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여행하는 법] 6. 모노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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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여행하는 법] 6. 모노가미...

피비 8 4864
2006년 6월 11일.



나일 악어, 아메리칸 두꺼비, 비버, 대부분의 새들...
포유류의 단 3%만이 모노가미 즉 일부일처제라고 한다.
그것은 본능이다.
수컷이 암컷을 처음 본 순간 평생 그 암컷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인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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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나는 치앙마이 시내 지도에 머리를 박은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딱히 어디론가 가야하겠다고 정한 건 아니지만
공원 비슷한 데가 있으면 찾아가보려는 생각이었다.


 
쇼핑몰의 에어컨 바람을 물리치고
치앙마이 탐색에 나선 스스로가 무지 대견하다.
그때 들리는 The Second Language.



"May I help you? Where you wanna go?"



고개를 들고 힐끗 바라 본 지도 너머의 남자.
흐트러진 머리, 정돈 안 된 짙은 눈썹, 헐렁한 자세의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You must be an American."
"Oh, Jesus... How can you know that?"



나홀로집에의 맥컬리컬킨처럼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안으며 놀라는 그.
과장된 몸짓으로 스스로를 점검하며 나에게 연신 “Amazing!" 그런다.



차림새로 알아차린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방인을 돕기 좋아하는 외국인은 내 경험상 항상 미국인이었다. 



래리라고 자기를 소개한 그는
오늘밤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하는 여자친구의 병원 예약을 하러 가는 길이란
다.



“I really like this city. Chiangmai is my favorite place. Do you like Chiangmai?"
"No."



나의 짧은 대답에 그는 깜짝 놀라며 왜라고 묻는다.
나는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원하는데 치앙마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나의 말에 그는 이곳에도 얼마든지 그런 장소가 있다며 날 그곳으로 데려가 준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타이 여자친구 농을 소개시켜 주겠단다.
함께 들어간 병원에서 오늘밤 이스라엘에서 온다는 애인의 검진 예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어리둥절한 나.



“But you said to me your girlfriend... tonight... this hospital...."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



“You... You... You..."



적절한 말을 찾고 있는데 그가 냉큼 말을 뱉는다.



“I love both!”
“You love both?"
"Yes! I love both!"



그와 눈이 마주친 거 같다.



“Ok... I understand... Human being is not monogamous..."



인간은 3%에 속하지 않는다. 일부일처제의 포유류가 아니다.   



내 말에 그는 예의 감탄사, Oh Jesus, Oh my god, Amazing 등의 단어로 요란을 떤다.
래리는 지나치게 행복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붕 떠 있는 상태였다.
함께 있으면 유쾌한 사람, 난 그가 싫지 않았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치앙마이의 청담동, 니만해민 거리의 한 커피숍.
그 곳에서 래리와 나는 그의 타이 여친 농을 기다렸다.



긴 생머리 아담한 36살 농은
치앙마이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한 똑똑한 여자로
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는데 지금은 래리와 함께 사업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실제로 농에게 넌 래리의 secretary라고 물었더니 business partner라고 대답했다.
농의 말에 "And sex partner..."라고 첨부할 만큼 난 무례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으론 이미 한 남자와 두 여자가 한 침대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오늘밤에 오는 이스라엘 여자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때, 래리가 나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오늘밤, 새로운 가족 탄생의 증인이 되어 주지 않겠냐는.
즉 삼자대면을 구경하지 않겠냐는. 



물론. 내 머릿속 threesome이 완성된다면야 기꺼이.



그렇게 저속한 호기심으로 나는 그들의 집까지 방문하게 된다.
니만해민 거리의 월 렌트비 이만오천밧의 이층집 단독 주택은
앞의 정원도 널찍했고 뒤뜰엔 그의 컴퓨터 작업실도 있었다.
농은 샤워를 하고 래리는 이메일을 체크하고 나는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1층엔 벽난로 있는 거실과 주방 그리고 빈방 하나, 2층엔 래리방 농방 그리고 또 하나의 빈방이 있었다.



Welcome to Thailand VIRKA VINJAMIN LEAH



A4 용지 가득 진한 글씨로 위의 것을 출력해 온 래리가
문득 벽난로 앞에 서서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한껏 웃어줬더니 농이 얼른 들어와서는
나에게 그는 기도중이라고 말했다.
유태인 래리의 머리엔 손바닥만한 모자가 올려져 있다.



현관문 앞, 대문 앞, 그리고 경비실 입구 등에 A4 용지를 붙이며
우리는 20시 치앙마이에 도착하는 비르카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빨간 쏭태우를 잡아탔다.



래리와 농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늘 큰소리로 떠들다가
매번 자지러지게 웃는다.



문득 래리가 농의 손을 잡으며 사뭇 진지하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공항에 도착한 비르카와 정열적인 키스를 나눈다.



185cm의 장신 비르카는 그녀를 꼭 닮은 키 큰 소년과
역시 임신 말기의 그녀를 꼭 닮은 복부 비만의 여자아이와 함께 게이트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키스...
나는 농의 눈치를 살핀다.



비르카의 아이들은 모두 다섯명.
함께 온 두 남매 외에 이슬라엘에서 군 복무 중인 두 아들이 따로 있단다.
그리고 뱃속 아기까지.



래리는 자신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아이들을 모두 부양할 거라고 한다.

 

한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 그리고 부속아이들... 이것은 성공적인 결합일까.



래리는 치앙마이에 정착하고 싶다.
집을 사고 차를 몰고 공장을 짓는 게 그의 미래 계획이다.
태국에서 이렇게 살려면 타이 여자와의 법률혼이 필요하다.
비르카는 국적이 각각 다른 다섯 아이의 보호자가 필요하다.
농은 브루네이 남자가 데려간 자신의 어린 아이를 태국으로 데려오고 싶다.



필요가 낳은 사랑. 그런가. 서로 필요하면 사랑하게 되는 걸까.



하루에 하나씩만 소원을 들어주는 바람돌이처럼
인간도 한번에 한사람만 사랑해야 되나.
왜. 하루에 두개씩 소원을 들어주면 배로 행복해 질 텐데...



래리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그는 두 여자를 똑같이 사랑하고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능력이다.
더군다나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단 한 사람도 제 가슴에 담아두지 못하는 애정결핍증에 걸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자리가 도저히 없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래리가 아니다.
두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과연 어떨까...
한 남자를 사이좋게 공유할 수 있을까.



나라면... 인터넷의 위대한 공유 정신을 발휘해...
나만의 ‘그’를 당나귀에 태우고 많은 네티즌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 



며칠 뒤, 래리로부터 부재 중 전화 한통이 왔다.
하지만 난 다시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8 Comments
피비 2006.07.22 12:53  
  주말까지 후다닥 여행기를 쓸 생각이었는데 이제 겨우 치앙마이에 왔네요. 빠이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 생각하니 막막합니다.

무플 방지해 주신 분들  감솨드립니다.--;

오늘도, 아자, 아자, 홧팅!
카모마일 2006.07.22 13:33  
  잘 읽고 있습니다-^^
신디홍 2006.07.22 13:40  
  정말 지루한 주말.. 잘보고있어여..빨랑 올려주세여.. ㅋㅋ 정말 피비땜에..한국 잘들어왓는데...ㅋㅋ 이런 여행기까지..감동 감동..
유유 2006.07.22 13:41  
  뭔가에 이끌리듯이 읽고 있어요...
5편까지 읽고 점심을 먹고와 보니 또 한편을 올리셨군요
한편의 에세이를 읽고 있는것도 같고...  나또한 그여행기속을 헤매 다니고 있습니다...
필리핀 2006.07.23 14:51  
  마르크스는 '가족의 기원'에서
일부일처제는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서 만든 제도라고 썼죠.

태국에는 쓰리썸... 흔합니다.
주로 서양 커플+태국 여성의 조합이죠...
간혹 서양 남 1+태국 여성 2도 있구요...
피비 2006.07.24 01:56  
  흔하다라.

태국...

정말 멋진 나라군요......
아쿠아~ 2006.07.28 21:08  
  중독성 강한 글이네요... ㅎㅎ 아~ 나는 언제쯤 외국인과 대화가 가능할까... ㅋㅋㅋ
자오아소 2006.08.08 12:50  
  유대넘이라는 글 보는 순간 울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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