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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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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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하와 스리랑카 건국 전설>

닉뽀안은 독실한 불교 국가인 스리랑카의 건국 전설을 중심으로 설계된 듯하다. 특이하게 주출입구는 북쪽 방향으로 이것은 스리랑카에서 보면 인도 대륙쪽을 의미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무역상인인 심할라(Simhala))는 인도의 남쪽항을 출발, 바다로 나갔다가 심한 폭풍우가 일어 항로를 이탈한다. 상선의 우두머리인 그는 항로를 결정해야했고 풍랑 이는 어둔 바다에서 남동쪽으로 진로를 잡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바다의 괴물이 그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집채만한 파도가 집어삼켜 배는 난파되고 심할라 일행은 괴물의 먹이가 되기에 이른다. 위기에 처한 그들은 관음보살께 간절히 빌었고 이를 딱하게 여긴 관음보살이 말(발라하)로 현신하여 그들을 구해 육지에 다달으니 그곳이 바로 현재의 스리랑카이다. 심할라는 그 땅에 나라를 세워 왕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이 바로 스리랑카의 옛 국호이다. 이후 발라하는 항해자의 수호신으로 숭배되고 스리랑카는 지금도 독실한 불교국가로 이어온다. 말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되어 프랑스 고고학팀(EFEO)에 의해 1920년에 복구되었는데 일부는 손실되었으나 남은 부위만 해도 전설의 내용을 읽기 충분하다. 식인괴물과 풍랑에서 벗어나려는 심할라와 선원들이 온힘을 다해 말 뒤편에 매달린 형상, 그리고 발라하가 거친 바다를 헤엄쳐 아름다운 스리랑카 섬에 막 첫발을 디디려는 찰라의 모습이.......... .

4. 사당(Chambers) : 연못을 에워 싼 70 m짜리 계단 각 방향 아래에는 4개의 작은 동굴 사당이 마련되어 순례자를 맞는다. 우주의 중심인 아나바타프타 호수 (중앙연못)에서 시작되어 인간세상에 흘러내려온 4개의 큰강(大江, 4개의 사당과 연결된 작은 연못)을 상징하는 사당과 중앙연못 사이에는 수로가 연결되어 그 물길로 순례자들이 속세의 죄 사함을 받는 세례터이다. 습기 때문에 약간 퀘퀘한 냄새와 검은 때가 끼어 있는 사당의 벽면은 연꽃 부조로 장식되고 각 사당의 물길은 인간두상(동), 말(서), 사자(남), 코끼리 두상(북)을 통해 흘러들어와 속인의 죄를 사하는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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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솜 (TA 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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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2세기 말

▷건축왕 :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1-1220)

▷종교 : 불교

▷건축양식 : 바이욘

 

개요

내외란을 모두 제압하고 제국의 최번성기를 영위케 했던 영웅 자야바르만 7세는 원래 정통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수르야바르만 2세는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여 치열한 왕위계승전 끝에 투르부바나디트야바르만 왕이 즉위했으나 챰파족과의 결전에서 사망하자 수르야바르만 2세의 사촌이자 장군인 그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즉위하였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어서 부친을 기릴만한 건축물이 없었다. 챰파족을 격퇴한 뒤 가장 먼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으로 타 솜 사당을 지어 바쳤다. 앙코르톰이나 바이욘 등을 짓기 이전의 일이니 그의 효성 또한 짐작 가능하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를 위해 거대한 사원 쁘레아 칸을 지어 바쳤다.

 

감상

1. 외벽

사당은 무척 단촐하지만 세 겹의 붉은색 라테라이트 벽돌로 담을 쌓아 위엄을 더했다. 일반적으로 앙코르의 사원들은 3단, 5단, 7단등 메루산을 형상화하여 여러 개의 단을 쌓아 복층 구조를 취하여 치솟는 형상을 그려내지만 이 사당은 신전이 아니어서 그저 단촐하게 단일 기단 위에 단층으로 지어 외려 겸손해 보이고 무척이나 아늑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다고 허술하진 않다. 벽에 새겨진 단아하고 정교한 부조 등을 보면 정성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2. 탑문

따솜은 구조 또한 아주 간결하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고푸라 탑문을 갖고 있으며 현재 출입은 서쪽문으로 한다. 이 고푸라 탑문은 십자가형으로 4면으로 작은 별실을 갖고 있으며 동쪽과 서쪽 별실 앞에는 기둥으로 떠받혀진 현관이, 남쪽과 북쪽 별실은 작은 기둥이 바깥쪽 창문을 떠받히는 구조를 띤다. 고푸라 탑문 벽에는 풍만한 압사라(천녀)들이 마치 벽안에 갇힌 듯 생생한 모습으로 새겨져있다. 또 서쪽 탑문의 남쪽면에는 자야바르만 7세가 축조한 건물에서 쉽게 보는 "바이욘의 미소"가 오가는 이를 따스하게 맞아준다. 서문으로 들어오면 먼저 내부를 한 바퀴 돌아보자. 이곳도 수많은 열대 거목들에게 짓밟힌 채로 발굴되었고 동쪽 고푸라 문도 거대한 나무뿌리에 짓눌려 붕괴되었으나 사진 찍기에는 멋있다. 특히 아침녘 붉은 햇살을 받을 때가 최적의 촬영시간.

 

3. 사당

건물은 갤러리 형으로, 중앙 성소를 빙 둘러 에워싸고 그 가운데에 십자가형 성소가 배치되어 있다. 갤러리의 각 코너에는 가짜문을 새긴 별실을 갖고 있으며 갤러리 안쪽 중정에는 두 개의 장서각도 갖고 있다. 따 솜 관광에는 그리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다. 다른 유적 발굴 때문에 이 작은 사당에는 손도 못 대고 있다. 휭하니 둘러보며 위대한 왕 자야바르만 7세의 효성을 짚어보고 폐허의 유적과 하얀 거목들의 조화를 담아오자.

 

       

   

 

동 메본 (EAST ME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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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0세기 중반(952년)

▷건축왕 : 라젠드라바르만 2세(Rajendravarman II)

▷종교 : 힌두교

▷건축양식 : 프레아 룹

▷위치 : 쁘레아 룹에서 500m 북동쪽. 동바라이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육지의 쁘레아룹과 저수지

내의 동메본이 마주보고 서 있다.

 

개요

야소바르만 1세 사후 중앙왕권에 대항한 치열한 혈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928년 코 케르(Koh Ker)를 수도로 삼고 새 왕조를 연 자야바르만 4세가 득세했지만 역시 왕위 쟁탈전 끝에 그의 조카인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왕권을 잡는다. 그는 곧 코케르를 버리고 다시금 프놈 바켕으로 천도하여 중앙왕권을 확립하였다. 도읍지 프놈바켕이 버려진지 16년 만의 일이었고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서둘러 동바라이의 인공섬에다 동 메본을 건설, 자신의 부모의 영광을 기리며 쉬바 신에게 바쳤다. 동시에, 신전의 동쪽탑문에 새겨진 문자에 의하면 신전은, 코 케르로 옮겨졌던 왕국의 무한한 힘의 환원과 앙코르 왕국으로서의 무궁한 영광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내용의 문자는 비록 947년에 새겨졌지만 동 메본은 952년에야 완공되어 쉬바 신에게 봉헌되었다. 당시에는 저수지를 건너 가야하므로 사원의 각 방면에는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은 저수지(바라이)의 물이 말라 육지가 된 상태라 좀처럼 감을 잡기 어렵지만 동메본으로 가는 도중 물소가 멱을 감는 늪지대를 보면서 예전의 바라이를 잠깐 짐작해 보자. 동메본 건설 후 9년 뒤 프레아룹 건설, 구조나 디자인, 인테리어 등이 매우 흡사하다. 사진 분류 작업을 하면서 한참을 애먹은 것이 바로 동메본과 프레아 룹이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감상

1. 선착장

세 겹의 두터운 장벽에 에워싸인 동 메본은 메루산을 형상화한 3단의 성전산 형태를 취한다. 그 성전산은, 지금은 메워져 육지가 되어 버렸지만 그 옛날에는 거대한 동바라이 저수지 한가운데에 넘실거리는 섬처럼 웅자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떠 있었다. 상상만해도 멋지지 않는가? 신전은 붉은색 라테라이트, 흰 사암과 석회 등 다 양한 건축자재를 사용하여 색 조화가 아름답다. 수상신전답게 신전 4면에는 각각 테라스형 선착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순례자를 태운 배가 닻을 내렸을 선착장에는 늠름한 사자 한쌍((지도에서 빨간 점 표시들)이 지키고 서 있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푸른 물을 상상하기 어렵다.

 

2. 고푸라 탑문

외벽은 담이 아닌 방조제 역할과 선착장용으로 높게 지어져 있다. 신전을 둘러 4방향으로 난 선착장은 각각 십자가형 고푸라 탑문을 통해 내부로 연결된다. 탑문의 동쪽 상인방(문틀위)에는 비쉬누 신의 네 번째 화신인 나라싱하(Narashingha, 반은 인간 반은 사자의 형태)가 새겨져 있고 북동쪽 상인방에는 비쉬누 신의 아내이자 행운의 여신 락쉬미가 두 마리의 코끼리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라젠드라바르만 2세는 이렇게 비쉬누 신 부부를 비유하여 신전을 자신의 부모에게 바쳤는데, 비쉬누신과 락쉬미 여신은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며 무엇보다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 남편이 화신으로 변해 활약을 할 때 마다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 그 활약의 장에서 한몫을 감당하며 남편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헌신적인 아내의 표상이며 그로 인해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여신으로 사랑받는다. 비록 왕좌에 올랐던 부모는 아니지만 아들로 인해 이렇게 최대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화신 나라싱하>

악마 히란나야카시푸는 브라흐마 신의 총애를 받아, "신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 어떤 존재도 그를 죽이지 못하며 밤에도 낮에도 죽이지 못하며 집안에서든 집밖에서든 죽이지 못하리라"라는 영생의 권능을 부여받았다. 때문에 교만해져 아들이 비쉬누 신을 섬긴다하여 아들마저 죽이고 불의를 거듭하자 비쉬누는 예언을 피해 그를 없애기 위해 "신도 인간도 동물도 아닌 반인반사자, 밤도 낮도 아닌 황혼녘에, 집 안도 집 밖도 아닌 문지방에서" 악마를 살해하여 다르마의 본질을 영위케 한다. 이후 나라싱하는 문지방의 신으로서, 사원의 입구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신전(중정)

탑문을 통과하면 벽 안쪽은 순례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회랑이 길게 나있었고 그 앞쪽으로 붉은 라테라이트로 지은 갤러리형 작은 건물 16개가 내벽을 따라 빙 둘러 신전을 에워싼다. 수많은 갤러리(회랑을 가진) 건물들은 나무 기둥들이 천장을 지지한 형태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나무기둥들이 죄다 사라져 석재 구조물만 일부 남아 있다.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 양쪽으로 한쌍의 늠름한 사자상이 신전을 호위하고 외벽 및 내벽의 4면 코너에는 사암으로 빚은 2m 크기의 아름다운 코끼리 상(지도에서 초록 표시)이 신전을 장식한다. 신전으로 들어서면 각 방향으로 한쌍씩 8개의 탑이 균형있게 배치되고 5개의 라테라이트 석으로 쌓은 직사각형 건물이 불균형 배치되어 있다. 특히 동쪽에 선 세 개의 건물은 창문이 없는 형태에 문은 서쪽을 향해 열려 있고 그중 동남쪽에 나란히 선 두 개의 건물에는 수도생활에 대한 7가지 내용이 새겨져 있다.

 

4. 신전(위쪽테라스)

성소를 포함한 다섯 개의 탑이 있었고 최상단으로 오르는 계단은 대단히 가팔랐다고 하니 금접의 영역 메루산으로 오르는 길이 쉽지 않음을 말해준다. 위쪽 테라스는 사암으로 담을 쌓고 사자상으로 장식했다. 쁘레룹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뽀족한 형상이라면, 동메본은 마치 대지와 물을 보담는 것처럼 넓적하게 퍼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암으로 지은 위쪽 테라스는 메루산을 형상화했는데 중앙의 산을 둘러 사방에 4개의 대륙을 표현한 다섯 개의 탑이 서 있다. 사암으로 지은 탑들은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나머지 방향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가짜문이 새겨져 있다.

 

5. 성소(중앙탑)

장식된 성소의 상인방(문틀위)에는 각 방향으로 신들이 자신들의 상징을 타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동쪽면에는 하늘의 신 인드라(Indra)가, 마부가 끄는 머리 셋 달린 코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으며, 서쪽면에는 쉬바 신의 아들인 전쟁의 신 스칸다(Skanda)가 공작새를, 남쪽면에는 쉬바 신이 황소 난디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4개의 바라이 (The Baray)

 

바라이(Baray)란 크메르 언어로 '저수지'라는 뜻. 지평선까지 펼쳐지는 드넓은 평야를 가진 옛 크메르 왕국에서 주업은 농업이었으니 물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연중 다모작이 가능한 이곳에선 일찍부터 천수답에만 의존하기에는 부족함을 깨닫고 왕들은 도읍지를 정할 때마다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연중 백성들이 물을 끌어다 농업에 임할 수 있도록 했으니 그 아이디어나 규모에 있어 세계 최초, 최대의 인공저수지라 평해도 손색이 없다. 앙코르에는 그러한 용도로 만들어진 4개의 인공 저수지가 동서남북에 존재했었다. 크메르인들은 인공 저수지 한 가운데에 수상 신전을 세워 늘 신과 함께 했다.

 

①인드라타타카 바라이(Indratataka Baray) 앙코르에 최초로 들어선 인공 저수지로서 위치상으로는 남동쪽의, 하리하랄라야(현재의 롤루오스)를 수도로 삼은 3대왕 인드라바르만 1세가 건립했다. 지금은 육지화 되어 저수지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옛날 저수지 한 가운데 서 있었던 롤레이 수상 사원에서 옛 모습을 상상해보자.

②동 바라이(East Barey, Yasodaratataka) 야소바르만 1세(Yasovarman I)가 프놈 바켕(야소다라푸라)으로 천도한 뒤 4계절 농업용수를 조달할 목적으로 시엠립 강물을 끌어다 바켕 동편에 건립한 2,000m x 7,000m의 거대한 인공 저수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수심이 3m 정도로로 얕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육지화 되어 버려 동 바라이 내에 뜬 수상 사원 동 메본을 찾는 우리는 당시 이곳이 저수지였다는 것만 인식할 뿐이다.

③서 바라이(West Baray) 동 바라이보다 후대인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 시절 건립된 것으로 면적면에서도 훨씬 크다. 넓이도 동 바라이보다 훨씬 커 무려 8,000m x 2,200m나 되며 비록 저수지 동편 절반 정도가 침적토로 매몰되어 버렸지만 아직도 푸른 물이 넘실대는 저수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곳에도 동 바라이와 마찬가지로 저수지 한 가운데에 서 메본이란 신전이 떠 있었다. 지금도 배를 빌려 타고 서 메본으로 진입할 수 있는데 폐허 이며 앙코르 유적 입장권은 제시할 필요가 없으며 건기에는 늪지대가 힘들 게 할 것이다. 서 바라이도 황혼 즐기기에 좋은 곳이며 배를 빌려타고 신전을 향하면서 옛 바라이의 풍경을 음미할 수 있다. 이만한 인공 저수지 축조는 오늘날에도 대단한 사업인데 1천년 전에 이러한 축조를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에는 수도 바켕에서부터 서 바라이 동편 둑까지 도로가 연결되고 왕실 전용 선착장과 양식장의 흔적까지 있는 걸 보아 서 바라이는 왕을 비롯 수도 시민들의 피서지로 애용된 듯하다. 그 전통을 이어 현 국왕 시하누크가 1970년 망명하기 전까지 시엠립을 찾는 귀빈들의 휴양지로 사용했고 지금도 시엠립 주민들은 물론 저수지 인근 주민들의 좋은 휴식처로 사랑받는다. 배를 빌려 타고 황혼에 저수지를 감상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전망대에서 바라이 기념사진이라도 찍자. 서 바라이까지 가지 않고도 서 바라이를 보는 방법은, 열기구를 타고 오르면 한눈에 내려보인다. 그것마저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프놈 바켕에서 내려다보면 된다.

④자야타타카 바라이(Jayatataka Baray) : 앙코르에 위대한 건축물을 남기고 앙코르 왕국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역시 백성들의 농업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앙코르 지역 북쪽에 만든 저수지로서 규모면에선 다른 저수지들보다 훨씬 작다. 이 저수지의 수상신전으로는 닉 뽀안이 있다. 프랑스 통치 시절 쌓은 제방으로 인해 저수지의 물이 말라 육지화 되었다.

 






따프롬 (Ta Pro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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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186년

▷건축왕: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종교 : 불교

▷건축양식 : 바이욘

▷위치 : 타케오 아래쪽

 

개요 : 타 프롬은 앙코르에 위대한 건축물을 수 없이 남긴 위대한 왕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브라흐마 신에게 헌납한 사당 겸 사원이다. 수많은 건축물을 남긴 그이지만, 그 최초의 건축이 어머니를 위한 사당이란 점을 보건데 효성이 지극한 왕이었던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아버지를 위한 사원(프레아 칸)은 그의 건축물 리스트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점이다.

 

형태 : 사원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말하고 싶다. 여러분이 이 사원을 찾을 때 충분히 설레임을 갖고 또 기대를 해도 좋다. 100이면 100, 타 프롬을 마주하면 감동과 전율을 느낄 것이니까. 수많은 여행지를 다녔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폐허는 만난 적이 없다. 수많은 여행지를 다녔지만 이토록 처절한 자연과 역사의 투쟁을 본 적이 없다. 타 프롬은 역사 현장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는 멋진 곳이다.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면 안젤리나 졸리를 보증인으로 내세운다. 온 세상의 멋지고 에스닉하고 스펙타클하고 신비스런 곳만 골라 무대로 삼기로 유명한 영화 '툼레이더'에서도 선택한 장소이니까. 단지, 미리 아래의 설명만 읽어두고 사원 내에선 감상에만 몰두한다.

 

타프롬은 불교 시절 건립된 불교 사원이다. 그러나 원래 크메르 왕국은 힌두교를 신봉했으며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도였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뚜렷하게 불교 양식이란 게 없었다. 따라서 사원의 구조나 양식은 힌두교 건축양식이다.

 

 

타 프롬 사원을 둘러싼 외벽 둘레만 1,000 m x 700 m로서 외벽은 반띠이아 끄데이와 근접할 정도로 크지만 대부분 나무 둥지에 허물어지고 사원 내부도 워낙 깊은 밀림 속이라 발굴팀 조차도 아직 신전의 정확한 크기와 규모를 측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워낙 붕괴의 정도가 심하고 또 거대한 나무들의 침범으로. 이 나무들을 적당수준으로 베어내는 작업만으로 벅찰 정도이다. 어느 나무를 어떻게 잘라내야하나.............. 이 사원 복원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이다.

 

타 프롬은 원래 동쪽 탑문을 통해 출입했으며 길고 긴 갤러리 복도를 따라 들어가 중정을 통해 내부의 중앙 성소로 통하게끔 되어 있지만 지금은 잊어 버려라. 내부는 거목에 짓눌리고 허물어져 유적관리단이 내놓은 최소한의 통로만이 미로처럼 엮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타 프롬이 어느 정도 규모의 사원이었는지는 알고 넘어가자. 타 프롬에 새겨진 문자 기록에 의하면, 고위급 승려가 18명이나 있었고, 관리인이 2,740명, 보조원이 2,202명, 그리고 무희들이 무려 615명이나 소속되어 있었다. 또 황금으로 만든 접시 세트가 있었는데 총 황금 무게가 무려 500kg이나 되었고!!! 35개의 다이어먼드, 40,620개의 진주, 그외 4,540여개의 각종 보석과 876개의 중국산 휘장과 512개의 실크 침구, 523개의 양산이 있었다고 자산 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스님들이 계산 사원에 615명의 무희?.... 이 사원의 화려함과 융숭함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봉헌을 할 때 분위기를 돋워주는 역할을 하며 무희들의 홀 흔적이 그것을 말해준다.

감상 : 서두에서 보다시피 좀처럼 그리기 어려운 지도이지만 인내심을 갖고 그렸다. 그 이유는 여러분은, 이 사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디가 어딘지 구분도 하지 못하고 폐허를 방황하다가 거대한 나무의 뿌리만 바라보다 올 테니까. 최소한 이 사원이 이렇게 생겼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그런 의미에서 착하져?). 따라서 타프롬의 감상 포인트는 카메라 필름을 충분히 준비해서, 물 한 병 들고 그저 밀림 속 폐허를 헤매다가 시간 내에 살아서(?) 돌아오면 된다. 타프롬에 대해선 사설이 길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너무 맘에 드는 곳이니까.

입구에서부터 사원까지는 제법 먼 길이다. 장님 악단의 연주를 들으며 사원을 향해 방향을 튼다. 한 발자욱 디딜 때마다 팔팔 날리는 모래만 아니라면 밀림 속에서도 더 깊은 밀림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만 하늘을 향해 치솟은 밀림 속에다 길을 터준 것만으로 고마워해야하며 밀림이 풍기는 녹색 향기의 신선함이 폐 속 깊숙이 박히는듯하여 모래길을 걷는 기분조차 상쾌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한국의 어느 깊은 산사(山寺) 앞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이 잔잔한 물에 나뭇잎을 드리우고 오랜 시간 물속에 잠긴 낙엽들이 짙은 고동색을 발하며 푸른 세상 속에서 시선을 끈다. 나무들에게 눌려 일그러진 입구 모습이 범상치 않다. 일부 온전한 지역을 제외하곤 사원은 거의 허물어진, 무더기 벽돌로 이뤄진 폐허로 잔존하는데 울창한 밀림 속의 고색창연한 폐허 앞에서 누구나 감탄사부터 발한다.

그리고 연신 찰칵 찰칵...

길을 잃어라.

어차피 동행이 있어도 잠시 한눈 파는 사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테니까. 찾지도 말고 그저 여기저기 돌더미 사이을 누벼 보라. 가다가다 보면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가다가다 보면 지도의 어느 부분을 스쳐지나간다. 허물어진 담 사이로, 약간의 균열만 보여도 굵고 강인한 열대수목이 거대한 뿌리를 내리꽂는다. 마치 거부할 수 없는 강인한 흡인력으로 사원을 집어삼킨 것 같은.....

tip : 단 일몰 시간 가까이서 길을 잃으면 허걱!!!!! 어둠이 빨리 찾아오는 폐허에서 진짜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_^*

 

돌더미 속에 앉아 있으면 밀림 속 서늘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면서도 갑자기 오싹함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칼을 든 괴한들이 튀어나와 위협할 것같은(영화를 넘 많이 본 탓일까 *^_^*), 그래도 거목의 그림자가 드리운 허물어진 돌담 아래 앉아 밀림 속에서 지저귀는 낯선 새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슈퍼 우먼 안젤리나 졸리가 된 기분이다. 머가 무서우랴.

 

돌더미, 긴 회랑 사이 사이 비집고 들어가노라면 벽 속에 갖힌 아름다운 압사라(천녀)들을 자주 맞이한다.

 

남자들은 어떤 기분일까 싶다. 아무도 없는 고즈녁한 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터질 듯 풍만한 압사라와 조우하는 기분이....

 

유적관리위원회의 고충을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타프롬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이 사원의 복구를 반대한다. 그 폐허가 너무나 아름답고 나무는 베어내기 아깝기 때문이다.

 

타 프롬의 매력은 폐허와 나무들의 생존경쟁임을 충분히 인식하여 이 사원은 복구를 하지 않고 단지 관광객을 위해 최소한의 길을 트고 사원을 더 이상 손상시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을 할 뿐이다.

 

갤러리를 지나 사원 끝까지 갔다 오고 시간을 충분히 잡도록 한다.













반띠아이 끄데이 (Banteay K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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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2세기 중반에서 13세기 초

 

▷건축왕 :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1181~1220)

 

▷종교 : 불교

 

▷건축양식 : 앙코르와트와 바이욘 양식의 혼재

 

위치 타 프롬 남쪽, 스라 스랭과 마주보며 위치

 

명칭 : 반떼이란 "성채" 끄데이란 "방"이란 뜻. 사원의 설립 목적이 승려들을 위한 것이여서 "수많은 방들을 가진 성채" 같은 사원으로 대단한 규모를 자랑한다.

 

재밋는 얘기는, 1960년대에 처음으로 이 사원을 복구하려 했으나 오랜 세월 주민들이 사원의 방들을 가축들의 우리로 사용하고 있어 무척 난감해 했다고 한다.

 

구조: 불교사원인 타 프롬과 기본 구조나 디자인이 매우 흡사하며 외벽과 내벽은 붉은 라테라이트 벽돌로, 건물은 사암으로 건조했으며 힌두교 양식과 불교 양식을 혼재했다.

 

용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방들과 보석처럼 정교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건축물이지만 잘 부서지는 사암으로 건립하여 붕괴와 유실의 정도가 심하다.

 

불교 신봉기인 자야바르만 7세때 건립한 불교 건물로서 그 장대한 규모나 정교함을 보아 당시로는 대단히 중요한 용도의 사원이었겠지만 실제로 이 사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발견되지 않아 그 용도를 추정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자야바르만 7세 시절 수천명의 승려들이기거했던 타 프롬 사원과 디자인이나 구조 자체가 매우 흡사하며 인접하여 위치한 관계로 이 사원 역시 당시 불교 사원으로 융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상 :

붕괴의 정도가 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붕괴된 모습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워 매혹적이며 남은 유적만 해도 가히 멋진 사원이며 사이사이 영광을 말해주는 멋진 조각과 장식들이 또 고혹적이다.

 

스라 스랭(왕실 연못)과 공유하는 넓은 공터에서 멋진 고푸라 탑문을 바라보면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한 느낌이다.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건축물에 즐겨 사용하는 "바이욘의 미소"를 이곳에서 마주하기 때문이다.

 

크데이 사원의 외곽을 에워싼 벽은 700m x 500m나 되며 붉은 라테라이트 암석을 사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의 다정다감한 미소의 환대를 받으며 들어서면 한적한 길 좌우로 노점상들이 예쁜 기념품을 판다.

 

기웃기웃, 물건 파는 아이들과 농담도 하면서 들어가면 드뎌 테라스 유적이 맞이한다. 춤추는 압사라(천녀)들이 새겨져 있어 무희들의 홀이라 이름붙혀진 테라스, 나가와 사자상이 내려다 보는 해자, 그리고 사원 입구의 십자가형 탑문, 살아있는 듯한 압사라들이 새겨진 내벽의 부조 등은 그 옛날 이 사원이 얼마나 멋지고 웅장했는지를 가늠케 한다.

 

신전 내벽은 물론 성소를 둘러싼 내벽도 붉은 라테라이트를 사용하여 흰 사암의 건물과 예스런 대조를 보인다.

 

그러나 십자형 탑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수많은 방들은 죄다 허물어져 어디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사원 요소요소에 부처의 모습이 많이 조각되어 있었으나 훗날 힌두교로 환원되면서 거의 지워졌다.

 

방향을 서쪽으로(입구에서 직진)으로 잡아 들어가면 붉은색 라테라이트 벽으로 쌓은 갤러리를 통과하여 옛 성소를 만나는데 황색 가사를 입은 불상이 놓여져 있다.

 

그리고 다시 직진하여 사원을 빠져나가면 뒤편에 허물어진 유적과 그 유적을 짓누르는 실로 거대한 나무들의 적자생존의 양상을 볼 수 있다.

 

유적의 잔해를 볼 때는 복구를 간절히 기대하면서도 이 나무들을 접하면 복구보다 현상을 유지케하고픈 이율배반적인 생각이 드는 건 모든 관광객의 공통된 의견인 것 같다

 









쓰라 쓰랭 Srah Sraeng

   

▷건축시기 : 10세기 후반

▷건축왕 : 완공 - 라젠드라바르만 2세 (Rajendravarman II, 944∼968년)

재건 - 쟈야바르만 7세(JayavarmanVII)(1182~1220)

▷종교 : 불교

▷아트스타일 : 바이욘

 

위치 반띠아이 끄데이 입구 공터 맞은편(상점이 있는)에 덩그러니 선 넓다란 계단 너머. 많은 사람들이 끄데이 본 것만으로 만족하거나 힘들어 뙤약볕 아래 계단까지 가기 싫어한다. 그러나....계단을 올라서면, 계단 아래에선 절대로 예상하지 못하는, 낯선... 드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명칭 쓰라는 연못, 쓰랭은 왕가, 즉 "왕실 연못"이란 뜻.

 

형태 쓰라 쓰랭은 앙코르 시대에 만든 저수지 중에서도 몇 안되는, 현재까지도 자연적으로 물이 고이는 저수지이다. 원래 10세기 후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왕실의 휴가 전용으로 지은 저수지로서 프레아 룹(Preah Rup)과 뱃춤(Bat Chum) 신전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카빈드라리마타나(Kavindrarimathana)가 설계하여 축조했는데 깊이를 충분히 계산하여 만든 덕분에 건기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다른 바라이(저수지)들은 농작용이여서 동물들이 물을 마시고 농민들이 목욕을 하여 수질이 좋지 않았는데 반해 이 쓰라 쓰랭은 왕실 전용이라 물이 아주 깊고 깨끗했다고 한다.

 

현재도 350 m x 700 m의 넓은 호수이지만, 라젠드라바르만 2세 시절에는 훨씬 더 넓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호수는 200여년이 지난 뒤 쟈야바르만 7세에 의해 재건된 모습이다. 이때 현존하는 아름다운 나가 신상으로 에워싸인 테라스를 가진 왕실 전용 선착장을 추가하면서 저수지의 크기를 현재의 상태로 줄였다고 한다. 앙코르의 밀림을 적시는 비가 내릴 때, 넘실대는 저수지를 한가롭게 물놀이하는 왕족들의 호화스런 생활이 상상된다

한가지, 학자들은, 앙코르 시대에 지은 거대한 저수지들이 매몰되거나 물이 마르는데 반해 이 쓰라 쓰랭만은 건기에도 물이 충분히 고이는 점을 볼 때 어쩌면 원래 이곳에 천연 저수지가 있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왕실 저수지를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예전만큼 깊지가 않아서인지 건기 끝무렵에는 물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쁘레아 룹 (Prea R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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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961년

▷건축왕: 라젠드라바르만 2세(Rajendravarman II, 944~968)

▷종교: 힌두교

▷건축양식 : 쁘레아 룹

 

위치: 동 메본 아래쪽, 스라스랭 위쪽 500m

 

명칭 쁘레아 룹이란 "사체(死體)의 변신(變身)"이란 뜻. 고대 크메르 전통 장례의식은 시체를 화장한 뒤 그 뼈가루로 원래의 형체대로 그려서 영혼의 육신을 만들어 사후 세계로 들어서게 했고 이곳에선 그러한 의식이 치뤄졌음에 유래한 이름이다.

 

개요 : 프레아룹은 "동쪽 성전산"이라 불리는 동바라이 지역에서 가장 멋진 신전이다. 장례전 용도의 사원처럼 보이면서도 주요 건물이 동쪽에 집합되고 또 문들도 동쪽을 향해 열려 있어 황금 햇살을 방안 가득 보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이곳은 장례전이지만 붉은 라테라이트 벽돌로 쌓은 탑들 사이사이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햇살이 비춰지는, 어쩐지 어두운 이미지가 아닌 전체적으로 새로운 후세를 의미하는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동 메본 건설 후 9년 뒤에 건립한 사원이라 구조나 디자인, 인테리어 등이 매우 흡사하다.

 

감상

①외벽과 탑문 : 두 겹의 벽으로 둘러져 있으며 127m x 116m의 붉은 라테라이트로 지은 성벽 같은 외벽 밖에는 소떼를 방목하여 무척이나 한가롭고 소치는 꼬마들, 물건 파는 꼬마들의 해맑은 미소와 조잘거림이 또다른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외벽에는 사방으로 고푸라 탑문이 나 있으며 출입구는 동쪽탑문이다.

 

②탑 군(群) : 입구 탑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3개가 한쌍인 탑군을 만나는데 동일한 기단에 서 있지만 가운데 탑이 조금 더 크게 지어졌다. 오른쪽 첫째 탑은 발굴 당시에도 무너진 돌더미 조차 없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탑은 짓지 않았거나 어떤 건물을 짓기 위해 인위적으로 허물어 석재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붉은 라테라이트로 쌓아올린 탑들은 사방향으로 문이 나 있고 상인방(문틀위)에는 힌두신화를 주제로 한 아름다운 부조가 새겨져 있지만 탑 자체의 훼손이 잘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왼편 맨 끝 탑의 동쪽 출입구 상인방 새겨진 부조는 온전한 상태인데 비쉬누 신의 4번째 화신인 나라싱하(반사자, 반인간의 형) 부조가 새겨져 있다.

 

<문지방의 신 나라싱하(Narashingha)>

악마 히란나야카시푸(Hiranayaksipu)를 총애한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신, 인간, 동물 그 어떤 존재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며, 밤에도 낮에도 죽이지 못하며,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죽이지 못하는 영생의 권능"을 부여했다. 교만해져 악행을 일삼는데다가 자신의 아들 프라흘라다(Prahlada)가 비쉬누 신을 숭배하자 격노하여 아들마저 죽이려 한다. 그의 불의를 보다 못한 비쉬누 신은 브라흐마의 예언을 피해 그를 칠 묘안을 짜낸다. 우주 질서 유지의 신 비쉬누의 권능 중 하나가 불의가 발생하거나 난국에 처할 때 그 상황에 맞는 상태로 환생하는 권능을 갖고 있다. 비쉬누는 브라흐마의 예언 중에서 결점을 찾아, 신도 인간도 동물도 아닌 반사자 반인간의 몸의 나라싱하로 환생하여 밤도 낮도 아닌 황혼 무렵에 집 안도 집 밖도 아닌 문지방에서 그를 단숨에 살해한다.

 

③내벽과 탑문 : 내벽도 붉은 라테라이트로 축조했으며 역시 사방을 둘러 탑문을 세웠지만 그 크기는 외벽의 것보다 훨씬 작다. 동문을 들어서면 내벽을 빙둘러 길다란 건물들 잔해들이 이어지는데 아마도 프레아룹 참배객을 위한 휴게소 및 대기실 역할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문 오른편 휴게소 끝에 위치한 작은 정사각형 건물(지도의 붉은점) 인근에서 쁘레아 룹에 관련된 기록 비문이 발견되었다.

 

④화장터 : 성전산을 앞두고 좌우로 두 개의 건물 잔해 사이의 벽돌로 쌓은 네모난 구조물을 주시한다. 신전 한 가운데에 놓인 이 구조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쁘레아룹이 화장을 치루는 장례전인 만큼 이곳이 화장터로서 이 구조물은 화장을 위한 시체를 뉘이는 곳이 아닐까 하는 쪽으로 기울지만, 그 외 다른 어떤 구조물의 기단일 수도 있고 쉬바에게 봉헌된 신전이며 제1기단의 사당에 쉬바신의 상징이 모셔진 만큼 아마도 쉬바신이 타고 다니는 난디상(Nandi, 흰색황소)을 올려둔 기단이 아닐까라는 의견도 있다.

 

⑤1~3단 기단: 3단의 기단 위로 아주 가파른 계단이 이어진다. 제1단과 2단은 라테라이트로, 3단은 사암으로 쌓은 심플한 구조이지만 건축물의 무게와 평면 비율을 고려한 의도가 엿보인다. 각 단의 계단 양쪽에는 늠름한 사자상이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전체적인 사원 분위기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사자상 역시 뽀족형으로 지어진 신전의 공간과 균형을 고려하여 층을 올라갈수록 작아지며 특히 3단의 사자는 가벼운 사암으로 만들었다. 계단을 올라 적당한 위치에서 사자상이 내려다보는 프레룹 전경 사진을 찍으면 기념으로 최고!!.

제1단에는 사방을 둘러 동쪽으로 문을 낸 12개의 작은 사당에 쉬바 신의 상징인 링가(남근)가 모셔져 있다. 제3단은 사암으로 축조했으며 동쪽에만 두 개의 보조 계단이 나 있다.

 

⑥중앙성소탑 : 최상단의 성소는 사방에 각각 네 개의 대륙을 의미하는 탑들을 두고 중앙에 쉬바 신이 사는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얹은 전형적인 메루산의 형태를 취한다. 다섯 개의 모두 동쪽을 향해 열려 있으며 나머지 방향의 문들은 문 형태만 갖춘 가짜문이다. 사암으로 빚은 가짜문에는 식물 문양을 비롯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 넣어 장식했다. 탑은 석회를 두텁게 발라서 부조를 새겨 장식했는데 서쪽의 탑 두 개에는 여인의 형상이, 동쪽 두 개의 탑과 중앙 탑에는 남자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남서쪽 탑의 부조가 비교적 온전하다. 여기에는 브라흐만 신과 비쉬누 신의 3번째 화신인 바라하(멧돼지)가 새겨져 있다.

 

⑥일출과 일몰 감상 :

낮동안 한적하던 사원은 일몰 무렵이 되면 관광객들이 몰린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앙코르 밀림에 가라앉는 석양을 보기위해. 먼저 해가 있을 때 동북쪽을 바라보면 프놈 복(복 산)과 프놈 꿀렌(꿀렌 산)이 바라보이고 해가 기우는 정도에 따라 사원은 빛과 그림자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서쪽으로 앉아 해가 밀림으로 지는 모습을 바라보자. 저 멀리 앙코르와트가 밀림 끝자락에 보인다.

사족 : 프레아 룹은 동쪽 사원이란 말처럼 일출 때 보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일출 보러 시엠립에서 가기에는 조금 더 서둘러야하고 또 동바라이 지역 코스의 끝자락으로 들리면 편하기 때문에 일몰 때 황혼 감상으 위해 많이 찾는다. 낮에 보는 프레아룹은 그저 단순한 돌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유적이러니.. 생각하면서 보는. 그러나 해가 기운을 떨어뜨리는 시간부터 앉아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하다. 낡고 허물어진 붉은 탑위로, 잔해 사이로 황금 햇살을 드리우며 변해가는 모습을. 거대한 사원 탑의 벗겨진 틈마다 씨를 내린 들풀이 황금빛 가운데서도 푸른색을 허공에 띠우고 탑이 마치 거대한 분재를 연상케한다.

 

이곳은 그 옛날에는 동 바라이의 물길이 이어지는 평야지대이고 지금도 군데군데 늪지대와 끝없는 논밭, 그리고 멱감는 소떼들로 오가는 길목마저 아름다운 곳이다. 그 평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전산이라 주변 전경 감상에 최즉이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붉은 햇살이 붉은 라테라이트 건물을 물들이며 빛을 발할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한 가지 더, 젊은 여행자들에겐 더워도(겨울이라면 오케이) 툭툭이를 타고 가는 걸 권한다. 주민들의 삶도 보고 멱 감는 수많은 소떼들, 군데군데 고인 물에는 동네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그 길을, 특툭이를 타고 전신으로 자연을 느끼면서 달리는 그 기분을 에어컨 버스나 택시에 탄 사람들은 절대로 경험하지 못한다. 이 기분이 사원을 감상하는 거 보다 더 추억에 남는다.

 

ps: 이 지역이 길 다니기에 가장 아름다웠는데 건기에 갔을 때는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소들이 멱 감던 늪지는 모두 육지로 변하고 길 가에 고인 물들도 완전히 사라져 아마 건기에 간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물이 어딧어? 라고 할 것이다. 물 고인 계절, 동바라이 일대를 툭툭이로 드라이브하는 건 앙코르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를 선사한다.

 

 

 

 

반띠아이 쌈레 (Banteay Sam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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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159~1175년

▷건축왕 : 수르야바르만 2세 (Suryavarman II, 1113~1150)

▷종교 : 힌두교

▷건축양식 : 앙코르와트

▷위치 : 동바라이에서 동쪽으로 400m

 

명칭 :

반띠아이란 크메르 어로 "성채" 쌈레는 원래 최초의 크메르가 쿨렌 산에 터를 잡을 때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쌈레" 라는 소수부족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쌈레족의 성채'라는 뜻.

 

개요 :

반띠아이 쌈레는 비쉬누 신께 바친 신전으로 고색창연함을 간직한 홍보석처럼 아름다운 신전이다. 허물어진 원래의 자재들을 모아 꿰맞추는 재건축 신공법인 아나스틸로시스 공법(Anastylosis Method)을 검증 끝에 도입하여 완벽하게 짜맞추었지만 20여년간 공산 치하를 거치는 동안 관리를 소홀히 하여 허물어진 부분들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그러나 여전히, 비록 부서진 붉은 담장 위에는 누런 세월의 때가, 바람에 실려 내려앉은 부드러운 흙 사이로 들풀이 뿌리를 내려 흩날리지만 그 자체가 눈물이 날 만큼 정감 있고 고즈녁함을 느끼게 하는 신전이다. 쌈레는 앙코르와트를 건립했던 수르야바르만 2세 시절 건립되어 석재며 건물 디자인, 양식 등은 앙코르와트 3층 성소 부분의 미니어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방적이며 귀엽다. 그러나 수르야바르만 2세는 이 사원을 준공만 한 채 그해 사망하여 그 아름다움을 마주하지 못했고 야소바르만 2세 시절에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그 후대(아마도 불교 시절)에 증축 내지 개축을 하였는지 바이욘 양식도 일부 가미되어 있다. 이 사원의 특징은 앙코르와트의 축소판이란 점과 건물들이 모두 해자로 격리된 채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앙코르와트는 섬 위의 사원인데 비해 쌈레는 사원 자체가 연못에 떠 있는 작은 앙코르와트이란 점이다.

 

형태 :

쌈레의 직사각형 구조의 전형적인 힌두교 양식을 띈다. 갤러리와 건물 창문은 크메르 창문 건축의 특징인 밸러스터(Baluster) 양식의 기둥들로 떠 받혀 앙코르와트 3층 성소탑의 건물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감상 :

①외벽과 고푸라문 : 붉은 라테라이트 석으로 쌓은 외벽에 네 방향으로 고푸라 탑문을 가졌는데 그중 동편 고푸라 문(탑문)은 가장 많이 유실되었다. 동편 탑문이 원래의 주 출입구로서 대단히 멋진 외부 테라스를 통해 작은 해자로 둘러싸인 200m의 긴 보도가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은 이렇게 반대의 방향에서 바라보지만 쌍사자를 끼고 서서 보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 옛날처럼 저 끝 보도에서부터 쌈레를 바라보며 걸어오면서 그 아름다움을 가늠해보고 싶어진다. 이 진입로도 자세히 보면 앙코르와트의 해자와 유사하다. 앙코르와트처럼 드넓은 해자는 아니지만 나가 신상으로 장식된 난간을 따라 해자의 물길이 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쌈레의 4개의 탑문 중 동문이 가장 손상되고 또 보도를 보호하기 위해 현재 북쪽 탑문을 출입구로 사용하며 주차장이나 가게들이 북쪽문에 위치한다. 차에서 내리면 북쪽 탑문 들어가 왼편으로 돌면 기둥들이 선 테라스를 통해 동문까지 가거나 북문 바깥에서 오솔길을 따라 동문으로 걸어 갔다가 북문으로 나오면 된다. 외벽은 83m x 77m로서 붉은색이지만 기단은 전혀 다른 재질을 사용하여 검은색을 띠는데 이것은 후대에 증축된 것으로 보인다.

 

②갤러리와 해자 : 탑문을 들어서면 2단으로 된 오픈 테라스가 사방을 빙둘러 이어지는데 듬성듬성 사암으로 만든 기둥들이 서 있고 코너마다 멋들어지게 허리를 꼬아 난간을 형성긴 나가신상(Naga, 물의 수호신인 뱀) 물을 내려다본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가 신상이 있음은 곧 지금의 마당에 물이 가득 고여있었다는 뜻. 상상해보라. 이 아름다운 사원이 물 위에 떠 있는 모습을. 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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