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유랑기 - 8. 달랏-나짱-꾸이년-플레이꾸-플레이껀-보이/푸끄아국경-볼라벤-빡세 2023.3.12~3.22
달랏과 나짱을 잇는 140km의 27번 도로에는 모든 것을 삼킬 것 같은 벽이 있다.
천계와 지계를 나누는 짙고도 긴 안개의 장벽은 웬만한 소리, 웬만한 빛, 웬만한 냄새마저 삼킨다.
긴장을 늦추었다가는 의식마저 삼켜질 것 같아 전조등을 켜고 방향지시등을 킨 채로 서행을 한다.
무사히 안개의 벽에서 뱉어지고 나서야 지계의 끝, 나짱에 도착한다.
비교적 관광객이 적은 혼쫑 해변 근처에서 긴장과 여장을 푼다.
세 번째의 방문이니 볕과 싸우며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한채 느긋함만으로 이틀 동안 나짱에 머문다.
또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아침이다. 꾸이년이 있는 1번 도로의 북쪽으로 핸들을 돌린다.
칸호아성과 푸옌성의 경계를 지키는 돌머리 바위는 이번에도 나의 길, 그 끝을 묻는다.
나 조차도 모르는 끝이어서 이번에도 아무런 대답을 못한다.
뚜이호아는 푸옌성의 성도이며 해변도시이다.
귀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관광객은 아주 드문듯 하다.
뚜이호아에서 꾸이년까지 100km의 거리에는 크고 작은 만이 많다.
만이어서 파고가 높지 않고 그래서 양식을 하기에 좋은가 보다.
꾸이년은 새롭게 떠오르는 휴양도시이다. 4년 전에도 그렇게 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떠오르기만 하는 것 같다.
넓고 긴 해변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게 드물 정도이다.
바다는 좋아하지만 번잡함은 싫어하는 객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은 4년 전과 같다.
객을 위한 숙식 시설도 많고 다양하며
도시 소음도 비교적 낮다.
인근에 참파의 유적이나
오를 산과 계곡이 있어서 둘러볼 거리도 비교적 모자라지 않다.
떠올라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을 꾸이년이다.
라오스에 비하면 베트남은 길이 많아서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기회가 많다.
19번 도로를 타고 얼마 전 들렀던 고원도시, 플레이꾸에 오른다.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늘한 대기마저 도와준다.
지아라이성 박물관은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이곳에서 일어난 변화를 전시한다.
여느 베트남 박물관처럼 이곳에도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전을 전시한 공간이 압도적으로 크다.
박물관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는 '뉴이다'라고 하는 낮은 오름이 있다. 오래전에 활동했던 화산인 듯하다.
이곳의 북쪽 구릉지에는 촘촘하게 붙어서 살아가는 산 자들의 동네가 있다.
그 동네에는 촘촘하게 붙어서 쉬고 있는 죽은 자들의 묘역이 있다.
삶과 죽음의 간격이 아주 가깝다는 것을 단면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동네이다.
가까운 북서쪽에는 플레이옵 민속 관광촌이 있지만
몇 안 되는 상징물만 볼 수 있고 민속춤이나 음악이나 생활상을 볼 수 없어서 유감스럽다.
북쪽 방향으로 30여 km 떨어진 곳에 추당야 화산 지대가 있다.
오색의 꽃으로 조화를 맞춘 둥근 언덕의 사진에 빠져서 힘들게 찾아온 곳이다.
계절이 일렀는지 오색 대신 무채색만 보인다. 실망하지 않고도 돌아설 수 있는 변명거리를 모으고 나서야 라오스 국경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플레이껀에서 밤을 보낸 후 편할 만큼 익숙하게 보이/푸끄아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온다.
국경을 넘나드는 오토바이 짐꾼 무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안남산맥의 서쪽 사면을 내려온다.
누군가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고단한 노동의 길을 오가지만, 나는 풍요로운 죽음을 대비하기 위해서 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리화한다.
아직도 볼라벤은 불타고 있고 빡세는 무더워지고 있다.