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득 왕은 후궁이 100명이었단다.
11월 18일 여행 19일째.
오늘 8시에 왕릉 투어를 간다.
숙소 골목에 국수를 팔기에 가격을 확인하고 한 그릇에 10.000동을 주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먹었다.
"아줌마~ 그거 잠옷이시지유?"
잠옷 패션도 이곳의 문화다.
어찌보면 더 편리하기도 하고....
어떤 여인네들은 아이들과 같은 색상의 옷을 세트로 입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한다.
국수를 먹을려고 하는데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왜 아니겠니? 어제 하루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오늘에야....
일단 처마 밑으로 한 손에 국수, 다른 손에 의자를 들고 자리를 옮긴다.
먹던 것은 다 먹어야 하지 않겠수?
이들의 숫가락은 마치 양철로 적당히 구부려 만들어 놓은 듯 얇고 가볍다.
이들에게 우리의 스테인레스 숫가락은 부담스럽고 무거울까?
7시30분에 신 카페 앞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8시 18분에야 버스가 온다. 이제는 우리도 이들처럼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런데 버스를 타도 그 버스는 시내를 계속돌며 예약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호텔을 순회를 한다.
뜨득(嗣德)왕릉을 가는 길에 전통 향을 만드는 곳에 잠시 들린다.
아래 사진은 향 만드는 과정을 시연하고 있으나 우리들에게는 별로 감흥이 없다.
특히 원뿔모양의 대형 향은 한 달간이나 타는 향도 있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향이란 필수품이다.
집집마다 개인 사당이 있으니....
모두 태웠는지 드디어 시내를 빠져 나간다.
우리는 오후 5시에 출발하는 하노이행 슬리핑 버스를 예약을 했기에 4시 30분경에는 돌아와야 한다.
몇번을 확인해도 걱정마셔~~다.
드디어 첫 방문지 뜨득릉이다.
응우웬 왕조의 4대 왕이며 재위기간이 제일 긴 35년간을 통치한 왕이다.
입장료 55.000동, 우리 돈으로 5.000원 정도로 이곳 물가에 비해 비싼 편이다.
이곳에도 내국인과 외국인의 차별 정책이 있다.
내국인은 30.000동만 받는다.
젠장..... 인민을 하늘처럼 떠 받드는 사회주의 국가의 내국인 보호라고?
이런 차별정책이 없어져야 진정 세계인과 동등한 관계가 된다.
담 넘어로 보이는 폐허....
예전에는 무척 규모가 컸으리라 생각된다.
이중 가격 정책은 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게 인민을 사랑하는 방법이란 말인가?
자기나라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할 수가 있겠는가?
원래 X개도 자기 동네에서는 50% 거저 먹고 들어간다 하지 않았는냐?
그럼 우리가 집을 나와 개고생하는게야? 그런게야?
첫 방문지부터 佳人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러면 佳人이 뜨득왕에 대하여 좋은 말로 상대를 못하지....
그들은 왕을 황제라고 칭했단다.
뜨득왕릉은 1864년 부터 1867년까지 만 3년간 3.000명이 공사를 하며 완공한 능으로 이때가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완전히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농민 반란등으로 무척 힘든 시기였으나 재위기간이 35년으로 가장 오래 통치를 했단다.
그 때문에 국민들은 매우 힘들어 했으나 뜨득은 매우 향락적이고 호사스런 생활을 함으로 국민들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50명의 요리사가 50가지의 요리로 50명의 시종들의 도움을 받으며 식사를 했단다. 나 원 참....
그래도 중국의 서태후 보다는 하수다.
서태후는 서안에 피신해 왔으면서도 자기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라고 해 서안의 요리사들이 우리에게는
만두라고 하는 교자만 108가지나 만들어 매일 다른 것으로 올려단다.
후궁을 100명이나 두었다는데 자식이 없어 결국 조카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오히려 국민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를 하고 사랑받는 왕이 되었단다.
자식도 없이 후궁을 100명밖에 두지 않았다고?
그는 평소에 연꽃을 그리 좋아했다는데 왜 연꽃은 보이지 않는겐가?
시엠립 왓보사원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뜨득 그대를 위해 올려 드리네....
뜨득~ 그대는 연꽃의 의미를 아시는가?
모르시면 인터넷을 뒤져 보시게나.... 너무 길어 이곳에 올릴 수는 없다네....
꽃말은 우리나라에서는 "순수한 마음"이라네...
중국에서는 "당신을 생각하느라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라고 한다네...
그대가 중국보다 우리나라의 꽃말을 알았다면 그대는 순수한 마음을 지녔겠지만 이곳은 중국의 영향으로
오히려 그대의 마음과 육신의 병을 얻었다네...
한 명도 아니고 100명의 여인을 매일 생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니 병이 난게야.... 아시겠는가?
아래 사진에 보이는 연못과 그 위에 낭창한 정자 위에서 맨날 후궁들과 뭘 하셨겠는가?
그대... 누각의 마루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계단도 만들어 놓은 걸 보니 뱃놀이도 하셨겠네 그려....
안 봐도 비디오가 아니겠는가..... 그래 잼나게 노셨는가?
훼의 왕릉은 능만 있는게 아니라 생전 왕들의 별궁처럼 사용되어 졌단다.
우리가 생각하는 능만 덩그러니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평소 그가 생활했다는 양겸전이다.
어질 양(良) 겸손할 겸(謙) 대궐 전(殿)을 문패로 삼아 어질게 사치스러웠고 겸손하게 후궁을 딱 100명만
두고 이곳에서 지냈다.
그럼 우린 모야~~
겸손한게 아니라 비참하게 사는겨~~
그대 죽어서도 佳人을 놀리시는겐가?
푸 하하하하하~ 그대 佳人을 즐겁게 웃기시네 그려~~
뜨득왕이시여~
그대 100명의 후궁을 자랑하시고 싶으신겐가?
놀라지 마시게나.... 우리의 의자왕께서는 3.000명이시라네....
뻔데기 앞에 주름 잡지 마시게나..... 그대 충격이 매우 크시겠네.... 구석에 가서 손들고 계시게나...
그렇다고 의자왕처럼 그대의 후궁들에게 충성심을 테스트한다고 落花실험은 하지 마시게나....
그런 일은 스스로 몸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일이라네....
그대는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을 함께 묻었다며? 다른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면 사이코 패스라고 한다네..
우리 의자왕의 궁녀들은 나라의 종묘사직이 다함에 안타까워 스스로 몸을 던졌지만 그대는 혼자
저 세상으로 가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측근들을 왜 데리고 가셨는가?
혼자 가는 저승길이 그리도 두렵고 무서웠는가?
병약한 그대 혹시 무덤속에서 함께 묻힌 그들에게 요즈음에도 맨날 되지게 얻어 터지고 있지는 않겠지?
佳人이 보기에는 내부는 별로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았다.
아마도 체구가 작았던 듯 하다.
의자가 마치 어린이 전용 사진관에 있는 의자처럼 보였다.
그러니 의자만 봐도 우리의 의자왕 보다는 파워가 3.3%밖에는 되지 않지....
베트남의 거리 식당을 보면 우리의 목욕탕 의자이고 현지인들이 드나드는 식당의 의자들도 우리 의자
다리의 반을 잘라 만든것 처럼 숏다리 의자들이 많았다.
뜨득왕이시여... 혹시 이게 돌잔치 할 때 앉은 의자이신가?
내부는 그저 그런 정도이나 들어오는 입구에 연못과 누각은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곳이다.
평소에 몸이 약해서 연못 주위의 숲속에서 운동을 겸한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그대 왜 아펐는지 아시겠는가?
어찌보면 불행한 왕이 아니었나 싶다.
나라는 프랑스에게 넘어가지....
자식도 없지....
내란은 계속 일어나고 왕궁내에서는 암살기도 사건이 계속 생기지....
게다가 후궁은 100명이나 되는데 병약해 맨날 드러누워 지내지....
畵中之餠..... 그런게 그대를 더 아프게 했다네....
그래서 국민들이 측은지심이 발동했을지도...
멋있어 보이지만 사진발이다.
뜨득... 덕을 이으라고 이름을 嗣德이라고 하였건만 덕은 어디로 외출하고 후궁만 줄을 세웠는고?
그대.... 후궁들 이름이나 제대로 외우고 사셨는가?
아랫사람 이름을 정확히 불러주는 것도 그대가 존경을 받고 충성심을 일깨우는 일이라네...
그런데 누가 지붕에서 물을 쏟아 붓는다.
출발할 때 부터 내리던 비는 이제 하늘에 구멍이 뚫어졌다....
문 밖을 내다보니 담장에는 멋진 말 형상의 부조가 양각으로 세겨져 있다.
그래...
이제는 비만 봐도 느낌이 없다.
창틀 사이로 내다 보이는 밖의 풍경이 처연하기까지 한다.
그대.... 佳人을 만나니 슬퍼서 우시는겐가?
비내리는 왕릉...
뜨득왕도 이곳에서 비 오는 날 이런 모습을 바라 보았으리라.....
그래...
그대 뜨득왕이시여...., 얻은 것은 무엇이고 또 잃은 것은 무엇인가....
그대 왜 그리 아프셨는가?
아프다는 일은 그대만 힘든게 아니라네....
주위의 자식들이나 가족들에게 짐을 지운다는걸 아시겠는가?
물론 그대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이 100명이나 있었으니 잘 모르겠지만....
우리같은 민초들에게는 아프다는건 비극이라네...
오래 살면 뭐하겠는가?
수명도 건강수명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저 마음 편히 먹고 건강하게 살다가 그렇게 편히 눈을 감는게 우리 민초들의 소망이라네...
이곳에는 돌에다 글을 세긴 비석이 있다.
물론 한자로 세겨져 있다.
그래서 얼른 뛰어 그곳으로 갔다.
글을 읽어 보려고?
왜 그러셔~~
비가 퍼 붓는데 그럼 천천히 걸어 가겠수?
저곳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잖여~~
이곳에 씌여진 글은 자신의 공적을 찬양한 자화자찬의 글...
이게 왠 오벨리스크?
왜 여기 있지?
양쪽으로 두개씩이나.... 그곳에도 한자로 글을 세겨 놓았다.
제일 뒤편에 구석진데....
바로 그곳에 왕의 무덤이 있다.
실제로 왕의 시신은 이곳에 있지 않고 다른곳에 있을거라는 설도 있다.
능 공사를 한 인부 200명을 모두 죽였기에....
어디 한번 까봐?
평소에 풍류를 매우 즐겼으며 그의 죽음을 맞아 주위의 많은 시종들을 함께 산체로 묻었단다.
재위중에 수많은 프랑스의 선교사들을 죽였으며 사제들과 신자들도 죽였단다.
저물어가는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주변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거절 당하고,,,,
전투의 달인이라는 징기스칸의 묘도 오리무중이다.
그도 능 공사를 한 인부들을 죽였으며 인부들을 죽인 병사들을 또 죽이고......
이렇게 여러차례 죽이다 보니 후손들이 묘를 찾지 못해 제사도 못 지낸다.
제삿밥도 제대로 얻어 먹지 못하는 귀신은 또 굶어 죽어 걸신이 된다.
그대 살아 생전 세상을 그대 품안에 품었다마는 남은 것은 초라한 무덤뿐이라네....
그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들이마신 숨 조차 다 내뱉지 못하고 가지 않았더냐....
나라가 기울고 병약한 몸으로 살다가 간 그대는 이름만 왕으로 살았지 정말 불행한 왕이라네...
지금 그대는 한 줌의 훍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네.....
세상을 호령하다 남긴건 달랑 무덤 하나.....
그것도 가묘 하나를 보라고?
그대~ 그럼 왕릉 투어라고 입장료 내고 들어온 우리에게 가짜묘로 대신하려는가?
그것도 내국인보다 더 비싸게 받아놓고.....
그대가 佳人에게 한 행동은 닭 잡아 먹고 오리발 내민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살아서 세상을 호령했지만 외진 구석에 초라한 가묘 하나 달랑......
이게 인생의 끝이런가....
그대 佳人에게 많이 섭섭했는가?
노여움 푸시게나... 비도 오고 佳人도 마음이 언짢아 해본 소리라네....
그냥 한 번 웃자고 한 소리이니 마음에 두지 마시게나....
글쓴이 : 佳人
사진도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 남자 나이 40이면 불혹이라고 한다. 세상을 의심없이 살아가라는 말이다,.
이제 살아온 시간과 살아 갈 시간이 딱 절반이다. 中年의 나이는 重年의 나이다.
사회적으로도 무거워야 하고 특히 가정에서도 무거워야 한다.
주머니를 두둑히 채워 노후에 대비해야 하고 특히 입을 무겁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