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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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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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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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교(Brahmanism)

아리아족에 의해서 기원전 900년-500년 사이에 인도로 넘어 왔으며 베다성전을 가지고 있다. 주술의 신비한 힘을 교리로 믿고 있다. 크메르 조각에서는 베다 성전에 등장하는 아그니, 인드라, 수리야를 표현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힌두의 성전인 베다성전은 우주의 현상과 움직임을 신의 경지로 올렸다. 신들은 우주의 균형을 위해 악마와의 투쟁을 계속한다. 신들의 왕인 인드라, 불의 신인 아그니, 천상에서 태양의 눈으로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는 바루나가 있다.

 

힌두교(Hinduism)

브라만교의 교리와 베다 성전의 전통적 신앙교리에서 힌두교가 발생했다. 숭배자들은 브라만의 우주사상을 믿으며 브라흐마, 시바, 비슈누의 삼신일체 사상을 믿는다. 같은 삼신일체 신이였던 비슈누나 시바가 인기를 얻었던 것과는 다르게 브라흐마는 인기가 별로 없는 신이다. 6-10세기에 조각된 많은 조상에서 비슈누와 시바는 동일시되었다. 사실상 하리(비슈누)와 하라(시바)의 합체된 형태로 하리하라로 되었다. 신들은 배우자가 있고 배우자들은 신들의 성격을 반영한다. 비슈누의 배우자는 다산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여신 락슈미로 쉬리(번영)라고도 불린다. 비슈뉴가 환생 할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녀와 함께 한다. 시바의 배우자들은 매우 위대한 여신의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두르가는 악마를 처치하는 여전사며 농작물을 보호하는 상냥하며 헌신적인 아내이지만 시간을 잡아먹고 자연을 굴복시키는 칼리이기도 하다. 브라흐마의 배우자는 사라스바티, 이름을 말하면 바로 존재하게 되는 바크(신의 말)로 알려져 있다. 브라흐마와 사라스바티는 거위를 타고 다니고 비슈누와 락슈마는 매의 얼굴과 사람의 몸을 가진 가루다를 타고 다니며 코끼리의 머리와 사람의 몸을 한 지혜의신 가네샤는 쥐를 타고 다닌다. 앙코르 시대 종교에서 중요한 숭배 대상은 변한다. 11세기이전에는 시바가 주요 숭배 대상으로 11세기 이후에는 비슈누로 숭배 대상이 바뀐다. 브라흐마는 점점 인기가 떨어져서 사라진다.

 

데바라자교(Devaraja)

앙코르 시대에 왕들과 가장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종교, 신왕, 불왕으로 불리는 종교다. 크메르 왕들은 지상에서 신과 같은 존재로 신을 대신 한다고 했다. 왕은 신의 명을 받고 데바라자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신으로 부터 능력을 받아 국가를 보호하고 부강하게 할 책임을 가진다. 왕은 우주의 통치자로 표현 되고, 이 종교는 앙코르 왕국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부터 14세기 중반까지 성행했다. 절대적인 충성심과 직결되어 있으며 크메르 민족을 단합시키는 힘이 되었다. 데바라쟈 신앙은 시바신의 숭배로 표현 했다. 시바를 상징하는 링가를 모셨는데 링가는 출생을 뜻하며 자연의 힘에 의한 창조를 뜻한다. 링가의 윗부분은 반질반질한 원형으로 시바를 뜻하고, 중앙부분은 팔각형으로 비슈누를 아래부분은 사각형으로 브라흐마를 뜻한다. 여성 성기를 뜻하는 요니 위에 놓여 있다.

 

불교(Buddhism)

인도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받고 발생한 종교로 대승불교와 소승 불교로 나뉜다. 4세기경 대승불교가 캄보디아에 전파 되는데 12세기 말에는 자야바르만 7세 때에는 힌두교를 누르고 국교의 자리까지 오른다. 자야바르만 7세가 죽고 13세기에는 다시 힌두교가 강세, 불교사원을 파괴한다. 15세기 태국으로부터 들어온 소승불교가 캄보디아에 넓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남방불교로 알려진 소승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시작해서 11-15세기에 버마와 태국에 의해 동남아에 널리 전파 된다. 사원 건설에 시달린 크메르인들은 편한 소승불교에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에 이른다.

 

민간신앙

크메르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가 서로 다른 교리가 서로 공존했다는 것이 특이한 현상이다. 크메르에서는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통해서 우주의 가득한 신비스런 활력을 인간의속에 넣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자연을 믿는 향토신앙이 다양했다.

 

승왕(僧王)

'캄보디아 왕국'이라는 나라는 입헌군주제의 국가로 이 나라가 존재하고 정통성을 갖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요소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하나의 나라'로 서는 것인데, 그것은 '국가', '종교', '민족'입니다. 캄보디아의 모든 공문서, 사문서(심지어 계약서를 비롯한 개인 각서 등도 포함하여)의 위에는 문서의 제목이 표기 되고 그 바로 아래 행에 위의 국가, 종교, 민족의 세 단어가 씌어 집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것은 국민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회에서 추인한 '정부'가 가지게 되며, 대표자는 '수상'입니다. 현재의 수상은 훈센 총리입니다.

다음으로 종교인데, 민족을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캄보디아에는 크메르 족과 함께 몽족, 참파족, 크농족 등 18개의 부족이 모여 사는데, 각 부족마다 왕이(추장이 아닙니다) 있고, 그 왕을 다스리는 바르만, 통상우리가 말하는 캄보디아의 국왕이 있습니다. 위대한 앙코르 제국 이전부터 역사적인 고증을 밝혀내지 못해서 그렇지 상당히 오래 전부터 나라가 존재하였습니다. 앙코르 왓을 관광한 사람들은 가이드로부터 들었겠지만, 이 나라의 왕은 '데바 라자'로 표현됩니다. '데바'는 신, 그것도 남자 신을 말합니다. '라자'는 왕, '바르만(신의 보호를 받는 자)'을 말합니다. 앙코르 제국을 건국한 자야바르만 2세는 자기 스스로 '데바 라자'라고 선언을 함으로써, 당시 강대국이었던 인도네시아의 '자바그 왕국'과 북쪽의 '파간 왕조(지금의 미얀마)' 등에게 독립된 국가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데바 라자 사상은 지금도 캄보디아 인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치 우리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생각을 가지듯이, 이들은 캄보디아는 데바 라자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책자를 보면, 캄보디아인이 외국인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자존심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 바탕에는 바로 데바라자의 통치를 받는 캄보디아는 위대한 나라이며, 자신도 그 국민, 즉 데바 라자의 신민이라는 자긍심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데바라자는 살아 있는 '神王'이라는 말로, 신이 크메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 지상으로 강림한 것입니다. 힌두 사상이 지배하던 초기 앙코르 제국에서는 힌두의 신인 '쉬바 신', '비슈누 신' 등의 아바타로써 군림하였지만, 불교국이 된 이후부터는 관세음 보살의 화신, 보현 보살의 화신 등으로 칭하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캄보디아의 국왕은 바로 신, 또는 부처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왕권에 도전하거나 왕을 폐하는 일이 생기면, 정치적인 분쟁이 아니라 바로 '종교 전쟁'이 되는 것이며, 근세에 일어난 킬링필드 사건의 저변에는 당시 왕이며, 지금의 상왕인 '시애눅(한국에서는 일본사람들처럼 시아누크라고 부름)' 국왕을 미국이 CIA의 공작으로 실각시키면서 이에 반발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국왕을 재옹립해야 한다는 무장세력 '엉까'가 만들어 지고, 엉카는 당시 캄보디아 최대의 무장세력이며, 정부군의 3배에 이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에 망명하였던 시애눅 왕이 정글 속에 숨어서 반정부투쟁을 하고 있던 소규모의 무장세력 크메르 루지(캄보디아 공산당)에게 이 엉카의 지휘권을 주면서부터 정황이 급변하여 1975년 4월 15일 공산 혁명을 성공하게 되는데, 당시의 국민들이나 엉카 조직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크메르 루지의 소속이 된 것은 모르고 단지 연합전선을 펴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이런 엉카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국왕을 폐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며, 간간이 한국의 선교단체의 사람들에 의해 나오는 말이, 현 국왕이 독신이며 자식도 없는데 그런 왕자를 왕으로 세운 것은 20년을 집권한 훈센 총리가 왕의 후사가 없으니 후일에 대통령제로 바꾸기 위함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합니다만, 지금도 극단적인 말을 한다면 국왕을 폐하는 순간 캄보디아는 다시 내전으로 돌아갑니다. 이처럼 캄보디아에서는 국왕이라는 지위가 절대적이며, 신앙 그 자체입니다. 킬링필드 당시 미국은 캄보디아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치루었지만, 캄보디아인들은 바로 종교 전쟁을 수행한 것입니다. 전쟁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종교전쟁 아닙니까? 지금의 국왕은 시애눅 왕의 막내 왕비인 모니릿 왕비가 낳은 막내 아들로 아버지의 '시아'와 어머니의 '모니'를 따서 이름 지은 '시아모니 바르만'입니다. 현재 총각이니 혹시 미혼 여성 중에 '왕비' 자리에 도전하고 싶으시면 신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

다음으로 종교입니다.

캄보디아에서 일컫는 종교란 바로 '불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타 종교들에 대해서 배타적이지도 않지만, 종교라는 단어, '싸스나'라는 말자체가 불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계 선교사들이 엄청 많이 들어와 있으며, 교민지를 보면 대부분, 아니 전부라 할 만큼 선교단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으며, 캄보디안들의 생각에는 한국의 종교는 기독교인 줄 알 정도입니다만, 캄보디아는 100년 넘게 유럽 국가인 프랑스에게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전국민의 98%이상이 불교도이며, 그 나머지조차도 베트남의 원주민인 참족의 이슬람이지, 기독교인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외국의 선교 단체에서 포교활동을 하는데 응하기는 하지만, 명절이 되면 자신의 조상을 모시기 위해 절에 나가니 온전히 개종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캄보디아에서는 불교를 빼고는 생활 그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올 때는 교회에 사람이 모입니다. 예배를 아주 정성스럽게 봅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안계시거나 계신다 해도 명절날이 되면 신도들은 절에 갑니다. 이유는 조상들의 혼이 절로 오기 때문에 그 혼령을 모시러 가는 것이지요. 캄보디아에서의 불교는 바로 생활 그 자체입니다.

이 불교의 수장으로 열 명의 큰 스님이 계십니다. 이 분들은 어느 종파의 장로들이 아니라 20대 전후로 큰 스님이 될 스님으로 지정이 되십니다. 그 후 꾸준한 교육을 통하여 큰 스님으로 키워지며 결국에는 '섬다엑'이라는 칭호를 받는 큰 스님의 자리에 오르는데, 이 칭호는 왕족 중에 왕의 친자식 이상, 정부 요인들 중에도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나 간혹 붙여지는 호칭입니다. 현 정부에서는 훈센 총리와 치아심 상원의장, 행삼린 CPP 당의장이 2004년에서야 이 호칭을 받았습니다. 왕을 직접 호칭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마마'라도 하듯이 바로 이와 비슷한 호칭으로 통상적으로 부르는 호칭이기도 한데, 이 '섬다엑' 호칭을 받는 열 분의 스님 중에 열반으로 결원이 생기면 어려서부터 예정되어 자라오신 스님 중에 한분을 채워 다시 열 분의 섬다엑을 유지 합니다. 그 지위에는 엄격한 서열이 있으며 제 1 순위의 섬다엑이 바로 僧王이 되시는 것이며, 이 분이 입적하면 큰 이변이 없거나 본인의 사양이 없는 이상 제 2 순위의 섬다엑이 다음 승왕이 되는 것이며, 다시 예정되었던 후보 스님이 섬다엑 지위에 오르는 것이지요.

16세기 이후 캄보디아는 국운이 기울어지면서 위대한 왕은 나오지 않았지만 위대한 큰 스님은 많이 나왔습니다. 근세에도 세계적인 위대한 스님이 계셨는데, 킬링필드 사건으로 전국에 피바다가 일어나고, 30,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죽임을 당하며, 나머지 스님들은 모두 추방당하거나 환속하는 처참한 아비지옥 속에서 승단을 이끌고 투쟁을 하신 스님으로 '쭈운 나엑' 승왕과 그 뒤를 이으신 '쏨 분 트은' 승왕이십니다. 이 중 촘 분 트은 승왕 스님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되기도 했었지만 당신 스스로 사양을 하셨습니다. 선량한 백성 300만이 죽어나가는 피바다 속에서 단 한명만이라도 살려 냈었다면 당당히 상을 받을 수 있지만, 나는 성직자로서 그러지 못하였다는 것이 사양의 이유이며, 치열한 내전 당시 스승(쭈운 나엑 승왕 스님 : 73년에 입적)의 유지를 받들어 평화 대행진을 벌인 것이 노벨상 수상 후보 추대의 이유입니다. 쭈운 나엑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평화 대행진이란, 단신으로 크메르 루지 진영을 찾아 걸어가시면, 스님을 추종하는 다른 스님들, 그 스님들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뒤를 따라서 스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행진의 길이가 항상 200 미터를 넘었다고 하며, 부대 앞에 도착한 큰 스님은 아무 말 없이 서 계시면서 침묵시위를 하십니다. 목적은 더 이상 지뢰를 매설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땅은 부처님께 우리가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인데, 지뢰를 매설하여 살상을 한다면 땅이 더러워지고, 후손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니 더 이상의 지뢰 매설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부대장이 쓰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부대장이 각서를 써 주게 되면 다시 그 행렬은 대치하고 있는 정부군 부대를 향합니다. 상대 부대에서 이런 각서를 썼으니 너희들도 지뢰를 매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행진을 하셨는데, 일화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크메르 루지 본영에서 스님을 사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는데, 큰 스님(섬다엑)의 위치에 오르면 일반 승려가 아니라 바로 살아 있는 부처가 되면서 언어도 고대 앙코르 제국 시대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왕궁의 언어와 비슷하기도 합니다만, 우리나라 궁중 언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분을 살해한 다는 것은 참으로 큰 심적 부담이 되는 일인데, 어느 부대 앞에 다다른 스님께 크메르 루지의 어린 병사들이 소리를 쳤답니다. "가까이 오시면 우리로서는 총을 쏠 수밖에 없으니 다가오지 마세요!" 하지만 큰 스님을 시적부적 걸어 가셨고, 급기야 병사는 발포를 하고 맙니다. 차마 직접 쏘지는 못하고 스님의 앞에 발포한 것이지요. 병사의 코앞에 이르신 스님이 지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총구를 잡으시자 이 병사는 총을 던지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엉엉 소리 내어 울어버리고,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들도 함께 총을 버리고 삼배하였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또한 쏨 분 트은 승왕스님은 살아생전 예지력이 뛰어나셔서 ‘절에서 키우던 사슴이 아프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울고 있다고 하셨으며, 어느 날에는 새 한마리가 와서 스님 앞에 지저귀자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면서 슬퍼하셨다는데, 3일 후 그 부고가 왔더랍니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 사슴도 죽었는데, 배를 갈라보니 간이 시커멓게 변색되어 딱딱하더랍니다. 동물과 대화하신 일화가 많으신 이 스님께서는 결국에는 나라의 평화가 찾아오고 지금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괴한들에 의해 총격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시엠리업에 오시면 민속촌에 가실 경우가 있을 겁니다. 이 민속촌의 밀랍인형관으로 가보면 스님 한분의 인형이 있는데, 바로 이 스님이 쭈운 나엑 스님이십니다. 쏨 분 트은 승왕스님은 워낙 유명한 일화가 많으시다보니 유체를 화장하지 않고 미이라로 만들어 프놈펜 이전의 수도였던 '어도웅(보통 책에는 '오동'이라 표기 됨)' 이라는 곳의 수투파(탑)에 영구 보존하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신도들의 예방을 받고 계십니다.

그 후 2006년에 또 다시 승왕스님이 입적하시면서 당시 정부에서나 왕실, 또는 국민들 사이에 가장 신뢰를 받고 계시던 '섬다엑' 한분이 승왕으로 추대 되었는데, 이 분이 바로 '마하 끄다이 쁘레아 뗏 군 섬다엑 텝 봉 승왕스님입니다. '마하'는 크다, 위대하다, ' 끄다이'는 높다, 고귀하다, '쁘레아'는 신격, 성스러움을 말하며, '뗏군'은 우리 말로 스님, 혹은 스님의 존칭, 뗍 봉은 바로 스님의 이름이십니다. 이 존함을 한국사람들은 탭봉 스님, 혹은 태봉 스님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쭈운 나엑 스님을 사조로 하여 출가 법명은 '우페카 삼봇 츠 한기코', 출가사는 시엠리업에서 가장 큰 절인 '왓 리츠보'입니다. 부친 '텝 치?#039;, 모친을 '피 ?#039; 으로 하여 1932년 1월 12일에 고향 시엠리업에서 태어나셨으며, 크메르 전통의 문학과 수학을 배우기 위해 출가하신 뒤, 15살이 되시던 1947년에 덕망이 높으셨던 '힝 마오' 큰 스님을 스승으로 득도를 하시게 됩니다. 당시 캄보디아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사원으로 출가하여 공부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으며, 1952년에는 주재 사찰인 왓 리츠보의 책임 스님(총무스님)으로 발탁되시면서 스승으로부터 '고등 수계'를 받아 다른 스님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오르십니다. 그 후 정세가 급변하면서 1975년 4월 15일 공산 혁명을 성공시킨 크메르 루지가 초기에는 유화 정책을 폈었는지 캄보디아의 정계, 학계, 재계, 종교계의 대표자들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승왕스님의 지시로 종교계 대표 자격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당시의 개인적인 소견을 말씀하시기는 했으나, 이것을 여기에 쓰기는 부적절한듯하여 생략합니다. 사태가 급반전 하여 크메르 루지는 사찰과 왕궁의 보물을 약탈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죽음을 목전에 둔 많은 스님들이 자기 사찰의 귀한 보물을 당시 승왕이시던 쏨 분 트은 큰 스님께 맡기고 죽어간 숫자가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당시 맡아 두셨던 진귀한 문화재는 텝봉스님의 출가사인 왓 리츠보에 유네스코가 지어준 보관 창고에 모셔져 있습니다. 197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종교 박해가 심해지면서 프놈펜 인근에 있는 한 사찰에서는 3,000명의 스님을 몰살시키기도 했으며, 전국 곳곳에서 스님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텝 봉 큰스님께서도 크메르 루지에게 직접 항의를 하시는 등 투쟁일변도 이셨고, 앙코르 왓 관광객이 간간히 들어가는 롤루스 유적 중에 '롤레이 사원' 인근에 있는 감옥에 투옥되어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큰 스님의 고향 생가는 지도에 표기가 되어 있는데, 이 동네에 가면 스님의 '감방 동기' 할아버지 한분이 계십니다. 이 분과 만나면 할아버지는 친구였던 큰 스님께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지만, 큰 스님은 부둥켜안아 일으키시며 두 분이 팔을 엇갈려 허리를 껴안고 이야기 하십니다. 결국은 스님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크메르 루지는 쏨 분 트은 승왕 스님과 여타의 높으신 스님들은 차마 살해하지 못하고 추방을 하였으며, 캄보디아에는 단 한명의 스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모든 사찰은 폐쇄되거나 파괴 되었으며, 앙코르 왓 2층 회랑에 있던 천불전의 불상들은 모두 목이 잘리는 파괴를 자행합니다. 훈센 총리와 행삼런 당의장이 베트남군을 끌고 들어올 때 승왕스님의 지시로 군인들과 함께 캄보디아로 들어오셨는데, 변복을 한 채 (흰옷: 힌두교의 수행자 모습으로 머리를 기르셨다고 합니다.) 고향 시엠리업에 오셨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크메르 루지의 점령 지역이었기에 상당히 위험했습니다만, 그럴 만한 이유는 스승이 살해를 당했으며, 어느 한 곳에서는 앙코르 유적지를 보수하던 노무자들이 몰살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시면서 사흘 동안 눈물을 흘리며 공양도 하지 않으시더니 잠입을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일을 말씀하실 때마다 이 대목에서는 눈물을 글썽이시는데, 고향 출가 사찰인 왓 리츠보, 노무자가 몰살을 당한 지금의 왓 트마이(시엠리업 킬링필드)에 오셔서 목도한 그 참상을 이루 말 할 수 없었지만,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당신을 살려내기 위해 왓 리츠보의 스승님을 비롯한 모든 스님들, 시엠리업의 신도들이 스님 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탄원, 도주로의 안내, 숨겨 주는 일 등을 했었는데, 후에 발각된 뒤 모두 살해당했다는 말에 고개를 숙이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은 차마 바로 바라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간 죄책감으로 지금도 마음에 부담을 지고 계신 큰 스님은 1979년 9월 1일 정부의 승인을 받아 승왕 쏨 분 트은 스님으로부터 '나라의 위대한 큰 스승'의 후보로 책봉되셨고, 사조 스님들의 뜻을 이어 평화 대행진 등을 주도하십니다. 당시만 해도 정글로 들어간 크메르 루지와의 대치가 10년을 넘게 끌면서 지속적인 내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990년에 모든 무장 세력이 파리에 모여 평화회담을 성사시킨 이후 91년 10월 1일에는 캄보디아 국민은 물론 동남아시아 모든 불교계의 신도들이 존경하며 떠받드는 쁘레아(왕, 성스러움) 마하 우메따띠 피읍(위대한, 고결한) 대 스승의 칭호를 받으시게 되며, 그 해 11월 15일에는 새로운 왕으로 대관식을 치르기로 정해진 시애눅 국왕과 당시의 정부인 국가 평의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섬다엑 지위에 봉해지시게 됩니다. 2003년 4월 29일에 결위가 된 승왕의 자리에 오르시면서 캄보디아 종교의 대표가 되시면서 캄보디아 헌법상 명문화 된 세 명의 국가 주체 중의 하나인 '종교'의 대명사가 되신 것입니다. 2004년에는 지금의 국왕인 시아모니 바르만의 대관식에서 캄보디아를 대표하여 국왕으로 인정하는 의식을 주관하셨고, 이 장면은 국가 홍보 영상물에 항상 나오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승왕이 되시기 이전부터 완전히 파괴된 불교의 재건, 망명 가셨던 큰 스님들의 입국과 정착, 어린 사미스님들의 육성과 교육, 무엇보다 큰 것은 가슴에 피멍이 든 일반 백성들의 위무와 격려 등이 스님의 가장 큰 업무이셨으며, 단 한 개의 문을 연 사찰도 없었고, 단 한 명의 스님도 없던 이 나라가 드디어는 20,000여 개의 사찰, 60,000여 분의 스님이 계신 명실상부한 불교국가로 재건되는 동안 우리나라로 치면 총무원장의 위치에서 해 내신 것입니다. 거의 혼자 하셨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셨으며, 이를 모든 캄보디아의 지도자나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으며, 오죽하면 올 초(2009년 3월)에는 프랑스 식민 시절 프랑스가 불법적으로 베트남에 할양해 버린 메콩 델타에 살고 있는 크메르 족의 폭동이 일어났을 때 스님께서 노구를 이끌고 달려가 일주일 동안 3,000km를 순회하는 강행군을 하시자, 모든 지도자들이 평화로운 항거를 하기로 방침을 바꾸었을 정도로 아직도 막강한 지지와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스님의 별명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르는 큰 스님의 별명은 '저녁에는 부자, 다음날 아침에는 거지 스님'이신데, 신도나 높은 분이 오셔서 큰 스님을 뵙고 공양금을 올리면 이를 본 제자들이 '아하! 큰 스님이 돈이 있으시니 내일 책 살 돈을 타야겠다.' 하고 아침에 문안드리러 가서보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할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큰 스님을 뵙는 답니다. 큰 스님은 돈을 나누어 주면서, 이것으로 아무개 병원에 데리고 가라, 이 돈으로 어디 무너진 다리 보수공사 해라, 어느 동네에 배수로 공사에 써라 하는 식으로 다 나누어 주시고 나면, 한 푼도 없는 거지 스님이 되신다는 데서 제자들이 놀리는 말입니다. 이런 스님을 놓고 잘난 한국인 한사람이 자신이 큰 스님의 보좌관이라고 하면서 위대한 큰 스님을 만나려면 돈이 들어가는데, 내가 싸게 해줘서 20,000 달러를 내야 한다고 했었고, 많은 사람들은 정말 큰 스님을 만나려면 그렇게 돈을 내고 만나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에 선교 단체에서 발행하는 교민지에는 비아냥거리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었습니다. 참으로 못 되었습니다. 내전 당시 주지 스님들이 죽기 전에 승왕청에 맡긴 고대 유물 등의 보물을 큰 스님께서 출가하신 절에 모두 모아 두었고, 유네스코에서 창고를 지어 보관 중인데, 이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짓기 위해 투자를 받는 다면서 벌인 사기사건으로 큰 스님은 물론 캄보디아 불교계가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인데, 더 이상 한국인에 의해 캄보디아의 불교와 승왕스님께 불경스런 짓을 수수방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캄보디아 왕국을 구성하는 삼대 요소 중의 하나인 종교의 대표자는 바로 캄보디아 불교 승려들의 왕, 위대한 바르만(왕)의 고매한 스승이신 마하 끄다이 쁘레아 썸다엑 텝 ?큰 스님이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계시며, 마치 어린 아이 같이 개구지시고요, 웃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평화로워서 격동의 세월 속에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 같지 않으십니다. 이런 스님께서 승왕청에 혼자 계시다보니 저녁 문안을 하는 제자들을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세 시간은 기본이고 보통 다섯 시간 동안 말씀을 하신다는데, 제자들을 꾸벅꾸벅 졸면서도 대답은 해야 한답니다. 혹시 여러분이 캄보디아로 순례를 오셨을 때 큰 스님의 말씀이 끝없이 시작된다 해도 누구라도 멈추게 하면 안 되는 것이 예법이기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여러분은 스님 앞에서 졸게 될지도 모르는 데, 그것만큼은 여러분의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이런 분과 왕궁에 혼자 계신 양반이 만나시면 보통 이야기가 하루 웬 종일이랍니다. 국왕 역시 혼자 있는 분이시니 두 양반의 만남은 참으로 대단한 대화의 봇물이 터지는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국왕께서 매달 한 두 번씩 큰 스님을 왕궁으로 초대하여 음식 접시를 직접 무릎걸음으로 큰 스님께 공양 올리는 의식을 하는데, 그때 당번으로 따라가시는 스님은 호된 벌을 받는 것이 더 나으니 제발 빼 달라고 선배 스님들께 사정을 한다고 합니다.

이슬람 국가들처럼 직접 처형을 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2007년에는 국왕의 교서가 반포되기도 하였습니다. 캄보디아 영내에서 자신의 종교를 믿고 종교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겠지만, 타인을 자신의 종교로(불교 이외) 개종 시키는 행위는 금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선교 단체들의 활동이 워낙 왕성한 바람에 일어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2004년인가 5년인가 크리스마스 전에 승왕청 앞에 있는 불상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해 놓았습니다. 이것 역시 한국인들의 작품이었는데, 우리나라 신문에도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왔더군요? 이 사진을 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의 마음속에는 캄보디아가 혼도 없고 종교에 대한 개념도 없는 줄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분명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앙코르 왓을 발견이라고 하는데 천부당만부당한 이야기입니다. 이곳에서는 줄기차게 사람이 살고 있었고, 비워 둔 적이 없었습니다. 서양 사람들도 그 때가 처음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에 이곳을 들어온 서양사람 중에 여자가 대형 불상의 어깨 위로 올라가 찍은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캄보디아 사람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분한 것이지요. 부처님 위로 올라간 자체가 국가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종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이사진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한국에 대한 온정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우리가 가난 한 시절 쌀을 원조해주고 도와준 이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리가 60년대 70년대 부의 상징은 미국이었듯이 지금 이들이 가장 동경하는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우리 한국의 친구인 캄보디아를 좀더 이해하고, 승왕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는 성지순례를 기획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2009-11-19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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