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같이 살아가며 언제나 한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때로는 미워도 하고 어떤 때는 일부러 더 밉게 보이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서로가 자신을 버려야 미움이 사라지는 데 그러지 못할 때가 잦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나 자신과 같이 생각하는데 사실은 다른 사람입니다.
무조건 상대는 내 생각에 동조하고 내 행동을 모두 이해해야만 하는 데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못합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요?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런 말 속에는 상대는 내 행동이나 생각을 무조건 100% 이해해야 한다는 욕심이 강한 말입니다.
아무리 오랜세월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서로는 분명히 다른 인격체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잉꼬부부라도 상대를 내 몸과 마음과는 다른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잠시 내 마음에서 놓아주어야 합니다.
나는 상대를 바라보며 나를 이해하라고 하면서 나는 상대를 이해하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빈 구석을 채워주어야 하는 데 나의 부족한 곳만 채우라고 하고 채운 쪽만 계속 채우려다 보니까
자꾸만 서로 간의 넘치는 게 생겨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어느 쪽에 빈 곳이 있나를 살피며 살아가는 게 부부 사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랑은 채우는 일만이 아니고 때로는 넘쳐나는 것을 비우며 살아가야 하나 봅니다.
아... 사랑이란 너무 어렵습니다.
학을 탄 도인의 모습이 멋집니다.
만수궁이 도교사원인가 봅니다.
도인들이 문 위에 매달려 유혹하고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천주교도들이 자기 땅에서 민속 행사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은 관가를 찾아가게 되고
칭엔의 주둔 사령관인 자오궈슈가 마을사람의 주장에 동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관리를 보내 수도원을 훼손했고, 구이저우 제독 티엔싱슈도 장원란 등 천주교 수사 5명을 죽여버립니다.
이러면 막가자는 것이지요.
사태가 커지고 프랑스 공사는 강력하게 항의하게 됩니다.
원래 사건은 작은 일에서 생기나 그 터지는 힘은 막강합니다.
마을에 작은 일이 결국 나라 사이에 문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결국, 은화 1만 2000냥을 배상하고, 티엔싱슈은 신장으로 전보 조치 되었다고 하네요.
자오궈슈도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돼 중징계, 재판을 받던 중 사망하게 됩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수모를 당해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도 다른 민족이 힘으로 강제점령한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얼굴 모습이 다르고 말이 다른 데 어찌 같은 나라라고 우기십니까?
만약 그 땅을 모두 돌려준다면 큰 나라라고 하는 어떤 나라는 지금 국토의 1/3로 줄어들어 그저 그런 나라로 살아가겠지요.
사실 언어가 다르고 얼굴 생김새나 민족이 다르면 같은 나라가 아니잖아요?
그런 나라가 세상의 문명국이고 세상의 진리를 자기들 관습과 이익으로만 이야기 합니다.
칭옌구전은 명나라 시절의 남방을 정벌하고 제압하기 위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생긴 군사 주둔지적 성격이 강한 마을입니다.
그러다가 17세기 초반 이 지역의 소수민족 자치의 우두머리(土司)였던 부이족(布依族) 반린귀(班麟貴)가 1km 거리에 토성을
쌓았고 이 두 곳이 오늘날의 칭옌꾸전(靑岩古鎭)이 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역시 그랬군요?
부이족... 우리가 지나 온 여행지에 부이족이 사는 마을을 지나쳤잖아요?
그 마을에는 모두 돌을 황금보기로 여기고 돌로 집을 지었던 모습, 그리고 돌에 환장한 민족인 부이족...
돌에 관한 전문민족인 부이족이라 이곳 푸른 돌이 생산되는 지역이니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이렇게 돌로 성도 쌓고
집도 짓고, 그리고 골목도 모두 돌로 만들었나 봅니다.
이후에 수없이 개보수되면서 흙으로 만든 성(土城)이 돌로 만든 성(石城)으로 변해온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 남아 있는 옛 칭옌꾸전은 도로 바닥이나 담장이나 모두 돌이고 성벽도 당연히 돌이고 집도 돌로 지은 것이겠지요.
좌우지간, 뭐든 돌로 지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긴 세월, 아픈 사연을 안고 사교합일의 다종교 마을로 진화한 곳이 바로 청암고진입니다.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가 공존하는 마을인 게지요.
정말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사찰과 묘당에는 향불이 끊이지 않고,
일요일이면 천주교와 예배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고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북문인 북성문에서 시작하든, 남쪽의 정광문에서 시작하든 사통팔달 이어지는 돌길을 걷다 보면
옛 마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영상사, 문창각, 만수궁과 장원부 등 많은 오래된 건축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잠시만 걸어가면 끝이 나오고 다시 돌아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종교시설이 보입니다.
골목마다 다른 신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살려면 무조건 착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는 언제 어느 신에게 걸려 경을 칠른지 모르니까요.
일찌감치 공존의 아름다움을 알고 오늘날까지 대대손손 살아오고 있는 옛 마을입니다.
원래 이 지역은 옛날 야랑국이라는 나라의 땅이었다고 하네요.
야랑(夜郞)이란 두 글자가 상호 간판이 간혹 보이기도 합니다.
문창각이라는 건물인데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주전자는 모습이 어디에서 많이 본 모습입니다.
예전에 우리 아이들이 자주 보던 만화영화인 '시간 탐험대'인가요?
맞아요!!!
그 영화에 나오던 '돈데크만'인가 하는 주전자가 아닙니까?
얘네들이 왜 여기까지 왔지요?
칭옌의 주전자는 모두 모양이 돈데크만입니다.
그런데 왜 주전자를 길 한복판에 내놓고 물을 끓입니까?
혹시 사람이 지나다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날 일이 아닐까요?
이 동네 주전자는 모두 길 가운데로 나와 있습니다.
돈데크만~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못 된다.
어여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칭옌꾸전에는 몇 가지 유명한 음식이 있다는데 그중에 하나가 족발이라고 합니다.
佳人은 족발이 먹고 싶었지만, 요즈음 채식을 한다는 마눌님 때문에 침만 꿀꺽...
이런 조용한 마을에 대단한 일이 생깁니다.
바로 홍정장원(紅頂狀元)이 탄생한 일입니다.
이 홍정장원이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일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청나라 광서황제 때 이곳 칭옌 출신의 조씨 집안의 꿈동이 중 둘째인 자오이싱(조이형:趙以炯)과
넷째인 자오이구이(조이규:趙以奎) 형제가 동시에 베이징에서 시행된 과거시험에 형은 장원으로 급제하고 동생은 진사가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와우! 경사났습니다.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모야 당연히 마을 잔치라도 하고 싶지만, 첫째와 셋째가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무리 같은 형제라도 이렇게 공부 잘하는 형제가 있으면 다른 형제는 스트레스를 받아 원형탈모증까지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비는 행복해도 행복한 표정을 함부로 지을 수 없어 아무도 없는 곳에 가 "언빌리버블~"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을 겝니다.
여러 자식 중 한 녀석만 잘 되면 사내로 태어나 화장실에 들어가 혼자 낄낄거리며 웃어야 할 101가지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때 마침 황후 책봉이 있었는데 책봉서를 읽는 장원의 모자에 달린 구슬이 흰색이라서 잘 보이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아
그해만은 붉은색으로 임시 변경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일한 홍정장원이 태어난 사연입니다.
조이형은 중국의 명나라 때부터 시행한 과거시험에 중국 서남지역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장원에 급제한 사람이라는군요.
정말 똑똑한 친구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의 집은 이렇게 장원했다는 집으로 오래도록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조씨 집안의 자손들이 성장해 이름을 떨치게 되며 일약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이로써 조씨 가문에는 아래 사진처럼 글에서는 뛰어났다는 의미인 문괴(文魁)란 편액이 내걸렸고,
지금도 장원부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청암의 희망이며 꿈동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말을 타고 바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走馬門으로 문을 상당히 높게 만들었습니다.
서안에 가면 이슬람거리에 고악송이라는 사람의 고가가 있습니다.
그 사람도 장원이 아닌 차석에 해당되는 방안급제를 했는데도 상인방에 방안급제(榜眼及第)라는 편액을 걸어두었더군요.
그뿐 아니라 佳人이 처음 찾았던 양메이 꾸전에는 겨우 지방에서 치러진 향시인 거인(擧人)에 합격했는데도 대문 상인방에
거인이라는 편액을 걸어 자랑했는데 황제앞에서 장원과 진사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사건입니다.
아주 오랜 시절 군사기지로서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칭옌꾸전은 이렇게 역사적인 공간으로 발전합니다.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돌로 지어진 마을로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태평군의 맹렬한 공격으로부터 구이양시를 지켜냈으며
수많은 외부 세력의 침입에도 굳건히 자기를 지켜온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명나라 시대 유명한 지리학자며 여행객인 쉬샤커... 본명은 홍차오(굉조:宏朝)였다나요?
또 이곳에 다녀갔으며 한마디 했겠지요.
그는 이곳을 "칭옌은 남중국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로고..."라고 묘사하기도 했답니다.
항상 저보다 먼저 다녀갔습니다.
애비 잘 만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여행으로 세월을 보낸 쉬샤커가 오늘은 무척 부럽습니다.
쉬샤커도 사실은 병약해 어머니의 권유로 여행을 시작했다고 했던가요?
결혼시켜놓고 어미는 아들에게 여행을 권했다니 며느리 입장에서는 시어머니가 웬수...
이름에서부터 뭔가 차별화 냄새가 풍기는 쉬샤커(서하객:徐霞客)는 풍류객이었던 모양입니다.
서서이 지는 노을을 찾아 떠도는 객이라는 말인가요?
결국, 그는 여행 중에 숨을 거두었다고 하니 진정 행복한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숨을 거두는 일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그는 다녀 간 모든 곳을 글로 남겼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여행 블로거라고 해야 되나요?
책으로 내지 않고 佳人처럼 혼자만 간직한 여행기였으니까 말입니다.
후일 그의 아들이 아버지가 남긴 글을 모아 두어 세상에 남겼다고 합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