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 여행 19일 째
여행을 다니다 보면 기후나 이동, 음식, 잠자리 등이 우리와는 달라 무척 힘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곳에는 다시는 오지말아야지 하며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그때가 오히려 더 생각이 나고 그립습니다.
佳人은 그런 단순한 이치마저도 왜 모르고 살아갈까요?
오늘은 그냥 하노이 시내를 둘러봅니다.
하노이 시타델이라는 옛 성벽을 둘러보며 하루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하노이에도 아직 옛 왕궁터와 성벽터가 남아있습니다.
하노이는 시내 크기가 별로 크지 않아 걸어 다니며 보아도 대부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시타델부터 간다.
그곳을 가는 길은 아래 지도처럼 올드쿼터라고 하는 구시가지에서 천천히 걸어가도 멀지 않다.
그냥 걷자. 오토바이와 실랑이 할 이유도 없고 불안에 떨며 택시 탈 일도 없다.
천 년의 고도라는 하노이는 역사는 오래되었어도 역사적인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하노이에는 시타델이라는 궁성 터가 남아있다.
우리 눈에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이곳은 베트남 역사에 중요한 지역이리라.
물론 전쟁의 영향도 있겠지만 유적보다 사회주의 선전을 위한 호치민의 우상화 때문에 수많은 동상이 있고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곳은 많으나 유적의 보호나 복원사업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레닌이라는 사내는 왜 고향을 떠나 더운 베트남에 있는 겐가?
사실 이곳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의 대부분이 역사적인 유적을 보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다.
저렴한 물가 때문에 쉬며 즐기기 위해 오는 관광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도 중국과는 다르다는 느낌이다.
중국은 우리도 놀랄 만큼 유적을 복원하고 관리하고 있으며 멋지고 유명한 자연에 우리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케이블 카나 리프트를 설치하여 살인적인 입장료를 받아가며 접근이 쉽게 관리한다.
전설로만 전해오는 이야기 속의 것들도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롭게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있는 나라이다.
장사꾼인 사회주의와 맹목적인 사회주의의 차이라고 할까?
아래 사진에서 보 듯... 전혀 관리가 이루어져있지 않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그들의 피 속에 흐르는 장사꾼의 소질은 수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 주나라에 멸망한 고대국가인 商나라 사람이 반겨주는 곳이 없어 집단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며 장사를
하였다 하여 이를 가리켜 商人이라는 말이 생겼으니까. 상인의 어원은 무척 오래된 나라다.
들어가는 입구에 관리인이 한 사람 있다.
물론 입장은 무료다.
같은 사회주의 체제인 북한은 어떨까?
곳곳에 동상과 아름다운 자연에 체제선전과 교시로 온통 도배질을 하여 놓지 않았는가?
대대손손 자손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산천은 100년도 살지 못하는 못난 인간을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베트남은 그래도 도로 이름에는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을 따 만들었다.
베트남의 도로는 역사 속의 유명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로들이 많이 있다.
그 중 하이 바 쯩(Hai Ba Trung)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로가 거의 모든 도시마다 있다.
이 이름은 쯩 짝(Trung Trac 徵側)과 쯩 니(Trung Nhi 徵貳)라는 자매를 기리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하이(Hai)란 베트남어로 둘이라는 말이고 바(Ba)란 우리말로 여사에 해당하는 존칭이란다.
그러니 하이 바 쯩은 두 사람의 쯩 여사라는 의미다.
쯩자매가 살던 당시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고 새로운 태수로 소정(蘇定)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다.
그는 매우 탐욕스럽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중국은 후한 말기로 매우 혼란스러웠고 중앙의 지배능력이 점차 약화가 되어 본국에서 베트남에 파견된
태수의 힘이 매우 강했다.
흥 브엉(雄王) 시대의 수도였던 퐁 쩌우의 메린현을 다스리던 락장(酪將 : 베트남 초기의 계급사회를
酪社會라고 한다)의 딸로 AD 14년 태어난 자매 중 큰 딸인 쯩 짝은 이웃 고을인 쭈 찌엔(朱鳶)현의 락장인
티 싸익(詩索)과 결혼을 한다.
그러나 포악한 태수인 소정은 티 싸익과 다른 락장들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살해하자 쯩 짝은
여동생인 쯩 니와 함께 AD 40년 군사를 일으킨다.
쯩 자매의 호소에 접한 다른 고을이 호응하여 함께 군사를 일으키며 반란군은 순식간에 현 65개를 함락 시킬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이에 놀란 소정은 중국으로 줄행랑을 치고 만다.
반란에 성공한 쯩짝은 메 린을 수도로 삼고 쯩 브엉(徵王)이 되었다.
이것이 베트남에 전해 내려오는 쯩 자매의 반란이며 중국에 대한 독립을 위한 베트남 최초의 저항 사건이다.
당시의 베트남은 모계사회로 여성의 권리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다.
후한의 광무제는 쯩 자매의 반란을 한의 지배를 뿌리째 뒤흔드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보고 42년 4월
마원(馬援)이라는 장수를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임명하고 남 비엣에 파견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대포는 유물이 아닌가?
전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엿장수한테 고물값에 넘기는 것은 어떨까?
아름다운 것.... 지나간 역사도 유물도 모두 아름다운 것이지 호치민과 사회주의만 아름다운 게 아닌걸.....
마원은 8.000명의 정규군과 중국 남부에서 징병한 1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랑박(浪迫)에 주둔했다.
대치하는 사이에 반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락장들의 이탈이 가속화되며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쯩 자매는
크게 패하고 대부분의 군사는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만다.
지금 중국의 계림 시내에 복파산이라는 산이 있고 그 산 아래에는 아래처럼 복파장군 마원의 동상이 있다.
활을 쏘고 있는 모습인데 방향이 베트남 방향인 서쪽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있고 산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혀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복파장국 마원과 베트남 장수가 서로 활쏘기를 하였는데 마원이 쏜 화살이 바로 앞에
있는 산의 바위를 뚫고 지나가 커다란 구멍을 내고 하노이 까지 날아갔다는 웃기조차 거북스러운 이야기가....
정말 중국다운 이야기가 남아있다.
쯩 자매는 저항하며 계속 싸웠으나 42년 말 결국 마원에게 붙잡히고 다음 해 1월 소금에 절인 자매의 목은
한나라의 수도인 낙양으로 보내졌다. (중국의 기록)
그러나 베트남의 기록으로는 쯩 자매는 막다른 곳에 몰리자 자매는 손을 잡고 강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전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9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역사란 이렇게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잔인한 종말일 수 있고 피지못한 아름다운 꽃과 같은 가슴 아픈
아름다운 사연이 될 수 있다.
비록 3년간의 짧은 기간에 독립을 얻었을 뿐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쯩 자매는 중국의 지배에 저항한 베트남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녀는 프랑스의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잔 다르크처럼 베트남의 잔 다르크임에 분명하다.
아래 아가씨가 쯩자매가 아니다.
시타델을 둘러보는 도중에 유일하게 만난 베트남 학생이다.
중국계 아이로 중국어 몇 마디로 간단한 의사소통....
그러나 한 번 불붙기 시작한 독립의 열망은 200년이 흐른 AD 248년 끄우 쩐에서 코끼리를 타고 군사를 일으킨
찌에우 어우라는 부인이 있다.
몇 달 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녀는 끝내 한나라의 대군에 패하고 나서 살해된다.
찌에우 부인의 반란은 베트남에서 여성이 이끈 마지막 반란이며 토착 지배 계급이 일으킨 최후의 저항이었다.
시타델을 나와 앞에 있는 공원길을 가로질러 가면 바로 호치민 묘가 있는 바딘광장이 나온다.
역시 관리 하나는 죽여준다.마주보고 있는 유적지 시타델과 호치민이 잠들고 있는 곳...
호치민은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하여 베트남 전역에 골고루 뿌리라고 유언을 하였는데 오늘로 박제가 되어
세상의 여러나라 사람과 만나느라고 너무 힘이든다.
죽은자가 산자를 다스리는 나라...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어느나라나 같다.
중국 한나라가 통치한 이후 근 1.000여 년간을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과 천 년 전쟁에서 독립을 이룩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어찌 구름이나 소나기가 내리지 않고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나 아름다움 뒤에는 많은 고통과 노력이 따르는 법.....
쯩 자매나 찌에우 부인의 이름은 지금도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외에도 어느 도시나 대부분 거리 이름으로
남아 민중들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이바쯩거리... 바로 쯩 자매를 기리는 거리 이름이다.
글쓴이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 사랑하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다는 것은 살아가는 도중에 행복한 일입니다.
설령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렸을지언정 한 번도 갖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합니다.
그것이 여행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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