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네시아 기행 8 디엥고원
나는 50대 중반으로 중학교 1학년인 막내와 둘이 인도네시아를 다녀왔습니다. 일정은 2005년 1월 5일 출발하여 자카르타 - 족자카르타 - 발리 - 방콕 - 인천으로 1월 25일 귀국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디엥고원 2
빤다와 사원군
디엥고원 빤다와 사원군중 세마르 사원-가장 특이한 모습이다.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놀라운 속력으로 약 50분 만에 보로부두르를 스쳐 지나가더니 산으로 붙는다. 그러더니 꼬불꼬불한 산길의 연속이다. 차선도 제대로 없는 차 두 대 겨우 비껴갈 만한 길을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화장실 가자는 말도 없고 ‘오직 전진만이 살길이다.’하는 마음으로 달려달려 산을, 아니 산맥이라고 해야 할 것을 몇 개 넘는 동안, 점점 고도가 높아지는지 에어콘을 끄고서도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9시 30분 산비탈에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서니까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입장료인지 통과료인지 2000Rp 씩을 받아갔다. 이제는 다 왔나 생각했는데 여기서 또 다른 산맥을 타고 올라간다. 그 정상, 거기에 표지판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해발 2095미터. 드디어 디엥고원에 도착했다 시간은 10시 10분 장장 3시간 10분을 한시도 쉬임 없이 달려온 것이다. 그것도 미니버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마력으로,
알주나사원, 신상을 모셨던 받침, 신상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빈 받침만이 신전을 지키고 있다.
디엥고원은 오래된 화구가 무너져서 생긴 고원지대라고 한다. 디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 '신들의 자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쟈바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앞서 디엥에서 맞이하는 풍광은 참 아름다웠다. 적당하게 선선한 기온 - 밤이 되면 한기를 느낄 정도의 - 푸르게 보이는 청명한 하늘, 한 점의 매연도 없는 깨끗한 공기, 정말 평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이었다. 더군다나 북적대는 관광객도 없는 것이 더욱 좋았다.
디엥고원의 사원군을 보는 입장료는 12,000Rp 사원과 함께, 화산의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사끼당 지열지대’의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앞에 보이는 유적을 향해 난 초록 들판 길을 걸어가면 우리를 태우고 온 미니버스는 다른 길로 해서 작은 박물관과 ‘가뜻까짜’사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기다린다. 우선 주차장에 커다란 입간판에 대강의 지도가 그려져 있으니 참고한다.
‘빤다와 사원(Pandawa Temple)’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사원으로 8세기 마따람 왕조때 지어졌다고 한다. ‘빤다와 사원’은 두개의 블록으로 되어있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알주나 사원(Candi Arjuna)과 세마르 사원(Candi Semar)이다.
세마르사원, 입구부분의 장식 귀면을 길게 늘여 기둥으로 삼은 것이 특색있다.
‘알주나 사원’은 ‘빤다와 사원군’중 가장 크다, 물론 ‘쁘람바난’을 보고 온 눈에 ‘빤다와 사원군’의 사원들은 부서진 이름 없는 돌무더기 하나보다도 작다. 그러나 꼭 크기가 중요한 것만은 아니니까. ‘알주나 사원’은 외관은 삼층으로 되어있으나 신성소(神聖所)는 1층에만 있다. 문은 북쪽으로만 나 있으며, 앞에 있는 ‘세마르 사원’가 마주하고 있다. 나머지 세 방향과 2층과 3층에는 신상을 모셨던 함실이 마련되어 있으나 신상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문의 양쪽에는 문을 지키는 역사(力士)같은 신장(神將)을 모셨던 것 같은 장소가 마련되어 있으나 역시 신상(神像)은 사라지고 없다.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라갔는데 아직 벽화는 마련되지 않았다. 단지 계단의 난간과 입구의 장식이 신성스러운 것이 정성이 듬북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문 위에서 출입자를 감시하는 것 같은 신상(神像)은 마치 우리나라의 귀면(鬼面)과 많이 닮았다. 이것으로서 힌두교의 신상과 불교의 신상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푼타데와 사원, 알주나 사원과 비슷하다.
‘알주나 사원’의 신성소에는 신상은 사라지고 신상을 모셨던 1미터 정도의 대(臺)만 남아있다. 가운데 신상을 꼽았던 구멍과, 왼쪽으로 홈이 파진 모양이 ‘요니’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초기에 여기에 모셔두었던 신상은 단순한 모양의 ‘링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각뿔 모양으로 좁아진 천장은 3층까지 하나로 연결되었고,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언제 왔나, 비가 오더라도 사원의 구조상 빗물을 머금고 있을 장소가 없는데 물방울이 떨어진 다는 것은 혹시 ‘일부러 만든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슴보드라 사원
맞은편에 있는 ‘세마르 사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집을 연상시켰다. 멋진 지붕과 처마를 가진 아담한 돌집 모양으로 생겼다. 사방에 두개씩의 창문이 나 있으며, 문은 남쪽으로 나 ‘알주나 사원’과 마주하고 있다. 안은 비어있으며 외벽에도 출입문 위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도, 신상을 모시기위한 장치도 없는,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이 두 사원은 신앙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것을 알려주는 정보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알주나’와 ‘세마르 사원’으로 한 블럭을 만들고 - 건축 초기부터 두개로 나누어 졌었는지, 후대에 작업의 편의상 나누었는지 알 수 없다. - 건너편 블럭에는 세 개의 사원이 나란히 서 있다. 순서대로 ‘스리칸디 사원 Candi Srikandi’ ‘푼타데와 사원 Candi Puntadewa’ ‘슴보드라 사원 Candi Sembodra’이다. 세 개의 사원은 모두 고만고만한 크기인데 가운데 있는 ‘푼타데와 사원’이 조금 더 높은 축대위에 있으며 2층까지 남아있다. 좌우의 두 사원은 1층만 남아있는데, 이것이 초기의 모습인지 2층이 멸실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푼타데와 사원’은 ‘알주나 사원’과 매우 비슷한 모습이다.
숨보드라사원의 신상을 모셨던 대, 일부가 파손된듯 하며, 위의 지저분한 것은 제물로 바쳤던 꽃.
‘스리칸디 사원’과 ‘슴보드라 사원’은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 또한 다른 사원들 보다 파손도 많이 되어서 사원의 미래가 암담하였다. ‘스리칸디 사원’의 외벽 삼면에는 신상(神像)이 조각되어있는데 틀어지고 어긋나 마음이 아펐다. ‘슴보드라 사원’의 신성소에는 신상을 모셨던 대(臺)가 남아있다. 대의 정면에는 네모난 틀이 만들어져 있는데, 혹시 신상의 이름을 적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당시 그 자리에서는 미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이 세 개의 사원은 모두 ‘알주나 사원’과 같이 북쪽으로 문을 두고 있다.
‘스리칸디’사원-빤다와사원군 중 유일하게 부조벽화가 있다.
‘스리칸디’사원의 벽화 - 벽돌을 다음은 솜씨나, 부조에서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 점 등을 보면 초기 부조벽화임을 알 수 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디엥고원 2
빤다와 사원군
디엥고원 빤다와 사원군중 세마르 사원-가장 특이한 모습이다.
우리를 태운 미니버스는 놀라운 속력으로 약 50분 만에 보로부두르를 스쳐 지나가더니 산으로 붙는다. 그러더니 꼬불꼬불한 산길의 연속이다. 차선도 제대로 없는 차 두 대 겨우 비껴갈 만한 길을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화장실 가자는 말도 없고 ‘오직 전진만이 살길이다.’하는 마음으로 달려달려 산을, 아니 산맥이라고 해야 할 것을 몇 개 넘는 동안, 점점 고도가 높아지는지 에어콘을 끄고서도 선선한 기운이 느껴진다.
9시 30분 산비탈에 모여 있는 마을로 들어서니까 한 사람이 다가와서 입장료인지 통과료인지 2000Rp 씩을 받아갔다. 이제는 다 왔나 생각했는데 여기서 또 다른 산맥을 타고 올라간다. 그 정상, 거기에 표지판 하나가 우리를 반긴다. 해발 2095미터. 드디어 디엥고원에 도착했다 시간은 10시 10분 장장 3시간 10분을 한시도 쉬임 없이 달려온 것이다. 그것도 미니버스가 낼 수 있는 최고의 마력으로,
알주나사원, 신상을 모셨던 받침, 신상은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빈 받침만이 신전을 지키고 있다.
디엥고원은 오래된 화구가 무너져서 생긴 고원지대라고 한다. 디엥이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 '신들의 자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쟈바에서 가장 오래된 힌두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앞서 디엥에서 맞이하는 풍광은 참 아름다웠다. 적당하게 선선한 기온 - 밤이 되면 한기를 느낄 정도의 - 푸르게 보이는 청명한 하늘, 한 점의 매연도 없는 깨끗한 공기, 정말 평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이었다. 더군다나 북적대는 관광객도 없는 것이 더욱 좋았다.
디엥고원의 사원군을 보는 입장료는 12,000Rp 사원과 함께, 화산의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사끼당 지열지대’의 입장료가 포함되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앞에 보이는 유적을 향해 난 초록 들판 길을 걸어가면 우리를 태우고 온 미니버스는 다른 길로 해서 작은 박물관과 ‘가뜻까짜’사원이 있는 곳으로 가서 기다린다. 우선 주차장에 커다란 입간판에 대강의 지도가 그려져 있으니 참고한다.
‘빤다와 사원(Pandawa Temple)’은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먼저 건축된 사원으로 8세기 마따람 왕조때 지어졌다고 한다. ‘빤다와 사원’은 두개의 블록으로 되어있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알주나 사원(Candi Arjuna)과 세마르 사원(Candi Semar)이다.
세마르사원, 입구부분의 장식 귀면을 길게 늘여 기둥으로 삼은 것이 특색있다.
‘알주나 사원’은 ‘빤다와 사원군’중 가장 크다, 물론 ‘쁘람바난’을 보고 온 눈에 ‘빤다와 사원군’의 사원들은 부서진 이름 없는 돌무더기 하나보다도 작다. 그러나 꼭 크기가 중요한 것만은 아니니까. ‘알주나 사원’은 외관은 삼층으로 되어있으나 신성소(神聖所)는 1층에만 있다. 문은 북쪽으로만 나 있으며, 앞에 있는 ‘세마르 사원’가 마주하고 있다. 나머지 세 방향과 2층과 3층에는 신상을 모셨던 함실이 마련되어 있으나 신상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문의 양쪽에는 문을 지키는 역사(力士)같은 신장(神將)을 모셨던 것 같은 장소가 마련되어 있으나 역시 신상(神像)은 사라지고 없다.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라갔는데 아직 벽화는 마련되지 않았다. 단지 계단의 난간과 입구의 장식이 신성스러운 것이 정성이 듬북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문 위에서 출입자를 감시하는 것 같은 신상(神像)은 마치 우리나라의 귀면(鬼面)과 많이 닮았다. 이것으로서 힌두교의 신상과 불교의 신상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푼타데와 사원, 알주나 사원과 비슷하다.
‘알주나 사원’의 신성소에는 신상은 사라지고 신상을 모셨던 1미터 정도의 대(臺)만 남아있다. 가운데 신상을 꼽았던 구멍과, 왼쪽으로 홈이 파진 모양이 ‘요니’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초기에 여기에 모셔두었던 신상은 단순한 모양의 ‘링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사각뿔 모양으로 좁아진 천장은 3층까지 하나로 연결되었고,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언제 왔나, 비가 오더라도 사원의 구조상 빗물을 머금고 있을 장소가 없는데 물방울이 떨어진 다는 것은 혹시 ‘일부러 만든 장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슴보드라 사원
맞은편에 있는 ‘세마르 사원’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집을 연상시켰다. 멋진 지붕과 처마를 가진 아담한 돌집 모양으로 생겼다. 사방에 두개씩의 창문이 나 있으며, 문은 남쪽으로 나 ‘알주나 사원’과 마주하고 있다. 안은 비어있으며 외벽에도 출입문 위를 제외하면 아무런 장식도, 신상을 모시기위한 장치도 없는, 단아하고 깔끔한 모습이다. 이 두 사원은 신앙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것을 알려주는 정보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알주나’와 ‘세마르 사원’으로 한 블럭을 만들고 - 건축 초기부터 두개로 나누어 졌었는지, 후대에 작업의 편의상 나누었는지 알 수 없다. - 건너편 블럭에는 세 개의 사원이 나란히 서 있다. 순서대로 ‘스리칸디 사원 Candi Srikandi’ ‘푼타데와 사원 Candi Puntadewa’ ‘슴보드라 사원 Candi Sembodra’이다. 세 개의 사원은 모두 고만고만한 크기인데 가운데 있는 ‘푼타데와 사원’이 조금 더 높은 축대위에 있으며 2층까지 남아있다. 좌우의 두 사원은 1층만 남아있는데, 이것이 초기의 모습인지 2층이 멸실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푼타데와 사원’은 ‘알주나 사원’과 매우 비슷한 모습이다.
숨보드라사원의 신상을 모셨던 대, 일부가 파손된듯 하며, 위의 지저분한 것은 제물로 바쳤던 꽃.
‘스리칸디 사원’과 ‘슴보드라 사원’은 크기나 모양이 닮았다. 또한 다른 사원들 보다 파손도 많이 되어서 사원의 미래가 암담하였다. ‘스리칸디 사원’의 외벽 삼면에는 신상(神像)이 조각되어있는데 틀어지고 어긋나 마음이 아펐다. ‘슴보드라 사원’의 신성소에는 신상을 모셨던 대(臺)가 남아있다. 대의 정면에는 네모난 틀이 만들어져 있는데, 혹시 신상의 이름을 적었던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당시 그 자리에서는 미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해 확인하지 못했다. 이 세 개의 사원은 모두 ‘알주나 사원’과 같이 북쪽으로 문을 두고 있다.
‘스리칸디’사원-빤다와사원군 중 유일하게 부조벽화가 있다.
‘스리칸디’사원의 벽화 - 벽돌을 다음은 솜씨나, 부조에서 세밀한 묘사가 생략된 점 등을 보면 초기 부조벽화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