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함께 하는 북경여행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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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과 함께 하는 북경여행기(2)

하로동선 0 2352
- 용강대주점 -

우리가 묵게 된 호텔의 이름은 [용강대주점]이다. 위치는 조양구의 아시아선수촌 올림픽 체육센터 동문 방향 4거리이고, 등급은 3성급. 5층으로 된 건물이 'ㄷ'자로 배치되어 있는데, 3성급 호텔답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지내는데 불편하지는 않다. 다만, 호텔 바로 옆에 나이트클럽 같은 것이 있어서 노래 소리도 들리고 ‘쿵작쿵작’하며 풍악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서 좀 재미있다. 그렇다고 시끄러운 정도는 아니다.
1층 로비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프런트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소파와 탁자가 놓여져 있으며, 프런트의 옆에는 간단하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매점이 있고, 매점의 옆으로는 자그마하게 바(BAR)도 마련되어 있다.
처음에 버스가 호텔로 들어올 때는 [富宮]이라고 씌어진 나이트클럽의 간판이 제일 먼저 보이니까 학생들은 “이게 뭐야?”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하!!

- 원명원 -

8월22일 월요일. 모닝콜을 받고 일어나보니 아침 6시10분이다. 대충 얼굴을 씻고 뷔페에 가서 아침을 먹는데 피곤하기도 하고 음식에서 특유의 향이 나고 하니까 밥맛은 별로 없다. 오늘의 일정을 생각하면 든든히 먹어둬야 하는데…

우리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원명원]. 청나라 시대의 황실 정원이다. 본래는 1709년에 당시의 황제인 강희(康熙)가 그의 아들에게 지어준 별장이었는데, 훗날 이 아들이 황제로 즉위한 후 1725년에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했다. 나중에 황제 건륭(乾隆)은 원명원을 크게 확장하여 호수와 인공섬, 크고 작은 건물 100여 채와 우거진 숲이 조화를 이루게 하였으나, 1860년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서 지금은 옛 터도 대부분 없어진 채 일부 잔해만 남아 있다.
이렇듯 큰 볼거리는 없는 셈이고 그런 이유로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단체관광객이 이곳에 들르는 경우는 없지만, 중국인들로서는 의미가 깊은 유적지일 것 같다. 그들의 나라가 서구열강들에 의해 얼마나 처참하게 유린되었는지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 이화원 -

원명원에서 나와서는 부근에 있는 [이화원]으로 이동. 가는 도중에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이 보인다. 중국 내에서는 각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문대학들인데 생각보다 교문이 너무 작다. 그냥 한옥집 대문 같은 곳에 北京大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을 뿐이다. 원래 각 나라의 유명 대학들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은 여행 주제가 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많이 아쉽다.

이화원의 주차장에 이르자 사람들이 정말 많아진다. 해외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국내의 각지에서 몰려 온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들로 와글와글하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림엽서를 파는 남자가 다가와 중국말로 뭐라 떠들어댄다.
오늘의 바쁜 일정 때문에 잰 걸음으로 입구에 다다르니 주변에는 나무도 많고 무엇보다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하다.

이화원(頤和園). 이곳은 소주에 있는 졸정원과 유원, 승덕에 있는 피서용 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정원 중 하나이다. 원래는 금나라 때인 1153년에 황제 완안량(完顔亮)이 행궁(行宮. 왕이 행차할 때 머물렀던 별궁)으로 지었는데, 이후 명나라 때 규모가 좀 더 커졌고, 1750년에 청나라의 황제 건륭(乾隆)은 곤명호를 넓히고 만수산에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1860년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시키면서 앞에서 설명한 원명원과 함께 이곳도 형편없이 파괴된다. 이 후 어린 아들을 내세워서 권력을 잡은 서태후는 1888년에 중국 해군을 훈련시킬 인공 호수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곤명호를 비롯한 이화원의 모든 시설들을 재건하였으나, 호수가 완성되자 훈련장이 아닌 개인의 유락지로 사용하였다. 이렇듯 이화원은 멸망해가는 청나라 왕조와 그 궤(軌)를 함께 하며 인간의 탐욕에는 끝이 없음을 대변하고 있다.

광서 황제가 쓴 편액(이화원이라는 간판)이 걸린 동궁문(東宮門. 이화원의 정문)을 지나 이화원의 본관 건물인 인수전(仁壽殿) 앞에 서니 주변의 전각들과 정원 내의 조형물들이 나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이어서 곤명호(昆明湖)로 이동.
“와!!”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오는 엄청난 규모이다.
저 거대한 호수가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호수라니…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보며,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한편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가 동시에 와 닿으며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호수의 옆에는 호수를 파낼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만수산]이 보이고, 이곳에는 [불향각]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앉아 있다. 불향각에 오르면 곤명호가 한 눈에 내려다보일 것도 같은데 지금은 시간 때문에 허락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아쉽다. 또한 곤명호도 시간만 허락된다면 이렇게 주변에서만 볼 게 아니라 직접 뱃놀이를 하며 볼 수도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도 많이 아쉽다.
우리들은 곤명호를 따라 만들어진 중국의 정원에서 가장 길다는 길이 728m의 회랑을 걸어보았다. 200여 년 전에는 오직 서태후만이 걸었을 그 회랑에는 지금 수많은 관광객들이 떼를 지어 걷고 있고, 일부는 불경스럽게도(?) 회랑의 난간에 걸터앉아 다리를 쉬고 있다.

얼핏 보았을 때, 곤명호는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져서 항주에 있는 서호(西湖)를 닮았다. 물론 서호는 인공호수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지금 곤명호를 보며 2년 전에 본 서호를 떠올린 것은 특별히 호수의 중앙부분에 만들어진 다리 때문이었다. [곽여정]에서부터 곤명호 내의 인공섬인 남호도(南湖島)까지 이어진 [17공교]라는 이름의 이 다리는 서호의 [장교]와 매우 닮아 있다.

- 패키지관광의 폐단, 쇼핑센터 가기-

사실 어제 왕부정거리에 가서 놀면서는 학생들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적어도 내가 생각할 때 그곳의 노점상에서는 ‘쇼핑’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을 재미로 삼아야 하는데, 아이들이 어리다보니까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집에 갈 선물을 준비한다고 이것저것 한 마디로 ‘아닌’ 것을 마구 사들이는 거였다. 내가 몇 번이나 “제발 한 사람 앞에 하나씩만 사라!”고 하는데도 통제가 안됐다.

아침에 원명원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어제의 일이 떠오른다. ‘애들한테도 최소한 제대로 된 물건을 살 기회를 줘야겠다.’ 생각해서 같이 온 해양소년단연맹 관계자에게 아무래도 쇼핑시간이 아주 없어서는 안 되겠다고 했는데, 이게 내 발등을 찍는 결과를 낳을 줄이야…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에서는 쇼핑센터 방문이 전혀 없는 줄 알았다)
갑자기 이화원에 와서는 전과 다르게 급히 서두르기 시작하고, 빨리 관광을 끝내려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러더니 내가 알기로는 대충 보는데도 최소한 한나절이 걸린다는 이화원 관광을 한시간만에 대충 끝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쇼핑센터로 직행.

내가 먼저 가자고 했으니 달리 할 말은 없다만, 속에서는 열불이 난다. 그러더니 내 예상대로 현지인이나 개별여행자들은 절대로 오지 않을, 오로지 패키지들만을 위한 쇼핑센터로 들어간다. 나 역시 차 안에 혼자 남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리긴 하였으나 마뜩지 않은 얼굴로 입장.
온갖 골동품 및 값나가게 생긴 항아리 등을 파는데 대충 봤는데도 가격대가 장난이 아니다. 중국돈으로도 몇 천위안, 몇 만위안짜리들이다. 여행사 관계자에겐 우리 애들이 무슨 갑부집 자제들로 보인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부자로 보였나?)
그런 물건들엔 관심도 없고 당연히 구매력도 없는 우리 애들이 찾은 곳은 매점. 아이스크림만 불티나게 팔린다. 난 내심 너무 안도감이 느껴졌지만 미안한 체 하며 한마디 건넸다.
“아무래도 애들이라 그런지 하드만 먹네요?”

점심은 이번에도 역시 중국식당이다. 뭐 중국에 왔으니 중국식당에 가는 건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지만 겉에서는 별 볼일이 없어뵈는데 안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걸어 올라가도 충분할 한층도 안돼 보이는 높이였지만, 사양치 않고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식당이면 음식 맛으로 승부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여기는 정말로 패키지를 위한 식당이다. 밥 먹고 나면 아가씨가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타서 “한 잔에 천원!”이라 외치며 테이블을 돈다. 미치겠다…

쇼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밥을 먹고 우루루 나온 애들한테 차를 마셔야 한다며 바로 옆의 찻집으로 몰아넣는다. 순진한 우리 학생들은 더러는 이것도 관광인 줄 알고, 또는 나름대로 잔머리를 굴릴 줄 아는 애들은 공짜라니까 좋아서 우루루 입장.
예쁘장하게 생긴 게다가 말솜씨는 청산유수인 조선족 아가씨의 강연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생소한 분위기에 어색해했지만 이내 시간이 지나면서 맛뵈기로 돌려주는 차와 아가씨 말솜씨에 아이들은 금세 녹아들어간다. 아, 돌아버리는구나…
한참을 재미나게 차의 유래와 마시는 법, 효능 등에 관해 설명한 아가씨는 본론을 이야기한다. 한 병을 꾹꾹 눌러서 담아줄테니 120위안씩만 내라는 거다. 물론 4병을 세트로 구입하는 아해들에게는 특별한 선물과 함께 세일을 해준다는 말도 덧붙인다.
처음에는 약간 쭈삣거리며 주저하더니 몇몇이 손을 들자 이내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아우성이다. ‘내가 아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근데 문제는 또 있었다. 대충 절반 정도의 애들이 차를 구입했는데 이 상황에서도 안 사고 버티는 애들에게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애들은 공연히 기가 죽은 채 작은 목소리로 옆 친구에게 ‘안 살 사람은 나가면 안 되나?’ 이러는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선생이 돼 갖고 제자들을 이렇게 내 몰아도 되나?’ 하는 자책이 느껴졌다. 내가 개인자격으로 왔다면 나만 안 사면 그만이겠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지 않는가? 순간 완전히 열 받은 내가 그래도 학생들 앞이라고 점잖음을 유지하려 애쓰며 한마디 했다.
“아가씨! 안 살 사람은 나가도 되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나오자 앞의 아가씨들(전부 4명)은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 중 하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곤란한지 밖으로 나가버린다. 게다가 학생들 중에도 눈치 없는 애들은 ‘선생님이 갑자기 왜 화났지?’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암튼 졸지에 분위기는 썰렁~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쟤네들도 먹고 살겠다고 저러는데 도와주지는 못해도 재를 뿌리면 되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이 여행에 관해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모든 경비는 이미 다 포함되어 있으니 용돈은 200위안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한 내 말만 믿고 왔다가 차를 산 다음에 빈털터리가 되는 애들을 보면 불쌍하기도 하고.
암튼 일단 칼을 뽑았으니 해결은 해야 했다. 다만, ‘아까는 내 얼굴이 너무 무서웠음을 감안해서 요번에는 좀 부드럽게 나가자’고 마음먹고, 다시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일어서면서 말했다.
“아가씨. 하실 말씀 다 했으면 이제 일어나죠 뭐”

그렇게 내 나름대로는 ‘구출’을 해 가지고 나와 보니 내 예상보다 많은 ‘빈털터리’가 발생하여 속상해 죽겠는데, 땡볕에 나와 한참을 기다려도 여행사 관계자, 연맹 관계자, 현지 가이드. 어느 누구 하나 나오는 사람이 없다. (하긴 그들은 지금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성찬을 즐기고 있을텐데…) 암튼 이번에도 여행사에서 온 친구한테는 싫은 소리를 해야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하면 곤란하니까.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며 한참을 기다리니 선물 보따리를 한 손에 또는 양손에 든 친구들이 등장한다. 그 중 아까부터 내가 생각한 여행사 친구를 불렀다.
“이거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됐네요? 아까부터 오늘 일정이 많다고 하더니”
“원래 이런 거 오면 이런 데 들르잖아요.” (역시 이 친구가 눈치는 빠르다만 그런 대답은 나를 더욱 화나게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29만9천원짜리가 아니거든. 제 값을 내고 온 우리한테 ‘원래’라니…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여기서 그런 소리해 봐야 싸움밖에 안 나고, 그럼 다 같이 여행 망가지고. 어차피 궁금한 것만 해결하면 되니까)
“쇼핑센터 방문이 또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사족:
1) 간단하게나마 서태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겠습니다. 그녀는 우리 조선시대 역사에서 문정왕후(명종의 엄마)나 인수대비(성종의 엄마)처럼 수렴청정(垂簾聽政. 왕의 나이가 너무 어릴 때 왕 대신 엄마나 할머니가 대신 정치하는 것)을 했는데 권력의 맛을 들인 후로 욕심이 지나쳐서 아들인 동치 황제를 치맛바람으로 내 몰아 18살에 유흥에 빠져서 죽게 하고, 이후 3살짜리 조카를 황제로 내세우며 섭정을 계속했습니다. 조카인 광서 황제도 성장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되자 옥란당에 가둬버리고 권력을 유지하다가 1908년에 숨을 거두었는데요, 1928년에는 공산당혁명군에 의해 부관참시(무덤을 파내서 시체를 꺼내 다시 죽이는 일)를 당합니다.
2) 이화원이 지금과 같은 관광지로 된 사연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황제(이름=부의)가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황제자리에서 쫓겨나고 이후 생활이 궁핍해지자 새로운 권력자인 원세개(사회책에는 위안스카이라고 나옴)가 이화원을 부의의 사유재산으로 인정해줘서 1914년부터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되었답니다.
3)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의 가슴 아픈 삶은 1988년에 만들어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4) 곤명호를 만들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만수산. 그 이름을 듣는데 갑자기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가 생각나더군요. 시조의 중장이 이렇지 않습니까?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여기서 나오는 만수산이 이화원에 있는 만수산일까요? 제 생각엔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서태후보다는 이방원이 훨씬 더 옛날 사람이거든요. 이화원의 만수산(萬壽山)은 서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는 의미라는군요.
5) ‘쇼핑센터’ 가는 것은 참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애들이 찻값이라고 낸 돈 120위안 중에 가이드의 커미션은 얼마였을까요? 분명히 북경시내에 나가면 똑같은 물건이라도 최소한 커미션만큼은 쌌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는 비싸지요.
그런데 문제가 우리는 단체여행객이고 따라서 일정에 없는 북경시내 쇼핑은 생각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지리도 잘 모르면서 무작정 밤에 나가기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더구나 학생들을 이끌고는 불가능하지요. 이게 바로 딜레마입니다. 그렇다면 똑같은 것을 한국에서 산다면? 당연히 120위안보다는 비싸겠죠. 대충 생각해도 운송료, 관세, 한국 상인의 마진 등이 붙을테니까요. 그럼 가이드가 훌륭한 일은 한 건가요? 커미션을 판매가의 33%인 개 당 40위안만 잡아도 다른 학교 애들을 포함하면 모두 60명인데 세트로 산 애들도 있으니까 40개 팔았다치면 1600위안 떨어졌네요. 근데 식당에서 일하는 중국 애들의 월급이 하루 종일 한 달 꼬박 일하고 800위안이라거든요? 제 계산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겠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고, 암튼 전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기분은 나쁘더라구요. 밖에 나와서 땡볕에서 친구들 기다릴 때 한 학생이 제게 묻더군요. “선생님, 근데 여긴 왜 왔어요?” 걔는 우리반이거든요. 근데 제가 할말이 없었습니다.
6)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다시 기분이 우울해졌지만 그래도 사진은 하나 올립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이화원에서의 단체사진입니다. 아이들 너머로 왼쪽에는 곤명호, 오른쪽에는 만수산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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