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이야기 #004 - 4000개의 섬, 씨판돈.
라오스 이야기 - 4000개의 섬, 씨판돈
돈 뎃에서 만난 해무리- 이날 밤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이렇게 무지개처럼 예쁜 해무리는 처음 봤다-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메콩 강의 아침 :)
전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갈로로 돌아와 비자 클리어 한 이후의 북부 일정을 조정하고자
지도에 이것저것 체크를 해본다. 오기 전에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정보들로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는데 막상 오고 나서 보니 내가 방향만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든 방법이 다 나온다.
굳이 30일짜리 비자를 받지 않고 북부 일정을 마치려면 상당히 빡빡해 질 것 같지만, 들른 곳이 나랑
맞지 않으면 금방 다음 목적지로 떠나면 되는 나의 긴 여정에는 그다지 문제 될 게 없어 보이긴 하는데.
북부 일정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중요하니 씨판돈에서의
유유자적하는 날들이 전혀 아깝지가 않다.
지난 일정과 앞으로의 일정을 정리중-
흠, 팍세에 들러서 문명생활을 좀 하고 탐콩로 갔다가 비엔티엔 들어가면 첫 번째 비자의
15일은 거의 맞겠구나...북부에서 보낼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은데, 30일 비자를 받을까...
에잇. 모르겠다. 그냥 비엔티엔까지 여정이 더 남아있으니 그 때 생각해보자.
일정을 조정하다가 물을 사두는 것을 깜빡했다는 생각에 시계를 보니 열한시가 다 되어간다.
지금 타운까지 걸어가면 20분 걸릴텐데, 그럼 열한시 반... 문 연 상점이 있을까?
왜 이 동네는 세븐도 없는 걸까, 나는 왜 낮에 물을 사두지 않았단 말인가.
방갈로 엄마는 벌써 자는것 같던데...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하지만...
이미 몸은 밤의 길 위에 서있다.
물을 마셔야 해. 컨디션이 안 좋아도 할 건 해야지.
불편한 로컬버스 타고 하는 장거리 이동만 아니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캠핑용 후레시 하나에 의지해 구름이 잔뜩 껴 별조차도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걸어 나간다.
와, 정말 뭐라도 나올 것 같이 칠흑과 같은 어둠이 이런 말일까?
저녁 무렵부터 강하게 불던 바람에 야자수 잎이 가지채로 떨어져 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이거 지나가다 맞으면 여행자 보험에 해당 되는 건가? 이상한 생각도 해본다.
길을 걷는 동안 지나쳐간 많은 방갈로에서 새어나오는 낮은 불빛, 작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인기척을 느끼며 안심한다.
이십여 분을 걸어 도착한 타운. 열한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이런 거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밤은 열두시부터 아닌가?!
돈뎃에서의 하루는 해가 넘어감과 동시에 마무리 되나보다.
요 며칠간은 나도 늦어도 열한시에는 잠들었는데...열한시 반에 밖에 나오니 완전 다들 꿈나라다.
다행히 막 가게 정리를 시작하며 음악을 끄는 아주머니를 발견하고 냉큼 뛰어 들어가 냉장고에서
물 한병을 꺼낸다. 그리고 집에 가면서 마실 비아라오도.
이것도 주세요.
중간에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일단 와 봤는데 목적을 달성했으니
기쁨의 축배를 들어야지. 돌아가는 길에 지구를 안주삼아 맥주를 마셔보았다.
구름에 가려졌던 별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하고,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떼들과도
수없이 마주친다. 니들 밤에 보니까 왜 이렇게 무서운 거니. 후레시로 비추니까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소들도 나를 보고 얼마나 놀랐겠나 싶지만, 아 정말. 뿔 달린 소는 무서워...
빠이에서 뿔 달린 소한테 장난 걸었다가 들이 받힐 뻔 했던 기억 때문에 뿔 달린 애들은 피하고 싶다.
낯선 사람을 봐도 꼬리 흔들며 반기는 돈뎃의 멍뭉이들, 밤이 되니 노련하게 동네를 산책하는 고양이들.
적당히 부는 바람 모두가 술친구다.
방갈로에 돌아오니 열두시.
몸이 안 좋으니 술도 금방 취한다. 맥주 한병에 기분이 좋아져 금방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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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보기만 해도 좋았던 풍경, 분홈 방갈로에서.
돈뎃에서 네 번째 아침을 맞이했고, 오늘은 몸 상태가 절정임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갈로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사방팔방에 있는 문이라는 문은 다 열어두고 씨판돈에서의
기억들을 정리한다.
아직 씨판돈[돈뎃]에 머물고 있지만 이곳의 하루는 어느새 일상과 같이 흐르기 시작했고,
오늘과 그리고 떠나게 될 날까지도 큰 변화 없이 조용히 마무리가 될 것 같기에 며칠간의 감상들에
이야기를 붙여보았다. 딱히 별일 없었던 것 같은 며칠 동안의 이야기를 이렇게나 길게 쓰게 되리라고는.
내가 이곳에 길게 머물게 된 것 만큼이나 놀랍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길게 머물게 될 수도 있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나는 일은
긴 여행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행에서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내가 생각해 둔 루트로 옮겨다는 것 정도.
-그나마 그 것도 예상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직 거쳐 온 곳보다 거쳐 가야 할 곳이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는 순간마저 설렌다.
내가 여행 중이구나, 아침마다 낯선 천장을 보며 일어나는 순간순간 감사한다.
씨판돈에서의 날들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짓고 팍세로 떠나게 될 내일 아침까지
조용히 일상에 녹아 있어야겠다. 45리터의 배낭에 짐들을 쑤셔 넣고, 제 시간에 오지 않는 버스를
노심초사 기다리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미소로 대화하며...
언제가 되어야 다시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캄보디아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던 돈뎃.
아직까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이 곳 씨판돈.
나의 첫 번째 라오스의 기억을 안겨준 이 곳에서의 날들을 조용히 마무리 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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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뎃 선착장 근처의 낮풍경. 물놀이와 태닝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선라이즈 사이드에서 매일 같이 지나다녔던 골목길. 강변쪽엔 방갈로, 건너편엔 상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