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여행 24일째
아침에 일어나 옆에 있는 버스터미널에서 9시 출발하는 띠핑(지평:地平)행 버스를 탑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띠핑이 아니고 가는 도중 자오싱에서 내리면 됩니다.
자오싱까지는 18원/1인입니다.
위 사진은 자오싱 마을로 들어가는 대문 베이짜이먼(북채문:北寨門)이라는 동향제일채(侗鄕第一寨)입니다.
자오싱의 중요성은 많은 동족마을 중 동족이 제일 먼저 뿌리를 내린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동향 제일채라는 말을 겁도없이 사용하는가 봅니다.
전혀 보호 관리를 하지 않아 마치 흉갓집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입니다.
자오싱은 첫인상부터 우리를 실망하게 합니다.
리핑 터미널에서 버스표를 개찰하던 복무공작원이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 직접 우리가 타고 갈 버스까지 안내해 줍니다.
우리 부부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버스 안내양에게 뭐라고 하며 우리 부부를 부탁합니다.
아마도 버스가 종점이 자오싱이 아니고 띠핑이라서 자오싱에 도착하면 우리 부부를 잊지 말고 내려주라고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왜 이렇게 친절한 겝니까? 환장하겠습니다.
그저께도 이름도 가물거리는 유핑이라는 마을에서 표를 팔던 공작원이 매표를 중단하고 돌아 나와 우리 부부가 탈 버스까지
안내하고 운전자에게 첸콩이라는 곳에서 달리는 버스를 세워 우리 부부가 티엔주까지 무사히 가게 도와주었습니다.
여행 중에만 느낄 수 있는 고마움을 만끽하고 다닙니다.
리핑에서 자오싱까지는 도로사정이 좋은 편입니다.
거리는 68km이지만 시간은 3시간 걸려 12시에 도착했습니다.
역시 버스 안내양은 우리 부부를 챙겨주며 자오싱이라고 내리라 합니다.
자오싱으로 오는 길에는 동족이 모여 사는 마을이 무척 많이 보입니다.
대부분 고루가 마을 가운데 솟아있고 풍우교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자오싱의 첫인상은 작고 무척 어수선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마을처럼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단장하고 가꾼 모습이 아니라 그냥 관심조차 없는 그런 마을처럼 보였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런 자연적인 모습이 더 좋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가꾸지 않아 지저분하고 냄새까지 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인가요?
그러나 서양인이 가끔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제법 알려진 곳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버스 내리는 곳에 삐끼가 있어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됩니다.
중앙 도로에서 골목길로 들어가더니만 개천 길을 따라 걷습니다.
동가 목루여관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군요.
숙소는 비수기라 50원 부르기에 야진도 없이 35원에 묵기로 합니다.
워낙 관광객이 없어 그 여관은 우리 부부만 묵었습니다.
삼나무로 지은 전통가옥의 여관으로 약간 좁으나 깨끗하게 관리했기에 짐을 풀었습니다.
이제부터 자오싱을 모두 벗겨 보여드리겠습니다.
숙소는 큰길 쪽이 조금 비싸고 개천 길로 들어와 개천을 따라 많은 숙소가 있어 그곳이 조금 싸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드나드는 길이 사진처럼 무척 좁아 혹시 밤에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면 개천에 빠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찾아온 자오싱이라는 마을도 동족의 마을이지만, 다른 마을과 많이 다릅니다.
우선 제일 먼저 동족이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형성해 살아온 곳으로 동족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윈난성 따리가 바이족의 고향이고 리지앙이 나시족의 본거지며 시지앙을 먀오족이 고향처럼 생각하듯
이곳 자오싱은 동족의 고향이고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는 어느 마을이나 도착하면 우선 동서남북부터 먼저 살핍니다.
이렇게 위치 파악이 되면 돌아다니며 보아야 할 곳과 지나칠 곳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마을은 서쪽만 열려 있고 동,남,북으로 산이 있고 동서로 길게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입니다.
우리 부부가 온 곳이 왼편 위에 보이는 리핑이라는 곳이며 가야 할 곳은 오른쪽 위에 보이는 탕안 방향으로 나가게 됩니다.
마을 지도를 보시면 왜 자오싱이 고루지향(鼓樓之鄕)이라고 하는지 아시겠죠?
다섯 개나 있습니다. 물론 풍우교라는 화교(花橋)도 세트로 다섯 개입니다.
오른쪽 3개는 화교는 고루가 가까이 있어 쉽게 알 수 있지만, 왼쪽에 있는 고루 두 개는 화교와 많이 떨어져 있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고루만 확인하지 화교는 보지 못하고 갈 수 있습니다.
강을 중심으로 북쪽에 두 개, 남쪽으로 3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을을 남북으로 나누는 강입니다.
강이라기보다 개천입니다.
이 개천이 옛날에는 자오싱의 상징이고 자오싱을 먹여 살린 젓줄이었겠지만,
지금은 오염으로 관광객을 쫓아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풍우교라는 화교는 모두 이 개천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오싱에서는 풍우교라는 말 대신 화치아오(화교:花橋)라고 부릅니다.
꽃 다리라는 이름이 사실 더 예쁩니다.
우선 이투안(의단:义團)이라는 고루부터 살펴봅니다.
11층으로 되어 있고 23.36m의 높이를 지닌 고루입니다.
1.2층은 4각의 형태이고 3층 이상은 8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루는 마을의 행운과 융성을 기원하고 휴식이나 사교, 손님접대를 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중화굴기(中華崛起)라고라?
뭐가 벌떡 일어날까요?
벌떡 일어나다 거미줄에 목이 걸려 중화(中華)는 중화(中禍)가 되고 굴기(崛起)는 굴욕(屈辱)이 되겠습니다.
거미줄이나 좀 제거하시지요.
이런 모습이 바로 우리 부부를 실망하게 한 자오싱의 현주소입니다.
이투안 고루 뒤로는 오페라 스테이지라고 이름 지어진 공연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비수기인가 공연이 없었습니다.
고루는 하나의 혈족으로 된 동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곳 자오싱은 모두 다섯 개의 고루가 있으니 모두 다섯 혈족이 한마을에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왜 자오싱에서는 풍우교라는 말 대신 화교(花橋)라고 부르는지 알겠습니다.
풍우교라는 다리 안에는 위의 사진처럼 조금은 촌스럽지만,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수준은 아주 소박하고 순박하고 자연스럽고 전혀 전문가답지 못하고....
그래도 여기 이투안(의단:义團) 화교에 있는 그림 중에 佳人의 시선을 끌게 한 그림이 있어 소개합니다.
바로 위 사진에 있는 그림입니다.
왼편 상단에 대전봉황산(大戰鳳凰山)이라는 글이 있고 그 아래 당조정동(唐朝征東)이라는 글이 있지요?
이 말은 당나라가 동쪽 즉, 고구려 원정길에 나선 일과 봉황산에서의 전투장면을 그린 겁니다.
왼쪽에 있는 장수 이름이 설인귀의 부하였던 주청(周靑)이고 그 오른편에 설인귀(薛仁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장수가 보이고 그 위에 개소문(蓋蘇文)이라고 적혀 있으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하는 이야기로 설인귀와 연개소문의 이야기에 당태종 이세민이가 봉황산에서 연개소문에 쫓겨 식겁하고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짠~ 하고 나타나 구해준다는 이야기와 관련된
고사를 그림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여기서 연개소문은 홍포(紅袍)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설인귀의 등장으로 이세민은 목숨을 간신히 건져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어디에 숨었는지 그림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설인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란계가 아니고 신라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나중에 신라와의 해전에서 금강하구 기벌포에서 신라장수 시득(施得)에게 참패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시득은 겨우 100여 척의 배로 당과의 해전에서 첫 전투에서 패했으나 나머지 전투를 모두 이겨 23전 22승 1패를 거두고
당나라 군사 4.000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네요.
이 마지막 전투로 인해 당나라는 신라마저 삼키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고구려 유민이 힘을 합쳐 당군에 많은 타격을 입혔으며 토번의 손첸감포의 강력한 군대가 서쪽에서 당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어 강력했다던 당나라도 동서로 나뉘어 전투를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 손첸감포가 당과의 전투는 " 왔노라! 쓸어버렸노라~ 공주하나 보내줄껴? 말껴~" 하며 칭얼대던 전투였지요?
이때 한 번 세게 붙어 토번이 중원을 먹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저 공주도 아닌 공주하나 며느리감으로 보내주는 바람에 돌아갔다 하던가요?
삶이란 바람에 날리는 먼지인가요?
자오싱 동족마을에서도 우리와 관련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투안에서 개천을 따라 상류 방향인 동쪽으로 갑니다.
제일 오른쪽에 있는 고루와 화교가 런투안(仁團)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자오싱에 있는 고루는 모두 높이나 모양이 다릅니다.
7층으로 이곳 자오싱에 있는 고루 중 두 번째로 나지막하여 18.47m로 1층은 사각형이고 2층 이상 8각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일 꼭대기를 잘 보아 두십시오.
마치 인공위성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화교의 의자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것은 대부분 마을에는 고루 하나와 풍우교 하나만 갖추고 있지만, 이곳 자오싱은 고루만 다섯 개....
별이 다섯 개나 마찬가지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지요,
동족의 시작은 바로 이곳 자오싱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워낙 자오싱이라는 마을이 작아 동서방향으로 길게 큰 도로와 개천이 흐르고 집의 대부분은 개천과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기에 무척 단조로운 마을입니다.
물론, 남북으로는 산이 있어 산 사이에 마을이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둘러보는 곳은 동향제일채(侗鄕第一寨)라고 하는 자오싱(조흥:肇興) 동족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먀오족과 더불어 구이저우에서는 제법 인구수가 많은 동족(侗族)의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먀오족의 시지앙(서강:西江)이 있다면 동족에게는 자오싱이 있습니다.
지금 자오싱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강은 옷감을 물 둘이고 건조하고 빨고 하는 과정에 생기는 일 때문에 지저분하고
악취마저 심합니다.
강을 따라 걸어야 하는데 냄새 때문에 걷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통에 이상한 풀잎을 넣어놓은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마을 개천을 오염시키는 염색의 주범인 반란근이라는 약초입니다.
이 잎을 이용해 동족 고유의 옷감염색을 하고 마을 전체가 염색일로 바쁜 곳이 자오싱입니다.
따리에서도 옷감 염색에 주로 쓰는 식물이 반란근(板蘭根)이라는 식물입니다.
이 식물은 염색재료로 쓰일뿐 아니라 차나 약초로도 쓰이는 중요한 약재입니다.
중국에서는 사스가 유행할 때 유일하게 사스 치료제로 사용한 약재가 반란근입니다.
지금도 감기 예방약으로도 사용되니 아주 유용한 약제인 셈입니다.
그럼 이 반란근으로 염색한 옷을 입으면 사스 예방에 도움이 될까요?
중국에서는 된다고 할 것입니다.
참 억척스럽습니다.
아이를 업고 반란근을 어깨에 매고 가는 모습...
물에 담갔던 반란근의 무게가 무척 무거울 텐데 말입니다.
저 아이는 평생 사스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요?
자오싱이라는 마을에서는 이 약초를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스가 창궐해도 자오싱은 무서워 피해 가지 않겠어요?
내일도 마을을 더 둘러보겠습니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숙소 주인에게 마을을 왜 이렇게 내버려두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2년 후에 자오싱이 다시 개벽천지 할 정도로 변한다 합니다.
아마도 시지앙처럼 이곳도 관리하는 회사와 계약하는 모양입니다.
그때가 되면 입장료도 받고 마을 정비도 하고 공연도 활성화되겠지요.
아마도 먀오족의 시지앙에 버금가는 동족의 자오싱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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