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오는 길...
못내 아쉬워 자꾸 뒤를 돌아봅니다.
올라갈 때는 아래 강을 따라 올라갔지만, 내려올 때는 위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내려옵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폭포의 모습은 아래와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물이 떨어지며 만든 물안개는 아침 해를 받아 무지개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하늘로 사라집니다.
내려오다 바라보니 이상한 광경이 보였습니다.
더티엔 폭포 베트남 쪽에 하얀 티셔츠를 입은 사내가 아슬아슬한 위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낚시하는 것을 보니 고기맛을 아는 베트남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이쪽 중국 땅에서 또 다른 사내가 폭포 위로 걸어 들어갑니다.
보이세요?
너무 작아 잘 보이지 않으시죠? 숨은 그림찾기입니다.
베트남사람에게 기죽기 싫다는 의사표시인가요?
드디어 물을 건넙니다.
그러면 확대를 해 보겠습니다.
폭포 위로 물을 건너는 사내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 내려오다 쳐다보니 그 사내는 낚싯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격 정말 난해합니다.
왜 저 위험한 곳에 올라가 낚시를 할까요?
너무 멀어서 바지는 확실히 벗었는데 팬티는 입었는지 제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낚싯바늘을 폭포 아래로 던졌습니다.
아마도 고기맛을 제대로 아는 사내로 생각됩니다.
같은 고기라도 비실거리는 고기보다 이렇게 강한 폭포샤워를 한 물고기가 더 힘이 좋고 요리하면
더 맛이 좋아 여기에서 낚시하는 게 아닐까요?
아니면, 폭포를 관리하는 회사로부터 월급 받고 위험한 폭포 위에서 낚시하는 쇼를 보여주기 위한 포퍼먼스?
아니면 행위예술?
좌우지간, 다음에 가면 더 성능 좋은 카메라로 팬티까지 모두 벗었는지 찍어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왜 거기에서 낚시질하여 가던 사람 가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게 낚시질하느냐고 따져봐야겠어요.
한참 내려오다 올려다보니 아직도 낚시질하고 있군요?
이제 보이세요?
사진 가운데 마지막 3단 폭포 위에 서서 낚시하는 사람.
이제 더티엔 폭포 구경을 모두 마쳤습니다.
7시 50분에 시작한 구경이 2시간 40분이 지난 10시 30분에 끝났습니다.
이 인근에 중국정부에서 지정한 1. 2. 3급 풍경구가 4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많은 이 지역이 왜 꾸이린이나 쿤밍처럼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물론 지역적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한 외진 곳에 있지만...
바로 지뢰 때문이랍니다.
이 아름다운 곳이 지뢰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알아봅니다.
佳人이 폭포소리와 협곡에서 길을 잃어 혼미한 상태여서 잠시 다른 길로 빠졌다가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서로 한 곳에서 뱃놀이도 하고 놀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곳이 1979년 2월부터 딱 한 달간 서로 치고받은 곳입니다.
이 아름다운 곳에 인간이 만든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했나요? 왜 인간은 자연에 상처를 남기도 흉터를 만듭니까?
전쟁이 아니더라도 금수강산을 훼손한 것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금강산에 있는 바위가 어버이 수령이 누구인지 알기나 합니까?
백 년도 살지 못하고 들이마신 마지막 숨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가는 인간이 영겁의 세월을 지키며 버텨온 바위에다가...
베트남이 월남전이라고 하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룬 후였습니다.
원래 중국과 베트남은 앙숙관계입니다.
한나라 때부터 1.000여 년간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를 받다가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 처음으로
독립국을 하노이 부근인 호아루(화려:花閭)라는 곳에 세웁니다.
한국 여행사가 하노이에 가면 무조건 가는 코스가 땀꼭이라는 곳인데 그곳에서 배를 타기잔에 들리는 곳이 호아루입니다.
지금 올해로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가 옛 이름인 탕롱(승룡(昇龍)이라는 곳에 수도로 정한지 딱 1.000년 되는 해입니다.
아마도 10월 10일일 겁니다.
중국이 월남전 때 베트남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변심을 하고 베트남으로 밀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번지수가 틀렸지요? 상대기 전쟁의 달인 베트남이 아닙니까?
한나라에 굴복하고 1.000여 년간 숨죽이고 살아왔던 베트남이 중국과의 투쟁에서 독립하고 지금 호아루라는 곳에
새로운 독립국을 세운 후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나시족의 도움으로 바이족의 남조국을 하루 아침에 창산을 넘어
박살을 내고 그 여세를 몰아 베트남으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베트남입니다.
결국, 4차례 침공을 했지만, 그 전쟁에서 원나라는 베트남의 초토화 작전에 말려 식겁하고 패퇴를 합니다.
바로 쩐흥다오라는 걸출한 장수에게 바익당 강에서 궤멸을 당합니다.
몽골의 기마병은 밀림이 우거진 베트남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강화도로 피신하며 버텼지만, 결국, 항복에 준하는 화친을 맺은 원나라가 아닙니까?
베트남은 그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근세에 들어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과 미군과의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세상에 짱짱하다는 나라와 리그전을 치르며 돌아가며 붙은 나라는 세상에 베트남 한 나라뿐일 겁니다.
게다가 모두 마지막 승리는 베트남 몫이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이웃 캄보디아에 농본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이상한 사내인 폴 포트라는 녀석이
캄보디아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200만 명에 가까운 국민을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생깁니다.
한마디로 모든 지식인은 사회악이라고 농사지으라고 모두 시골로 보내는 과정에 생긴 사건입니다.
배운 사람 모두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도 교사가 없어 초등학교 수업과목이 몇 과목 되지 않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베트남은 당시 베트남에 피난 와 있던 현 캄보디아 총리인 훈센을 도와 친 중국을 표방하는 캄보디아로
베트남군을 파병하며 동시에 남베트남에 살며 상권을 휘어잡고 부를 축적한 눈엣가시와도 같은
화교를 정리합니다.
이게 바로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하게 된 이유랍니다.
원래 베트남 중부에 자리 잡고 있던 참파 왕국과 캄보디아의 시엠립에 근거를 둔 앙코르 제국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1.000여 년 가까운 기간 싸운 적이 있어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베트남 사람이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 듯 중국을 싫어하고 캄보디아 사람은 베트남을 싫어합니다.
가장 가까워야 될 이웃이 웬수랍니다.
그런데 중국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태클을 걸고 들어옵니다.
그게 바로 1979년 일어난 중월전쟁의 원인입니다만,
사실을 대국화로 기지개를 켜는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견제구입니다.
친 러시아를 표방하는 베트남을 손 봐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견제구는 견제만 해야 하는데 욕심부린 견제구는 결승점을 내주기도 하더군요.
결과적으로 중국은 창피만 당하고 한 달 만에 전쟁을 거둡니다.
명분은 목적을 달성했다였지만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 창피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결과, 중국은 스스로 중국군의 현실에 놀라자빠졌으며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 모두는 창피하다고 하는데 중국만 날아오는 창을 피한다는 의미로 '창 피하다'라고 결론 내린 엽기적인 전쟁입니다.
이때 뿌려놓은 지뢰를 20년 만에 제거작업을 하며 이렇게 관광지로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이 꾸이린만큼 아름다운 곳이지만 관광지로서는 늦게 기지개를 켜게 됩니다.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베트남과의 변경에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요.
같은 폭포이지만 베트남에 슬쩍 걸친 곳의 이름은 반죡 폭포(板約 :Thac Ban Gioc)라고 부릅니다.
같은 물이 흘러 떨어질 때 잠시 헤어졌다, 만나니까 별꼴이 반쪽이라고 하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우리 부부도 처음에는 베트남 하노이로 들어가 까오방으로 가서 지금 건너편에 보이는 저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려고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베트남에서 이 폭포를 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이 폭포를 빌려준다면 중국 쪽에 있는 더티엔보다 더 멋지게 만들어 놓을 텐데 말입니다.
아래 사진은 1979년 중월전쟁 시 중국군 수첩으로 베트남 침공 때 베트남군과의 간단한 의사소통을 위한
교육내용을 적어놓은 것입니다.(더티엔을 가기 위해 자료를 모으던 중 발견하고 모셔온 사진)
내용은 당연히 100% 중국군이 이기고 베트남군은 포로가 되는 내용입니다만,
중국군의 손실이 베트남군의 5배에 달했다는 웃기지도 않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이곳 더티엔 폭포의 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하다가 어느 사이트에서 발견한 사진입니다.
이것도 몇 장 잠시 모셔왔습니다.
아래 사진은 중월전쟁 당시 노산 전투에서 사살된 베트남 여전사의 품에서 발견된 사진입니다.
아마도 아이를 키우던 어린 신부였던 모양입니다.
1984年 名越军女兵向自己的孩子告别。在我军收复老山的战斗中,这名女兵被击毙,该照片即是从其身上起获.
1984년 이 월남 여병사는 자신의 품속에 이 아이와 이별하여 전투에 참가하여 사망.
그녀의 품 속에서 발견한 그녀와 아이의 사진. 치열한 노산 전투.
이 아이는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照片上的两个女兵(越南人民军战斗英雄)曾在84年潜入我边境,后被我捕获,并在其上衣口袋中搜出这张照片.
월남 특공대 아가씨 체포하고 심문 중 그녀의 윗도리 주머니에서 발견된 자신과 동료의 사진.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군요...
越军战斗英雄受到亲友们的热烈欢迎,但是他们所谓的战斗英雄应该双手沾满了我们子弟兵的鲜血!
월남 전투 영웅을 친지들이 환영하고 있지만,
이들이 영웅이 되기 위해 그들의 손에 우리(중국) 젊은이들의 피가 얼마나 뿌려졌을까!
전쟁은 누가 일으켰나요?
越 军 家 属 到 驻 扎在中越边 境的越 军 部 队 里 看 望 自 己 亲人.
중월변경 전쟁 시 군인들이 그들 가족을 데리고 돌보는 장면.
부부 사이인지 연인관계인지 어찌 알고 그런 답니까?
传说中凶狠残忍的越军女子特工队!.
전설적이고 악질적(?)인 월남 여자 특공대!.
과연 이 사진 속의 인물 중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요?
헤르만 헤세의 말입니다.
"사랑은 증오보다 고귀하고, 이해는 분노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
오늘은 우울한 이야기만 했나 봅니다.
봉쥬르 베트남이라는 노래나 들어봅시다.
아름다운 베트남의 풍광이 그려진 뮤직 비디오입니다.
예전에 모 TV에서 방영한 베트남 사돈 만나는 프로그램에서 사용된 음악일 겁니다.
우리도 6.25를 겪은 나라로 전쟁의 참상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요.
이 아름다운 곳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왜 싸웁니까?
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지금까지 대부분 침략만 당하고 살아온 민족입니다.
강대국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눈물과 땀과 피로 나라를 지켰습니다.
비록 오욕과 찬탈로 점철되어 왔지만, 나라를 마지막까지 지켜내 후손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마 우리와 비슷한 환경에서 생존했기에 더 정감이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가다가 밥 먹고 밍쉬티엔위엔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원래 투어에 포함된 곳이 아니라 가이드가 버스 안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노력하여 판매한 덕분에
일행의 2/3가 옵션으로 선택한 곳입니다.
덕분에 버스가 그곳으로 둘러가기에 나머지 사람과 영문도 모르는 우리 부부는 얼떨결에 따라간 곳이었습니다.
헐~ 그곳도 세외도원이랍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좋은 친구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는 일이 더 빠르고 행복합니다.
그보다 그보다도 더 빠른 일은 전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집어삼키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분가하겠다고 하면 한 방 쥐어 박으며 "우리가 남이가!"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국내문제라고 우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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