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다녀왔습니다] 10. 쌈느아 Xam Neua
(BGM) 천지인 - 청계천 8가 음악끄려면 ESC
쌈느아 버스터미널 |
쌈느아에 도착하는 즉시 방을 구해서 뻗을 생각이었지만, 루앙파방에서 잘 쉬고 와서인지 두어군데 숙소를 돌고, 방을 잡고 나서도 별로 졸립지가 않다. 3층의 밝고 아담한 방이 취향에 맞아서 4$에 들긴 했는데,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보다. 친절하지만 눈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 주인할머니가 대강 청소를 해 주셨다. 눈이 많이 안 좋으신가보다. 다시 쓸고 닦고 이불까지 털어서 베란다에 널었다.
청소하며 방을 들락거리는데, 심하게 불륜의 티가 나는 남녀가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앞방으로 들어간다. 오호, 직장인 불륜커플? 집에서 좀 일찍 나오고, 직장에 좀 지각하면 님과 함께 쌍콤한 하루가 시작된다 이거지. 콧노래를 부르며 방문앞을 몇 번 왔다갔다 해 주었다.
라오스도 별 수 없군. 사람사는 동네는 어디나 다 똑같은가보다.
'쌈'의 정체. 쌈느아는 '쌈강 북쪽'이라는 뜻이다. 쌈강 남쪽, 쌈따이도 있다. |
관광안내소는 위치가 바뀌긴 했어도 가이드북의 암시대로 여전히 친절했고, 말만 잘 하면 커피라도 한 잔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밥도? ㅎ
쌈느아는 내 라오어 선생님의 고향이라 이름이 괜히 친근한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또, 퐁살리 사람들이 지방을 오가는 17인승의 작은 비행기는 서두르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이틀 후 위앙짠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관광안내소를 한 번 들러본 건데, 여기서 귀중한 정보를 얻게 될 줄이야. 쌈느아에서 위앙짠으로 가는 비행기는 매주 월-수-토요일에 있단다.
출발하기 전에 라오항공에 문의했을 때는 월-수-금요일이라기에, 거기다 일정을 맞추고 있었다. 오늘은 수요일, 사라진 버스 때문에 루앙파방까지 되돌아갔다 오는 데 하루를 써 버려서 위앙텅은 포기해버렸는데, 월-수-토가 맞다면 갔다올 수도 있겠다.
라오항공 안내를 믿어야 하나, 관광안내소를 믿어야 하나... 라오항공에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월-수-금요일이란다. 관광안내소 직원이랑 통화를 하게 했더니, 결과는 관광안내소 승리. 와우, 대단한데? 라오항공 안내에서 최근에 새로 바뀐 스케줄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난감한 일이다. 이런 항공사를 믿고 비행기를 타야 한다니. 비행기 타기 전에 굿 함 해야겠구마.
쌈느아 시내에는 바로 비행기표를 끊어 주는 항공사 사무실이 없어서 공항까지 직접 가야 했다. 아슬아슬하게도 표는 17장 중에서 달랑 두 장 이 남아 있었다. 꽤 운이 좋은 편이다. 기분이 좋아졌다. 성태우 기사에게 물어 찾아간 식당의 f퍼가 맛있어서 기분은 조금 더 업. 별 거 없다. 일 잘 풀리고 맛난 걸로 배채우면 기분 좋은 거다.
버스터미널 앞의 쌀국수 가게에서. 길을 '다니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썰렁한가. |
한껏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시장을 돌며 동료직원들한테 줄 기념품을 골랐다. 여직원들에겐 띤씬(전통치마 씬의 밑단에 덧붙이는 장식)을 사 주면 될 것 같은데, 남자들은 뭘 주지. 살 만한 품목이 없다. 퐁살리에서 T군의 부모님께 받은 라오퐁살리나 나눠 줄까나.
어느새 점심때가 돼서 위앙싸이로 출발. 오후 한나절 동안 위앙싸이의 동굴들을 둘러보고 오기로 했다. 그런데 내일 기름값이 오른다고 주유소들이 일제히 문을 닫아서, 썽태우는 기름을 찾아 한참을 헤맨다. 별 일이 다 있구만... 그러고보니, 위앙짠에서도 직원들이 기름을 못 넣어서 출근을 못 한다고 했던 적이 있다. 그 때는 '그것도 핑곗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면서 혀를 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지체할 시간이 별로 없는데... 1시에 동굴 가이드 출발한댔는데...
위앙싸이. 사방에 저런 산들이 돋아나 있다. |
여기에도 무명용사의 탑이. |
위앙싸이 초등학교. 방학인 건지, 아니면 쓰지않는 건물인 건지. 그렇잖아도 엄청 낡았는데, 애들까지 없으니 더 황폐해 보인다. |
1시 반을 훌쩍 넘겨서 위앙싸이에 도착했다. 터미널에 내려서 동굴관리사무소를 찾는 데도 한참이 걸려서, 입장권을 산 시간은 2시. 가이드 설명 듣기는 글러먹었군. 그런데 다행히도 1시 가이드가 이제야 출발한다. 손님이 없었나보다. 위앙짠에서 왔다는 현지인 부부가 붙어서, 가이드 포함 네 명이 구경을 나섰다. 현지인 부부는 자기들 오토바이로, 나는 가이드 오토바이 뒤에 타고 꽤 떨어진 동굴 사이를 이동한다. 인원이 많으면 그냥 걸어다닌단다. 해가 너무 뜨거워서 익어버리겠는데?
동굴을 다섯 군데쯤 돌아보았다. 동굴구경이라기보다는 그냥 박물관의 전시품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꽤나 심심한 박물관. 예전에 들은 바로는, 여기가 '라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태어난 곳'이랬는데, 그런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잘 그려지지 않았다.
위앙싸이의 동굴들은 인도차이나 전쟁 중에 빠텟라오(당시 공산혁명조직의 이름. '라오의 나라'라는 뜻) 수뇌부의 은신처로 이용되던 곳이다. 중요한 동굴에는 거기 살았던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고, 안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심지어 까이선 전대통령이 쓰던 수건까지 그대로 세숫대 옆에 걸려 있다. 별 소소한 것들이 다 있길래, '화장실의 대통령 응가도 그대로 있나요?' 하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라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우상으로 떠받드는지 알기 때문에 지그시 목을 눌러 경망스러운 질문을 참았다. 가이드 뒤를 따라가다 슬쩍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긴 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다.
이동경로를 좀 신경써서 꾸미고, 가이드를 붙이는 대신 자세한 안내문을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좋은 경치를 나름의 페이스로 즐길 기회가 없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코스의 마지막에 역사박물관을 만들어 인도차이나 전쟁과 빠텟라오의 활동에 대해 좀 더 실감나게 전시하는 건 어떨지. 활동모습을 찍은 사진도 하나 없이, 살던 집에 쓰던 물건만 남아 있는 게 좀 을씨년스러웠다. 사람 냄새가 안 난달까.
하기야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곳이 군사기밀지역이었다고 하니, 이만큼 개방하는 데도 라오스 정부는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노력해주세요. 이정도로 놔두기엔 위앙싸이, 경치가 너무 아깝잖아. 정말 위앙싸이의 경치는 멋지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동굴구경은 제끼고, 산들이 버섯처럼 퐁퐁 돋아나 있는 귀여운 동네를 설렁설렁 돌아다녀보고 싶다.
내가 쌈느아로 가는 막차를 탈 수 있을지 걱정하자, 가이드가 오토바이로 터미널까지 데려다준다. 컵짜이.
이 가이드는 몽족이란다.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국편에 서서 라오 공산주의자들과 싸웠던 몽족의 후예가, 그들 선조의 적군쪽에서 일하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직 반 세기도 지나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세월은 역사를 삼키고, 사람은 세월을 살아가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