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은 공연장 뒤를 지나는 큰길가에 있기에 찾기 무지하게 쉽습니다.
오늘은 박물관 구경부터 합니다.
이곳만 둘러보아도 대강 먀오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먀오족과 시지앙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은 알아야 돌아다니는 데 도음이 되지 않겠어요?
사실 몰라도 여행일정이 바뀌거나 인생이 달라질 일도 없습니다.
박물관에 도착해 들어가려는데 입장을 저지합니다.
문표를 보자고 하네요.
그런데 아까 가방을 방에 내려놓으며 문표까지 그 가방에 넣어두고....
어쩝니까?
사정해야죠.
이런 사진은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佳人도 다 압니다.
맷돌이며 물동이는 어느 나라나 모두 사용하던 생활도구잖아요.
사실 이 마을 안에 들어온 외부인이 문표를 사지 않고 들어오기란 산 넘고 또 산을 넘고 해야 할 겁니다.
시지앙 치엔후먀오짜이는 외부와 열린 공간이 카이리에서 들어오는 새로 만든 길과 예전 길인 레이산에서 들어오는 길
두 곳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처럼 한눈에 관광객임이 드러나는 차림으로 그냥 들어올 수 있겠어요?
그래서 표를 방에 두고 왔다고 말하자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대한민국이지요.
그러자 예쁜 아가씨는 웃으며 그냥 들어가랍니다.
원래 처음 대문을 들어올 때 산 표가 없으면, 박물관 문표를 다시 사야 한다는데...
佳人의 얼굴에서 아마도 봉황의 氣를 느낀 모양입니다.
함부로 천기누설하면 안 된다고요?
아니라구요? 지금 비웃고 계시죠?
박물관은 모두 11개의 방으로 나누어졌고 각 방에는 먀오족의 역사, 신앙, 생활도구, 농사나 수렵에 관한 도구, 악기
띠아오자오로우(조각루:弔脚樓)라는 집의 모형도 있고 음식문화, 약초에 관한 것, 먀오족의 가장 볼만하고 화려한
복장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기에 박물관만 돌아보면 대강 먀오족을 알 수 있습니다.
조각루에 대한 모형이군요?
비탈에 집을 지어야 하기에 좁은 비탈을 더 넓게 쓰기 위한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2-3층으로 지어 1층은 가축의 축사로 2층은 주거공간으로 집 대부분이 2층으로 직접 드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층은 창고나 곡식 건조대로 사용합니다.
사실 조각루는 먀오족만의 전통은 아닌 듯합니다.
워낙 이근방에는 삼나무가 잘 자라고 무성해 그 나무를 이용해 이런 다리가 긴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부이족은 봉우리가 많은 동네에 사니 돌로 집을 지었고요.
푸저헤이에서는 황토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황토집에서 살았거든요.
그리고 원래 조각루란 봉황 고성처럼 물 위에 집을 지을 때 습기를 막기 위해 물과의 공간을 두려고 만든 게 원조라고 하네요.
은으로 만든 화려한 이 은화관은 값어치가 나가게 보입니다.
먀오족만이 한다는 은으로 장식품 만들어 여인네가 보관하는 일은 그동안 얼마나 피해 다니고 쫓겨 다녔으면
이런 패물로 만들어었을까요?
여차하면 산속으로 튀어버립니다.
이런 슬픈 역사를 지닌 민족의 재산 보관 방법이 지금 황금알을 낳는 먀오족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은장식을 합치면 9kg이 넘는다 합니다.
슬픈 역사가 아름답게 탈바꿈을 했네요.
루성이라는 대나무로 만든 악기입니다.
이것도 이 부근에 사는 대부분의 소수 민족이 모두 가지고 있는 악기입니다.
소리는 아주 맑고 고음이 무척 잘 나는 악기입니다.
북이나 구리로 만든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북이란 악기는 어느 한나라만의 악기가 아닙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남미에서도 모든 세계인이 전부 연주하는 악기가 북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난해한 작품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산으로 피난 가기 위해 만든 작품입니까?
설명이 없어 산속에서 어디에서 배를 탄다는 말인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곡식 건조대도 보입니다.
조각루 집을 돌아다니다 보면 3충 난간에 모두 옥수수를 걸어 놓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오면 됩니다.
이제부터 먀오족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위아래 흉상이 시지앙 먀오족의 시조라고 합니다.
그러니 다른 지역의 먀오족 시조는 아닌 모양입니다.
먀오족은 단풍나무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나 모두 조상이 인간인 곳은 없어도 나무의 자손이라...
드디어 치우의 얼굴이 보입니다.
먀오족의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3000천여 년 전 탁록대전에서 아버지 치우천황이 한족의 황제 헌원에게 패하자
셋째 아들은 먀오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답니다.
우리의 환단고기에서는 오히려 치우가 헌원에게 승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치우는 전쟁에서 패한 후 목이 잘리고 치우의 발과 손을 묶었던 수갑과 차꼬(기다란 나무에 구멍을 뚫어 그 사이에
다리를 넣어 자물쇠로 채웠던 형틀)에 묻은 피에서 치우의 한이 서려 치우의 피보다 더 붉은 단풍나무가 자라났다는
이야기에서 먀오족은 단풍나무를 신성하게 여긴다고 하네요.
위의 사진에 가운데 인물이 치우의 모습이고 오른쪽에 쓰인 글자가 치우로부터 1732년 285대의 후손의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족보인 셈입니다.
청나라 때 그때까지 먀오족이 사용했던 이름을 버리고 중원에서 사용하던 候, 楊, 宋, 梁 등 성을 사용하여 다른 조상처럼
생각되지만, 그 전까지는 모두 한 조상의 자손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합니다.
자손의 이름을 정하는데 자연부명(子連父名)이라는 제도로 정했다 합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재미있는 일정한 법칙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눈치 빠르신 분은 이미 알아차리셨네요.
子連父名이란 아버지 이름의 첫자를 아들의 이름 끝자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예를 들면 홍길동의 아들은 이름의 끝자에 아버지의 홍을 넣어 아들홍이 되고 다시 그 자식은 아버지의 이름 첫자인
아라는 글자를 이름 끝에 넣어 이놈아가 되는 법칙입니다.
이놈아는 다시 요놈이 - 미워요가 되며 청나라가 개명하라고 할 때까지 285대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도 창씨개명이라는 개같은 경우를 겪었잖아요.
어쩌면 먀오족도 우리와 같은 아픈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민족인 듯합니다.
이 지역은 옛 야랑국(夜郞)이었으며 이곳에 뿌리를 두고 가장 많이 살아가는 먀오(苗)족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니 아마도 우리와 같은 뿌리를 지녔을지도 모르는 곳을 향하여 여행중입니다.
누가 압니까?
오랜 옛날 우리의 사촌들이었을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전설을 찾아 가을에 떠났습니다.
치우천황은 전쟁의 신이라고 알려졌습니다.
한족의 원류라고 하는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마지막 전투에 임하기 전 치우천황에게 제를 올렸고
그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중원을 통일하여 한나라를 세웠다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미루어보아 한족도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인정하나 봅니다.
초패왕 항우도 결국 유방에게 진 이유가 치우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서란 말인가?
위 지도가 바로 먀오족 고난의 발자취입니다.
징그럽도록 쫓기도 피신하며 5천 년을 견디었습니다.
먀오족의 삶... 정말 징그럽도록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치우는 우리나라에서는 도깨비의 형상으로 잡귀를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아주 오래전 중원은 치우천황이 다스리는 구려(九黎)부락과 한족의 조상이라고 우기는 황제(黃帝:왕의 의미인 皇帝가 아닙니다.)
헌원이 세상을 놓고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되고 이 전투에서 패한 구려부락민은 살아남은 부락민이 남쪽으로 이주한 것이
지금의 먀오족(苗族)이고, 동북으로 간 것이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투를 탁록대전이라고 한다지요?
탁록은 지금 북경의 서북쪽부근이라고 합니다.
좌우지간, 중국이나 우리나 치우를 전쟁의 신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탁록대전에 관한 그림이 시지앙의 박물관에 걸려 있습니다.
그런데 소를 타고 전투에 임했네요.
농경시대의 소란 정말 중요한 동물이지요.
힌두교에서 최고의 신이라는 시바 신도 전용 자가용이 난디라는 소입니다.
난디를 타고 다니는 시바신을 한 번 보고 갈까요?
뒤에는 마누라인 히말라야의 딸이라는 파르바티 여신을 태우고 팔자좋게 놀러 다니는 부조입니다.
사실 하늘을 나는 멋진 '가루다'도 있고 폼나게 머리 셋 달린 코끼리인 '아이라바타'도 있습니다.
10기통 이상 좋은 게 너무나도 많은데 왜 최고의 신이 겨우 1기통짜리 소를 타고 다녔을까요?
농경사회에서는 소만큼 중요한 동물이 없어서가 아닐까요?
인도의 힌두교 신자들이 소고기를 먹지않고 소를 숭배하는 이유가 바로 시바 신의 영물이라서가 아닐까요?
시바신이 난디를 타고있는 장면 바로 아래 뭐가 보이시나요?
도깨비 형상인 치우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깔라라는 걸신입니다.
맨날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깔라에게 시바가 "그럼 네 몸을 먹어라."라고 하니 깔라는 시바의 말을 그대로 듣고
자기 몸을 모두 먹었답니다.
뭐 사실 걸신인 깔라는 배가 고파 얼굴만 남기고 자기 몸을 죄다 뜯어먹은 꼴통신입니다.
그래도 시바 입장에서 자기 말을 그대로 시행하는 깔라가 귀여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전의 출입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만들었고 문틀 위를 보면 오늘도 뭐 먹을게 없을까 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순전히 눈과 입만 가지고 있는 걸신입니다.
탁록대전에 패한 치우는 목이 잘리고 그를 따르던 사람은 황하를 건너서 남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위의 그림이 바로 황하를 건너 남으로 내려오는 먀오족을 그린 그림입니다.
엄동설한 북풍마저 몰아치는데 누가 먀오족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애는 젖달라고 삑삑 울지요. 큰놈은 춥다고 칭얼대지요.
아무도 모릅니다. 먀오인의 가슴에 든 피멍을...
왜 이리 먀오족은 마음을 아프게 하는꼬야~
어느 학자는 먀오족의 뿌리는 고구려 유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그 볼모로 붙잡혀간 유민이 남으로 내려오며 정착하여 만들어진 뿌리가 먀오족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가장 오랜시간 중원과 대립했고 수없이 정벌되는 아픔을 겪었나요?
고조선의 수도가 지금 북경 부근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고조선의 후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마음이 끌리는 민족이 먀오족입니다.
위 사진은 눈발이 날리는 추위를 무릅쓰고 레이공산으로 숨어드는 먀오족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후 먀오족은 여러 차례 한족의 토벌과 전란으로 점차 남하하여 지금의 레이공산(雷公山)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답니다. (레이공산은 시지앙의 동남쪽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주변에만도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600여 개의 먀오족 마을이 하늘에 수많은 별이 점점이 박혀있듯이
골짜기마다 능선마다 알알이 박혀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비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먀오족의 사정을 누가 안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전형적인 달동네에 해당하겠지만, 먀오족에게는 신도시입니다.
"흰 구름 지나가는 깊은 곳에 어느 한 곳 치우천황의 후손이 아닌 곳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먀오족 세상입니다.
어디 흰 구름 지나가는 곳만 그렇겠습니까?
하늬바람 불어 지나가는 골짜기에도.... 흰 눈 쌓이는 골짜기마다 먀오족이 터를 잡고 살아갑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겠습니까?
어느 민족이 먀오족의 고난을 어루만져주겠습니까?
청나라 시절에도 이곳 시지앙까지 청군이 밀어닥쳐 위의 그림처럼 마을을 불까지 질러 버린 사건도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이곳 골짜기까지 많은 군사를 몰고 내려와 이런 만행을 저지른답니까?
마지막까지 중원에 대항하며 가장 조직적으로 대항한 민족이 먀오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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