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숙이!
창숙이 창숙이는 내가 살고 있는 부락 옆동네 신작로옆 외딴집에 살고 있던 내 국민학교 동창이다. 아마 창숙이 한테 지금 국민학교 동창중에 내이름을 알려주고 이런 사람이 국민학교 동창이라고 하는데 창숙이 너는 알고 있냐고 누가 대신 물어 본다면 창숙이는 백발 백중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나를 모른다고 대답할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그렇게 다른 학생들 눈에 띠는 아이가 아니었다는걸 내스스로가 너무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을뿐 나를 기억해주리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지금도 창숙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창숙이는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두눈과 양갈래로 머리 겁많고 수줍음 많은 예쁜 소녀 모습이었다. 나와 창숙이가 국민학교 1학년때 부터 6학년때 까지 같은반이된 햇수는 몇번 아니었던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창숙이를 본기억이 사실 별로 없지만 지금도 창숙이 얼굴이 또렷이 기억 나는 이유는 어느해 가을 운동회날 기억 때문에 더욱더 창숙이 얼굴을 또렷이 기억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시절 시골 국민 학교 운동회 때만해도 일년 학교 행사중 가장큰 행사가 가을 운동회 였다. 운동회날이 되면 온동네 사람들이 국민학교에 모여 어린 자녀들 재롱 잔치를 보기위해 곡식이 알알이 풍성하게 영글어 가는 계절에 너나 없이 바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자녀들 먹일 음식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고갯길을 넘어 읍내 학교로 모여 들었다. 사람들은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 주변에 싸온 음식 보따리를 풀고 귀여운 자녀들의 율동과 달리기 재롱 잔치를 구경하며 점심 시간을 기다렸다. 6학년 여자 아이들은 장롱속에 묻혀 있던 엄마 한복 곱게 꺼내 입고 부채 춤을 사뿐사뿐 추면서 고된 농사일에 지친 부모님 피로를 덜어주었다. 아버지들은 임시 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막걸리 한사발 털털 하게 마시고 흥에 겨워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다. 부락 동네 별로 학교 운동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깔고 한보따리 싸온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자녀들 재롱 잔치에 웃음꽃을 피우던 가을 운동회, 동네 처녀들도 오랜만에 일손을 멈추고 곱게 분을 찍어 바르고 장농속에 곱게 아껴뒀던 원피스를 꺼내 입고 삐쭉 구두도 꺼내 신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운동장 주변을 서성거리면 동네 청년들이 암내난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시골 아가씨 궁뎅이를 졸졸 따라 다니는 풍경이 국민학교 운동회날 벌어지는 진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부락별 청년들 단체 경주도 끝나면 어느덧 땅거미가 엉금엉금 어두워 질때 사람들은 국민학교 임시천막 막걸리 대포집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각자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운동회도 끝나고 날은 저물어 사람들은 빈보따리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데 복수개 고갯길에서 창숙이 엄마는 임시천막 돼지 국밥집에서 마신 막걸리에 취해 복수개 고갯길을 못올라 가고 있었고 창숙이는 눈물을 흘리며 술취한 엄마를 부축하고 있었다. 나는 십리길을 걸어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아직도 복수개 고갯길에서 울고 있을 창숙이를 생각했다. 운동회 다음날은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이었다. 공휴일날에는 시골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 집안 농사일을 거든다. 나는 공휴일 내내 집안 농사일을 거들면서 창숙이 엄마와 창숙이를 생각했다. 공휴일이 끝나고 다음날 학교에 가보니 창숙이는 별탈없이 학교에 나와 있었다. 나는 동그란 얼굴에 양갈래 머리 토끼 같은 커다란 두눈의 창숙이를 보면서 창숙아 사랑해! 학교에 별탈없이 나와 줘서 고마워! 마음속으로 간절히 속삭였다. 지금도 나는 창숙이 토끼같이 수줍어 하는 얼굴이 떠오르고 창숙이가 살던 신작로 옆 외딴집이 눈물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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