되는 날이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때수건을 가지고 와서 비누를 묻히고 온몸을 닦는다. 하도 더러워서 거품이 안난다. 이틀을 안씻고 이리 돌아다녔으니 당연하다.
하, 때수건이 까매진다. 내 생전 처음 보는 현상이다. 이거 때수건도 빨래에 같이 넣고 세제로 빨아야 할려나? 몸을 단한번 닦았을 뿐인데 이게 무슨 일이다냐. 내 생전 처음으로 비누로 때수건을 빤다. 그리고 비누를 묻혀서 다시 몸을 닦는다. 또 까매진다. 도데체 몸이 얼마나 더러운거야.
대충 그래도 인간다워졌다고 생각이 들을 즈음, 변기 쓰레기통에 쑤셔놓은 빨래감들을 무자비하게 밟는다. 사실 발이 엄청 더럽긴 한데, 얘네도 만만치 않아서 큰 상관은 없을듯 하다. 무슨 구정물이 나온다. 물을 바꿔 담고 다시 밟는다. 또 구정물이다. 이 구정물은 내 발에서 나오는걸까 빨래에서 나오는걸까?
그래도 지도 양심은 있는데 10번 정도 하니 물이 그나마 조금 맑아진다. 위에는 샤워를 틀어놓고, 밑에 수도에서 물을 받으며 발로 빨래를 밟고 있자니 내가 목욕을 하는건지 빨래를 하는건지 도통 알수가 없다. 하지만 몸도 아직 깨끗해질려면 멀었기에 물을 계속 틀어놓고 몸을 물에 맡긴 상태로 빨래는 꾸준히 발로 퍽퍽 밟아준다.
이제 이정도면 된듯 하다. 그래도 이 힘이 남아 있어서 천망다행이다. 물이 조금 그나마 회색을 띄길래 발로 그만 밟고 손으로 쳐댄다. 그리고 하나씩 꺼내서 행군다.
동남아에는 화장실 마다 변기 옆에 수압이 엄청 센 수도가 하나 있다. 이게 아마 큰일을 본 다음에 뒷처리를 하라고 있는거 같은데, 도통 이해가 안된다. 수압이 정말 어마어마해서 이걸 한번 틀면 엉덩이를 씻는게 아니라 화장실 사방에 뿌려지게 된다. 뒷처리 하다가 앞처리를 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게 빨래 행굴때는 딱이다. 어떻게 보면 더럽다 느낄지 모르지만 물은 물이다. 하수도 물을 쓰는 것도 아니고 그게 그거다. 이걸 빨래에 대고 뿌리면 빨래 방망이로 치는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의도로 만들었건 그 물건의 가치는 소비자가 정하는 것, 나에게 변기 옆의 이것은 성능 좋은 빨래 방망이다.
하나하나 행구고 온힘을 다 해서 짠다. 물론 아직도 샤워기는 몸을 행구고 있다. 물이 안묻게 최대한 짠 후에 변기 뚜겅을 닫은 그 위에 올리려고 했더니... 아까 씻으면서 잠깐 앉은 곳이 구정물이 고여있다. 하, 정말 답이 없구나. 수압센 빨래 방망이로 거기를 한번 스윽 청소하고 짠 빨래를 얹는다. 이제 스펙타클한 빨래 및 목욕에 끝이 보인다.
몸은 한번 더 비누칠을 한다. 이정도로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어쩔 수 없다. 3번 씻었으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때수건도 따로 벅벅 씻어준다.
옷을 입고 빨래를 방에 널어놓는다. 내일 오전에 이곳을 떠날지도 모르는데 가방 때문에 못 떠나는 상황도 생길 수 있겠다. 그래도 에어컨을 틀어놨으니 좀 빨리 마르지 않을까? 반대인가?
아 이마가 따끔따끔하다. 잠깐 거울을 보고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낸다. 저 시꺼머스는 누구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심하다. 특히 옷에 가려졌던 부분하고의 경계를 보니 오늘 얼마나 탄건지 느낌이 온다.
일단 외모적인걸 떠나서 이거 아파서 안되겠다. 내가 이마가 톡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이마에 모든 햇빛이 집중됐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히 서울에서 가져온 화상약이 있기에 이마 주변에 듬뿍 발라준다. 이 짧은 머리라도 두피쪽은 보호해줬는지 그쪽은 그래도 괜찮다. 목 뒤쪽도 통증이 있어서 골고루 발라준다.
그러고 나니 5시가 넘었다. 한시간 이상을 빨래, 목욕과 전쟁을 한 셈이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괜찮다. 오늘은 방에서 좀 쉬면서 8시쯤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했기에 침대에 누워서 드디어 핸드폰을 손에 쥐어본다.
어제 글은 다 써놨기에 후딱 올리고 노여사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라오스로 가는 표를 아직 예약 못했단다. 뭐, 괜찮다. 노여사도 보고 싶고, 우리 냐옹이들도 보고 싶었기에 그냥 서울로 가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예매를 한단다. 뭐 이것도 괜찮다.
이리저리 하더니 라오스는 안되고 베트남으로 밖에 안된다고 한다. 뭐 역시나 그것도 괜찮다. 라오스를 가고 싶으면 버스 타고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결제하는데 회사라 그런지 안된단다. 흠 어쩔 수 없지. 그냥 내일 해주고 안되면 말라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주는게 어디냐. 노트4에 카드 정보를 다 넣어놨기에 잃어버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모두 정지를 시켜놨다. 그래서 이런 결제가 필요한 부분은 노여사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혹시 몰라서 하노이, 라오스 정보를 조금 보다 보니 8시다. 사실 내일 어딜 갈지도 안정했는데 지금 15일 후가 문제가 아니다. 일단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키보드, 핸드폰, 카메라, 지갑을 들고 나선다. 가방을 빨았기에 이렇게 따로 들고 갈 수 밖에 없다.
오늘 저녁은 역시나 저번에 갔던 그 생맥주 집으로 가려고 한다. 그래도 이틀 고생했으니 이정도는 나에게 보상해줘야겠다. 오늘의 글을 중간 중간 썼지만 생맥주 한잔 시키고 한모금씩 마셔가며 글을 마무리 하는 것이 나에게 이번 여행에서의 즐거움이다. 가는 길에 보보네를 슬쩍 보니 조조가 나와서 일을 하고 있다. 아는 척을 할까, 싶다가 그냥 내일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지나간다.
꽤 멀지만 천천히 간다. 아직 발가락과 발바닥이 멀쩡하지 않기에 무리해서는 안된다. 멀리서 보이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속도를 좀 낸다.
내 단골집, 내 시포에서의 하루를 정리하는 그 집, 바깥에 이번에 같이 트래킹을 했던 네명의 프랑스인이 앉아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이곳을 와야만 했었니. 아 진짜 꼴보고 싫은데. 일단 그래도 그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슬쩍 인사를 한다. 코코가 날 보더니 잠시 합류하라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다가 내가 그냥 안으로 스윽 들어가니 넘어간다. 코코, 니코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오늘 저녁을 쟤네 때문에 망칠 생각은 추호만큼도 없다. 지금부터 두세시간은 나만의 시간이다.
들어가자마자 웨이터가 날 보더니 매우 반가워한다. 하긴 그리 마셔됐으니 반가울 수 밖에 없다. 날 보더니 일단 생맥주 한잔부터 주문할거지, 라고 해서 내 마음을 어떻게 읽었냐고 한다.
지난번에 52잔을 먹었단다. 4명이니, 13잔씩이다. 하나가 350미리니까, 인당 4.5리터를 먹은거다. 아 미쳤지. 다음날 숙취가 그정도였던게 다행이다. 근데 내가 마지막까지 똑같이 마셨던가? 뭐 기억이 나야지.
저번에 고기가 꽤나 맛있었어서 그걸 주문한다. 4500키얏, 꽤나 비싼 가격인데 오늘은 그래도 좀 맛있는걸 먹고 싶다. 혼자서 맥주를 마시면서 키보드를 핀다.
음식이 나온다. 음식을 두고, 맥주를 두고, 키보드를 두고, 그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의 시간을 가지니 여기가 천국이로세. 혼자 여행을 다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거기서 또 즐거움과 피곤함이 온다. 이번 이틀은 피곤함이 강했기에 지금의 이 순간이 너무 좋다. 맥주 한 모금 마시고, 안주 하나 먹고, 글을 한 문단씩 쓴다. 밖에 프랑스인들이 있지만 신경도 안쓰인다. 같이 있을때는 어쩔 수 없지만, 내 소중한 여행을 남들로 인해 방해받지는 않을테다.
여기에는 슬픈 눈을 한 고양이가 한마리 있다. 밥을 먹고 있으면 바로 옆으로 와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야옹 야옹"을 한다. 밥달라 이거지. 오늘도 어김없이 내 옆에 와있다. 나한테 고양이 냄새가 나나? 유독 고양이들이 가까이 온다. 오늘은 나도 배고픈데... 그래도 살점 하나 뚝 떼서 준다. 저 눈을 보면 누구도 안 줄수가 없을거다.
맥주를 다 먹어서 두잔째를 시킨다. 오늘은 딱 3잔까지 먹을 생각이다. 그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면서 나보고 언제까지 있을거냐고 꽤 오래 있는다고 말을 건다. 그래서 아마 내일 하루 더 있지 싶다고 한다. 사실 아직 모른다. 웨이터가 갑자기 미얀마에서 여자친구는 없냐고 묻는다. 아 난 한국에 이쁜 여친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국 말고 미얀마에는 여친이 없냐고 물어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말을 잘못 했나 싶어서 항상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하는 노여사 사진을 보여준다. 이쁘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나보고 "네 여자친구 맛은 봤어?"라고 물어본다. 순간 내 귀를 의심한다. 뭐지?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으니 아예 대놓고 성적으로 얘기를 한다.
하, 네가 뭔데 내 소중한 여자친구한테 성적인 농담을 하는건데. 순간 이건 뭐야 싶어서 빤히 쳐다보니 내가 못 알아들은지 알고 다시 얘기할려고 한다. 얘기하기도 짜증나서 손으로 저리 가라고 손짓한다. 오늘 내 여행 방해하는 사람 엄청 많다. 그냥 좀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은 것 뿐인데 뭔 이리 짜증나는 놈들이 많다냐.
내가 정색하니까 "아, 이런 얘기 싫어해"하면서 알겠다고 하고 떠난다.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자기 여자친구를 대상으로 그런 얘기를 좋아할까. 쟤도 이런 농담이 먹힌적이 있으니 얘기를 하는거겠지. 세상에는 참 미친놈들이 많다. 어쨌든 오늘로서 이곳은 끝이다. 여기에 대해 좋았던 기억이 순식간에 와장창 무너진다.
그래도 역시 내 저녁을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 맥주를 하나 더 시켜서 난 그냥 내 여행을 한다. 웨이터하고는 눈도 안마주친다. 눈치가 있다면 알겠지.
고양이는 계속 옆에 있는다. 야 너 많이 먹었잖아. 그래도 너 때문에 여기 자리가 기분 나쁘지는 않으니 고맙다. 생선을 다 먹고 남은 머리를 통채로 던져준다. 이놈, 머리 찔끔찔끔 먹더니 날 바라본다. 내가 다 먹은걸 알았는지 다른 곳으로 떠나간다. 이놈 똑똑하네. 다 먹은줄 어찌 알았지.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하기에 계산하고 나온다. 6100키얏이 나왔는데 다행히 남은 키얏이 6200키얏이다. 다 주고 그냥 잔돈도 안받고 나와버린다. 나오니 프랑스인들은 다 떠났다. 아 그 좋았던 기억이 이리 한순간에 안좋아질 수가 있을까.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 보보네 보니 여사장님이 분주히 일하고 계신다. 여행이든 기억이든, 그 좋고 나쁨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물이 아닌 인간이다. 아무리 훌륭한 관광지를 가도 사람들이 자기와 안맞으면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도, 사람들이 좋으면 그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여행지가 된다. 시포에서는 참 양쪽의 기억들이 공존한다. 보보네 식구들과 보트트립 맴버들이 줬던 좋은 기억을 트래킹과 오늘의 술자리에서 상쇄시킨다. 하지만, 난 좋은 기억만 가져갈련다. 그게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다.
방에 오니, 노여사한테 카톡이 와있다. 이시간에 또 베트남 비행기표 예매를 해보았는데 안됐단다. 아니 지금 시간이면 한국시간 12시일텐데, 아까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와서 그냥 자지 뭘 또 이런데. 보트트림의 맴버들도 메일이 와있다. 영국인 유안은 방콕에 조만간 가니 시간되면 보자고 하고 프랑스인 요한은 지금 인레에 와있는데 너무 좋다며, 혹시 프랑스인 만나면 대작하지 말라고 짧은 영어로 농담이 쓰여있다. 뭔가 마음이 편안해진다. 어차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와 안맞는 사람들한테 연연하면서 우울하게 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짧은 인생, 자기와 맞는 사람을 찾고 같이 시간을 보내기에도 빠듯하다. 짧은 인연이든 오랫동안 함께하는 인연이든, 이러한 좋은 인연들이 행복을 전달해주는 묘약의 재료가 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