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익당강 전투와 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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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익당강 전투와 쩐흥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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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여 개의 기암괴석이 바다 가운데 솟아 베트남 북부 관광에 최고의 명승지로 꼽는 하롱베이가 있습니다.

한국사람이 하노이에 가면 무조건 둘러보는 곳이지요.

마치 중국의 계림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계림은 어느 날 바다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쑥 솟아올랐다고

하는데 하롱베이는 산이 서서히 가라앉아 봉우리만 남이 있다는 게 다르다고 합니다.

모 항공사에서 선전에 나오면서 많은 한국인이 다녀오는 곳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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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란 말뜻도 下龍으로 말 그대로 하늘에서 용이 내려왔다는 말입니다.

옛날 중국의 칩입으로 고통을 받을 때 베트남을 침공하는 중국을 응징하기 위해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입에서 불을 내뿜어 외적으로부터 베트남을 지켜주었다는데 그것이 이렇게 섬으로 되어 남아 있다는

베트남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세계적인 관광지이면서 베트남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조상의 역사가 사실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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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下龍灣)으로 흘러들어가는 바익 당(Bach Dang 白藤) 강이 있다.

이 강에서는 베트남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전투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호아루(花閭)에서 베트남 최초의 독립연호를 사용한 딘 왕조가 탄생하기 전 베트남인들은 이미 중국으로

부터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인다.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베트남은 당의 내부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이나 황소의 난까지 여러 차례 변란이 

일어나며 남 비엣에 대한 지배력이 차츰 약해진다.

 

907년 주전충(朱全忠)이 당나라의 애제(哀帝)를 살해하고 후량(後梁)을 세우자 중국 대륙은 다시금

혼란스러워지며 각 지방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일어난다.

이때를 5대 10국 시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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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본토가 혼란해지자 남 비엣은 중국 1.000년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할 기회를 잡는다.

중국 남부지방의 절도사인 유은의 아들 유엄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남한(南漢)이라 했다.

중국인이었던 그들은 중국의 지배 질서를 파괴하고 독립국을 건설하려 했으며 오히려 남 비엣 사람인

쿡 트아 미는 중국의 기득권에 편승하여 권력을 유지하려 한 기묘한 왜곡된 일이 일어난다.

 

두 세력 간의 전투에서 쿡 트아 미가 사로잡히고 남한은 홍강 델타 지방까지 세력을 넓히게 된다.

지금의 홍 강 델타 지역은 남한이 지배했으며 그 아래는 세력 밖인 셈이다.  

남 비엣에는 중국 세력과 힘을 합쳐 세력을 잡으려는 자와 중국 세력을 배제하려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정면으로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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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왕의 아들인 유흥조에게 군사를 주고 남 비엣을 토벌하기 위하여 함대를 이끌고 바익 당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남 비엣의 응오 꾸옌(吳權) 군대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응오 꾸옌은 기상천외한 전략을 세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익 당 강 하류는 지금의 하롱베이로 응오 꾸옌은 강 하구에 미리 나무 말뚝을 박고 그 위를 쇠로 덮어

튼튼하게 보강을 하였다.

 

아래 사진은 다오 띠똡이라는 띠똡섬이다.

소련의 띠똡이 호치민에게 이 섬을 달라고 하자 그냥 이름만 남겨준 섬이다.

우리나라 모 항공사가 이곳에서 촬영한 광고가 많은 사람에게 이곳 여행을 꿈꾸게 하였다.

신혼여행을 온 부부가 "여보~ 이다음에 부모님 모시고 여기에...."라고 했던가?

그러나 우리 부부는 우리 힘으로 둘이서만 배낭 메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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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 때가 되자 응오 꾸옌 함대는 도망가는 것처럼 위장하여 유흥조의 함대를 강 상류로 유인한다.

썰물이 되자 응오 꾸옌 군대는 반격에 나서고 유흥조 함대는 퇴각하며 하류에 설치된 쇠말뚝에 걸려

배가 뒤집히고 병사들의 태반은 물에 빠져 죽게 된다.

 

이곳 전투에서 도망가는 유흥조도 끝내 붙잡혀 죽고 만다.

이 전투가 1차 바익당 강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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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몽골 제국 징기스칸의 손자인 제5대 칸인 쿠빌라이가 중국을 경영하고자 1271년 새로운 세상인 원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인 세조가 된다.

1253년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몽골 군대는 운남 지방에 있던 대리국을 정복하니 다이 비엣과 몽골 제국이

국경을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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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침입.

운남에 머물고 있던 몽골의 우리양카다이는 1257년 사신을 보내 다이 비엣을 거쳐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몽골 군대가 통과할 길을 빌려 달라고 한다.

일본이 조선에 명나라를 정벌한다고 정명가도를 요구한 일과 똑같다.

 

다이 비엣은 요구에 응하지 않고 방비를 더욱 강화했다.

이때 다이 비엣의 총사령관이 되어 몽골에 맞선 사람이 쩐 꾸옥 뚜언(陳國峻)....

후에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쩐 흥 다오(陳興道)가 바로 이 사람이다.

현재 베트남 어느 도시에나 쩐 흥 다오라는 도로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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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몽골군은 파죽지세로 지금의 하노이인 탕롱(昇龍)을 함락한다.

공격이 시작되자 탕롱의 주민들과 왕은 집을 모두 불태우고 곡식을 모두 없애고 미리 빠져나간 뒤였다.

 

몽골 군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식량을 조달할 방법이 없고 지독한 더위 때문에 즉시 운남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철수하는 몽골 군을 쩐 흥 다오는 여지없이 추격하여 쳐부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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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침입.

1276년 원은 여섯 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새로운 요구를 해 온다.

그러면서 주위의 캄보디아, 미얀마, 참파, 자바를 차례로 정벌하고 1285년 1월 다이 비엣을 다시 공격한다.

전면전은 상대 되지 못한다.

 

다시 탕롱이 유린당하고 탕롱을 지키던 장군 쩐 빈 쫑(陳平仲)은 포로가 되고 만다.

원의 장군은 그에게 용기를 칭송하고 왕이 되고 싶지 않으냐고 회유를 했지만 그는 "나는 북국의 왕이 되기

보다 차라리 남국의 악귀가 되겠다. 붙잡힌 내 운명은 네 손에 달렸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하며 참수를 택했다.

 

수도 탕롱이 점령되고 나서도 다이 비엣은 쩐 흥 다오를 중심으로 계속 저항을 하게 된다.

왕은 차라리 항복을 하자고 했으나 그는 항복하기 전에 자신의 머리를 먼저 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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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50만 명의 군대를 증파하여 라오스를 우회하여 참파를 거쳐 남에서 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지형에 익숙한 쩐 흥 다오는 밀림으로 퇴각하고 수시로 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구사한다.     

 

저항이 계속되고 주민들은 식량을 감추고 불태우며 압박을 가하자 원군은 1차 침입 때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철수를 하게 된다.

철수하는 원군을 공격하여 5만 명이 넘는 원군의 포로를 잡는 성과를 내며 탕롱을 탈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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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침입.

두 차례나 실패한 원 세조는 화가 난다.

1287년 다시 다이 비엣으로 공격하여 온다.

두 번의 실패는 식량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500척이나 되는 배를 더 건조하고 식량수송에 전력을 기울였다.

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으로 날씨도 서늘한 겨울인 12월에 탕롱에 다시 들어온다.

전투는 마찬가지로 전개된다.

 

다이 비엣의 쩐 카인 즈(陳慶余)장군은 지금의 홍 가이부근의 바다에서 원나라의 대규모 선단을 발견하고

식량과 무기들을 실은 배라고 직감하고 후미를 공격해 300척의 배를 불태웠다.

보급로가 끊긴 원나라는 원정을 포기하고 퇴각을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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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흥 다오는 팜 응 라오(范五老) 장군에게 국경에 있는 랑 썬이라는 곳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퇴각로를

끊게 하고 바익 당 강으로 유도하고 3세기 반 전에 응오 꾸엔이 남한의 군대를 격퇴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강바닥에 썰물 때 말뚝을 박고 밀물 때를 가늠해서 도망가는 척하며 유인한다.

물이 빠지자 배가 큰 원의 전함은 말뚝에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뱃머리를 돌려 죽을 각오로 원의 함대를 공격하고 미리 강의 양안에 매복한 육군과 더불어 원의 함대를

공격하니 원의 전함 100척은 침몰당하고 400척은 포획되고 만다.

대부분 원의 군대는 포로가 되거나 물에 빠져 죽고 육로로 퇴각하던 원군도 랑 썬에서 팜 응 라오가

이끄는 매복군에게 대패하며 거의 전멸을 하고 만다.    

이날이 1288년 4월 3일이다.

 

바익당 강에서의 전투는 이야기로만 남아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당시에 강 하구에 박아 놓았던 나무기둥이

얼마전에도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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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쩐 흥 다오는 세 차례에 걸쳐 공격해 온 원나라의 군대로부터 다이 비엣을 구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들은 정중하게 돌려보내나 적장인 우마루는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수장시켜 버렸다.

 

원나라는 그 후 다시 베트남 정벌을 계획하지만,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가 사망함으로 출병은 중지되었다.

이 전투는 후에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자신감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커다란 의미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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쩐 흥 다오가 죽을 때 아인 똥 왕은 집에까지 찾아가 "다시 북쪽에서 쳐들어오면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묻자 "적들이 큰불이나 폭풍우처럼 단번에 무턱대고 돌진해 오면 그들을 물리치기 쉬울 것입니다.

그들과 대항하기 위하여는 끈질기고도 단숨에 공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이 뽕잎을 갉아먹듯 참을성 있게 차분하게 순서를 밟아 쳐들어온다면, 또한 약탈도 하지 않고

서둘러 승리를 거두려 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가장 뛰어난 장군을 보내 장기를 두듯이 가장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하며 싸워야 합니다.

군대는 부모 자식처럼 마음을 하나로 해서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또 민중의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않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속에 길을 뚫어 오래 쓸 기지를 건설하듯이 힘을 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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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언은 현대까지 이어져 프랑스에 대한 저항과 독립전쟁,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베트남

민중에게 큰 힘이 됐다.

지금도 베트남의 어느 도시를 가나 쩐 흥 다오 거리가 있고 동상이 있으며 팜 응 라오라는 거리명이 있다.

 

글쓴이 : 佳人

4 Comments
관운장 2010.04.29 08:18  
그립습니다 하롱베이
대단하십니다 쌓아놓으신 지식이
佳人1 2010.04.29 19:51  
하롱베이...
정말 멋진 곳이죠.
그런 곳에도 역사가 살아있습니다.
곰돌이 2010.04.29 13:24  
좋은 사진도 보고,  모르는 역사도 알수 있는..

가인님의 여행기









벳남의 대몽 항전 모습과,  고려의 대몽항전 모습이 겹쳐져서 떠오릅니다....
佳人1 2010.04.29 19:54  
몽골의 침공으로 지금 중국 따리를 중심으로 사는 바이족의 남조국도 삼켜버렸지요.
우리 고려도 강화도로 피신하며 버텼으나 항복에 준하는화친막� 수 믾은 우리 사람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베트남은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살려 결국 이겨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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